거창 지역 답사 사진 2 (2011. 6. 5)
- 수승대, 건계정
거창이 자랑하는 최고의 명승은 단연코 수승대(搜勝臺)이다.
경치 좋고 물 맑은 것 뿐만 아니라, 요수 신권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들의 스토리가 가득하다.
거창에 은거한 학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셋 고르라면 요수 신권, 갈천 임훈, 동계 정온을 들 수 있는데, 수승대의 주변은 요수 신권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많고, 갈천 임훈과도 각별한 사연이 깃들인 곳이다.
요수 신권과 갈천 임훈은 처남 매부(신권이 갈천 임훈의 매부) 사이이기도 하며, 동계 정온은 갈천 임훈을 스승으로 모신 사제간이기도 하다.
거창 신씨 집안은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며, 수승대와 가까운 곳에 거창 신씨의 씨족마을(황산마을)이 있다.
요수(樂水) 신권(愼權, 1501~1573)은 일찌기 벼슬길을 포기하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가꾸어 심성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구연재'(龜淵齋, 지금의 구연서원)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냇물 건너편 언덕에 정자를 꾸미고 '요수정'(樂水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수승대의 원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는데, 퇴계 이황이 이름을 바꿀 것을 권유해 '수승대'(搜勝臺)로 바뀌었다고 한다. 실제로 수승대의 거북바위에는 '搜勝臺'와 '愁送臺'라는 이름이 함께 나란히 새겨져 있다.
거창지방이 백제의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는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이 자주 오갔다. 강약이 부동인지라 신라로 간 백제의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은 예사요,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 근심[愁]으로 사신을 떠나보냈다[送] 하여 여기를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 한다.
위와 유사하지만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신라와 백제의 나들목이 되는 이곳에서 양국 사신이 서로 전송하면서 "근심을 잊게 했다'고 해서 '수송대(愁送臺)라고 했다고 한다.
또 이와는 달리,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송대로 불리던 이곳이 수승대로 바뀌게 된 것은 조선시대다.
1543년 퇴계는 안의 영송마을에 사는 장인을 뵈러 와 설을 쇠었다. 퇴계는 그 기회에 수송대를 꼭 찾아가 보고 싶어하면서, 동천(洞天)의 천석(泉石)은 빼어난데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수승대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모두 좋아했다고 한다(寄題搜勝臺).
아직 잔설이 남아있던 이른 봄날, 요수 신권은 요수정(樂水亭)에 주안상을 마련하고 퇴계를 기다렸으나, 마침 급한 왕명을 받은 퇴계는 서둘러 발길을 돌리게 되었고, 요수 신권에게는 양해의 말과 함께 시를 한 통 써 보냈다.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搜勝名新換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逢春景益佳
먼 숲 꽃망울은 터져오르는데 遠林花欲動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陰壑雪猶埋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未寓搜尋眼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惟增想像懷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他年一樽酒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라 巨筆寫雲崖
비록 퇴계는 오지 못하고 그의 시문만 왔지만, 요수 신권은 퇴계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퇴계 이황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요수의 이 시는 퇴계가 보낸 시에 화답하는 뜻으로, 퇴계의 시에 운(韻)을 맞추어 지었다.(佳, 埋, 悔, 崖).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가는데 林壑皆增采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臺名肇錫佳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勝日樽前値
구름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愁雲筆底埋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深荷珍重敎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殊絶恨望悔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行塵遙莫追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獨倚老松崖
그런데 거창의 또 다른 선비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00~1584)은 수송대가 수승대로 이름이 바뀐 것에 대하여, 자신의 시를 통해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갈천은 퇴계와 동갑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다가, 부모 봉양을 위해 낙향하여 효행으로 정려문을 하사받고, 나중에는 광주 목사까지 지낸 분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은 거창의 명사였다.
강 언덕에 가득한 꽃 술동이에 가득한 술 花滿江皐酒滿樽
소맷자락 이어질 듯 흥에 취한 사람들 遊人連袂慢紛紛
저무는 봄빛 밟고 자네 떠난다니 春將暮處君將去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不獨愁春愁送君
갈천의 시를 보면,
이곳에 와보지도 않은 '외지인'인 퇴계가 단지 말로만 듣고 이름을 바꾸려 하자, '현지인'의 입장에서, '근심을 보낸다'는 수송(愁送)의 뜻을, 봄과 길손을 이별하는 마음과 연관시킨 것이다. 이는 수송대라는 이름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거북바위의 암벽에는 '수승대'(搜勝臺) 와 '수송대'(愁送臺)라는 이름이 함께 일렬로 새겨져 있으며, 갈천이 지은 시가 퇴계가 지은 시와 나란히 새겨져 있다.
퇴계의 시의 윗부분에는 '수승대'(搜勝臺)라는 글자가, 갈천의 시의 윗부분에는 '수송대'(愁送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도 절묘한 배열이라고 생각된다.
* 사진 가운데 멀리 거북바위가 보인다.
* 거북바위 건너편에 있는 요수정.
* 요수정은 천연 암반을 초석으로 삼아 그 위에 그대로 기둥을 세웠다. 산골의 추운 곳이라 정자 한 켠에 방을 만들고, 불을 때 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요수정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활주. 돌기둥과 나무기둥이 날렵하다.
* 요수정 현판.
논어의 요산요수(樂山樂水),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에서 따온 것이다.
* 거북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이 삼면에 가득하다.
* 퇴계 선생(이황)과 갈천 선생(임훈) 등의 원시에서 운을 차용해서 쓴 시문들이 새겨져 있다.
** 퇴계, 갈천 등의 글씨가 새겨진 각자밑으로, '요수장수지대'(樂水藏修之臺 : 요수 선생이 은거하여 수양하던 곳)라고 새겨진 각자가 보인다.
* 거북바위 앞에 있는 커다란 암반에, 붓을 씻는 용도로 사용한 듯, 인공적으로 물길을 내고, 洗筆(?)라고 이름도 붙였다.
* 맨 왼쪽의 글자가 무슨 자인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세필짐'이라고 표기한 글들이 더러 보이는데, 내가 큰 자전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 글자는 찾을 수 없었다.
* 위의 사진과 같은 바위의 암반인데, 평평하면서 약간 우묵한 것이 먹을 가는 벼루를 연상시킨다.
* 벼루 연(硯) 자를 써서, 연반석(硯磐石)이라고 새겨놓았다.
* 수승대와 수송대가 함께 새겨진 각자.
오른쪽은 '수승대'(搜勝臺)라는 글자 밑에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 : 퇴계 선생이 이름을 지은 곳)라고 새기고 그 왼쪽으로 퇴계의 시를 새겨 넣었다.
왼쪽은 '수송대'(愁送臺)라는 글자 밑에 '갈천장구지대'(葛川杖구之臺 : 갈천 선생이 가죽신에 지팡이 집고 거닐던 곳)라고 새기고, 그 오른 편에 갈천의 시를 새겨 넣었다.
아마도 이 지역 사람들은 갈천의 시를 더욱 좋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며, 나 또한 갈천의 애향심과 더불어 그의 시에 더 애착이 간다.
* 거북바위의 다른쪽 면에 새겨진 수승대 각자.
搜勝이라고 쓴 글자 밑으로 신권서(愼權書 : 요수 신권이 쓰다)라는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 거북바위 위쪽에 단을 쌓은 모습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거북바위 약간 아래쪽으로 구연서원이 있다.
요수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연재가 선생이 죽은 뒤 서원이 되었는데, 바로 구연서원이다.
*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觀水樓).
문루 양 옆(특히 왼쪽)의 바위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 돋보인다.
관수루라는 이름은 맹자의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 必觀其瀾 : 물을 보는 데는 따로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보라)에서 따온 것이다.
* 구연서원의 관수루 옆의 큰 바위벽에 새겨진 각자. 요수 선생이 퇴계의 수승대 명명시에 화답한 시가 새겨져 있다.
** 퇴계 이황의 방문에 대비하여, 대(정자)를 청소하고 술을 준비하며 그를 기다렸으나, 사람은 오지 않고 퇴계가 쓴 시만 왔다는 내용과 함께, 퇴계의 수승대 명명시에 대한 답으로 요수 선생이 시를 썼다는 내용과 함께, 요수 선생의 화답시가 새겨져 있다.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가는데 林壑皆增采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臺名肇錫佳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勝日樽前値
구름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愁雲筆底埋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深荷珍重敎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殊絶恨望悔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行塵遙莫追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獨倚老松崖
* 관수루 옆 바위 틈에서 자라난 나무의 생명력이 경이롭다.
문루 앞과 바위 등 주변에 그늘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나무다.
* 문루 옆 같은 바위에 '요수신선생장수동'(樂水愼先生藏修洞)이라고 새겨져 있다.
거북바위에는 '요수장수지대'(樂水藏修之臺 : 요수 선생이 은거하여 수양하던 곳)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요수 선생이 수양하던 곳이라고 여러 군데에 글씨를 새겨놓은 데는 이유가 있다.
** 수승대 거북바위에는 수송대와 수승대 두 이름이 나란히 새겨 있고, 퇴계, 요수, 갈천 선생의 시가 모두 권위있게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탐승객들까지 다투어 이름을 새겨 오늘날에는 거의 빈자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글씨도 제각각이고 크기도 제각각이어서 어지럽기 그지없는데, 그 이름을 보면 신(愼)씨와 임(林)씨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이 명승지를 두고 벌인 두 집안의 갈등 때문이었다.
갈등의 발단은 퇴계의 명성 때문에 일어난 셈이었다. 수승대 거북바위의 수많은 각자(刻字)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퇴계의 시로, 오는 이마다 이 글을 찾았다. 그런데 퇴계의 시와 나란히 짝을 이루는 것은 요수 신권의 시가 아니라 갈천 임훈의 시였다.
그래서 임씨 문중은 은연중 위신이 높아지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이 임씨의 동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씨 집안에서는 이것이 억울했다. 그래서 '요수 선생이 몸을 감추고 마음을 닦은 곳'이라는 뜻의 '요수신선생장수동(樂水愼先生藏修洞)'이라는 글을 새겼다.
그러자 임씨들은 '갈천 선생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끌고 노닐던 곳'이라는 뜻으로 '갈천장구지소(葛川杖구之所)'라고 새겨넣었다.
이에 신씨들은 숙종 20년(1694) 구연재에 구연서원을 세우고 신권 선생을 모셨다. 또 순조 5년(1805)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요수정을 건너편 계곡 위 솔밭 사이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임씨들과 충돌이 일어났으며, 소송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참고 :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관수루 안쪽의 나무 기둥.
용트림하듯 비틀어지고 굽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스러움과 멋스러움을 한껏 풍기고 있어 절로 감탄이 나온다.
* 구연서원 안에 있는사적비.
구연서원은 요수 신권을 비롯하여 세 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이 세 사람의 행적에 대한 사적비이다. 서원에서 모시고 있는 위패의 주인공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이다.
* 근래에 세운 사적비 세 개가 나란히 서있는데, 주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크다.
왼쪽 큰 비석부터 차례로 요수 신권(樂水 愼權),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의 사적비이다.
서원 안에 사적비를 세우는 경우도 드물거니와(경내에 모두 5개의 비석이 있다), 그 규모도 건물 등 주변과 어울리질 않아 불편한 느낌이 든다.
관수루의 굽은 기둥, 주변과의 조화, 천연 지형을 이용하는 지혜 등과 비교해보면 너무 차이가 느껴진다.
* 관수루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따로 만들지 않았고, 옆의 바위를 통해 돌판을 밟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돌판이 깨질까 은근히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참 독창적이다.
수승대, 관수루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로 유명한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석, 1686~1761)이 있다.
관아재(觀我齋)는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화가인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삼재(三齋)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뤄 그림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린 인물이다.
광해군과 세조, 그리고 숙종의 어진을 새로 그릴 때, 영조 임금이 그의 그림 솜씨를 높이 사, 그때마다 그림 그리기를 명했으나, 하찮은 기예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며, 끝내 붓 잡기를 거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관수루는 관아재 조영석이 안음(현재 함양군 안의) 현감으로 있던 1740년에 지은 누각이다.
그때 그는 고을의 수령으로서 누각의 이름을 '관수루'라 명명함과 동시에, 관수루기를 지어 일의 내력을 밝혔다. 관수루 누각에 오르면 지금도 그의 글과 시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하였다.
근래에는 거북바위에서 남쪽면 하단에서, 안의 현감 재임시 이곳을 찾은 관아재 조영석이 지은 시문을 새겨놓은 것이 새로 발견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羅濟傳名愁送臺(신라, 백제에서 전한 이름 수송대요)
樂水改名岩龜臺(요수선생 개명한 이름은 암구대라)
退溪錫名搜勝臺(퇴계가 내린 이름은 수승대요)
遺風誦名樂水臺(유풍으로 읊는 이름은 요수대라)
시는 칠언절구로 장방형의 큰틀(110×110㎝)에 세로로 썼으며, 말미에 癸亥 四月 趙榮祏 書 [계해년(1743년) 사월 조영석 쓰다]라고 새겨져 있어, 그의 친필임을 보여주고 있다.
관아재가 이 시를 지은 때(1743)는 요수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70년 되던 해다. 요수 선생을 시로 애송한 것은 요수의 5세손으로 관아재보다 두 살 아래였던 유학자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선생과 평소 친분을 가진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관아재는 53세 되던 1738년(영조 14)에 옛 안음현감(현재 : 함양군 안의면, 거창군 마리 · 위천 · 북상면이 조선시대에는 안음현의 행정구역)으로 취임해 5년간 재직하다, 1743년(영조 19) 4월에 안음현감을 떠나면서 명소인 수승대의 거북바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참고로 거창의 누각과 정자들(요수정, 관수루, 건계정)에는 그 누정 안에 걸린 편액의 시문 내용을 번역해서 한 군데에 모아서 읽어볼 수 있도록 하였다.
* 요수정에 걸린 편액의 시문을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모아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한편 수승대 주차장 건너편에는 황산마을이 있다.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된 이 마을은 거창 신씨의 세거지이다.
거창 신씨의 시조 신수(愼修)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문종 때 우리나라에 귀화해 참지정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신안지(愼安之)는 병부상서를 역임했으며, 후손들은 거창에 살면서 거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거창 신씨는 조선조 이조참판을 지낸 신승선(愼承善, 1436~1502)의 대에 와서 명문(名門)으로 부상했다.
그는 임영대군(임영대군, 세종의 넷째아들)의 딸과 결혼했고, 그의 딸(신수근의 누이동생)은 성종의 세자빈(연산군의 부인)으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은 정승이 되었고, 중종의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가 바로 신수근의 딸이니, 당대에 이만한 권세가 없었다.
신씨의 영광은 거창에도 미쳐, 연산군이 즉위한 뒤, 1496년 왕비의 관향이라며, 거창을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단경왕후는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이고, 고모가 연산군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폐비되는 불운을 맞았다. 이때 거창은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
거창 신씨들이 한창 잘나갈 때 신권이 이곳에 들어온 이래 황산마을은 400년간 거창 신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신권은 소년시절 한양에서 공부하다 "벼슬이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자아는 하늘로부터 받은 것(人爵在人 天爵在我)"이라며, 안빈낙도하며 오로지 인격수양에 힘쓰겠다고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요수(樂水)라고 하였다.
신권은 거창의 거유인 갈천 임훈의 매부이기도 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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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고향을 잊지않기 위해 세운 정자 : 건계정(建溪亭)
거창은 덕유산 자락의 심산유곡이라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이 많으며, 곳곳에 정자도 많기로 유명하다. 많은 정자 중에서 수승대로 가기 전에 한 군데를 골라 찾은 곳이 건계정(建溪亭)이다.
거열산성으로 올라가는 군립공원 입구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수승대 다음으로 손꼽히는 거창의 명승지이다.
건계정은 거창 장씨들이 1905년에 조상을 기리면서 세웠고, 1970년에 중건한 것이다.
거창 장씨의 시조는 중국인 장종행(章宗行)이다. 그는 원래 송나라 건주 사람이었지만, 고려 충렬왕 때 귀화해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충헌공(忠獻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의 사위이기도 하다.
건계정이라는 이름은 바로 시조의 고향인 건주를 의미한다.
장종행의 아들 장두민(章斗民)은 상장군으로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물리치는 무훈을 세워 공민왕이 그를 아림군(娥林君)에 봉했다. '아림'은 거창의 옛이름이다. 그 뒤 후손들이 거창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후손은 고려왕조에서 높은 벼슬을 했는데,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군 웅양면으로 퇴거하여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건계정은 요수정과 마찬가지로 계곡의 천연 암반 위에 그대로 나무 기둥을 세웠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곁에 있는 식당이 건계정의 경관을 흐리게 하는 듯 하며, 건계정의 위 아래로 계곡을 가로지른 콘크리트 다리 또한 건계정 주변의 풍광을 거스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 계곡 건너편 도로에서 바라본 건계정과 계곡의 모습.
옆의 식당 건물이 주변 풍광과 조화롭지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보통은 이런 곳에 재실(齋室 : 공부하는 동안, 간단히 침식을 하면서 생활하는 공간)이 있는 법인데...
* 조금 더 가까이 당겨서 찍은 건계정의 모습.
자연과 건축이 잘 조화된 모습으로서, 그리 크진 않지만 주변의 지형을 잘 활용한 팔작지붕의 멋진 건물이다.
* 바로 밑에서 본 견계정의 모습.
중국 건주(建州)가 이 정자를 세운 거창 장씨들의 원래 고향이다.
* 천연 암반을 그대로 기둥의 초석으로 활용한 건계정의 아래 모습.
* 건계정 바로 옆의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 나무 밑이 건계정 주변의 계곡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이다.
* 건계정 안에 걸린 편액.
거창 장씨들의 내력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조상들을 기리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 해 경영하여 이 집을 완성하니, 이 구역 자연 풍광 한층 더 선명하다.
근원이 건주이니 중국 생각 간절하나, 외적을 토벌하여 아림으로 본관했네.
후손은 감히 조상 가업을 닦는다고 하고, 남들은 가문 명성 이었다며 빈 칭송을 한다.
굽은 난간 가까이 신기한 거북 엎드려 있으니, 하도 낙서의 운수는 어느 시대에 또 생길까?
(후손기상 : 후손들이 기념하여 자세하게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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