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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과학적 조리법이 있는 한국 발효음식의 세계성

道雨 2012. 5. 15. 14:57

 

 

기다림의 미학, 과학적 조리법이 있는 한국 발효음식의 세계성

 

 


 

자연이 빚어낸 오래 묵을수록 좋은 발효음식 간장과 된장

한국의 밥상은 채식에 기반을 두고 발효음식문화가 발달한 특징이 있다. 지형적 조건 때문에 목축이 부적합하였고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부족해서, 자연에서 채취해 먹는 채식과 이를 발효시켜 먹는 기술이 발달한 것이다.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어 온 채식과 발효음식을 한국 음식의 근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나라의 발효음식에서 간장, 된장, 고추장을 빼놓을 수 없다. 요리하면서 간장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추장이나 된장은 국이나 찌개 같은 것을 만들 때 전체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니까 장醬의 맛은 모든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장은 콩을 삶아 소금으로 버무린 것을 자연에 있는 미생물들이 분해하여 만든 것을 말한다. 즉, 우리만의 토양과 기후가 만들어 낸 콩과 한반도에서 살아남은 미생물의 분해 작용이 한국의 독특한 장을 만드는 것이다. 장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한 6개월이며, 그 후 덧장(새 장을 담글 때 씨앗장(묵은 장)을 섞어 만드는 장을 덧장이라고 한다.) 의 형태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을 이어 집안의 장을 만들어 낸다. 세계 어느 민족도 이렇게 긴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음식을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 민족은 만주가 원산지인 콩의 민족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콩을 이용해 왔다. 물론 콩 자체도 전 세계가 인정하는 건강식품이지만 발효의 과정을 거쳐 된장이 되면 여러 가지 미생물들이 생겨 장의 기능에 좋은 유효성분들이 생겨난다. 무엇보다 콩에는 없는 비타민 B12가 생겨난다. 비타민 B12는 채식을 할 경우 부족하기 쉬운 성분이지만 우리는 된장, 간장을 통해 효율적으로 섭취해 올 수 있었다. 한국음식이 세계인의 건강식품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결국 발효의 힘이다. 따라서 한국의 장은 채식과 발효음식 문화를 대표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국 음식문화의 정수이다.

한민족 최고의 발명품인 김치

김치를 말할 때마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은 김치가 민족의 음식이 되어버렸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김치 특유의 냄새 때문에 김치를 숨기고 부끄러워했다. 그러던 김치가 이제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되었다. 한국의 음식학자들은 김치를 두고 한국인이 채소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낸 음식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라 생각한다. 채소를 단순히 소금에만 절인 ‘저菹’의 형태는 중국에도 있었고 일본에도 있었다. 특히 중국의 ‘저’를 우리나라 김치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식품학자도 있다. 그러나 한국 김치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면 중국의 ‘저’를 한국 김치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치는 우선 배추와 같은 채소에 온갖 종류의 동식물성 양념들이 어우러지고 적절하게 혼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함께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몸에 이로운 유산균을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만들어내야 비로소 김치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치는 중국의 ‘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김치는 한국 음식의 대표적인 원리처럼 말해지는 ‘섞음의 미학’을 잘 실천한 음식이다. 채소에다가 여러 양념을 넣은 다음 멸치나 새우 같은 동물성 식품을 발효시켜 만든 젓갈을 섞어서 다른 형태의 음식을 만들어 낸 것이 김치이다. 그래서 김치를 두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을 통해 들어 온 고춧가루를 김치에 이용한 지혜는 놀라운 것이다. 고춧가루의 매운 성분을 포함하고 있는 캡사이신이라는 물질은 비타민 C가 풍부해 항산화제의 기능을 한다. 우리는 인간의 노화 과정을 산화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산화를 억제하면 노화가 더디게 진척된다. 또한 고추는 미생물의 부패를 억제하는 기능이 있어 음식물을 쉬 상하지 않게 한다. 일본의 채소절임과 구분되는 특징이 여기에 숨어 있다. 즉 일본의 채소절임은 소금을 저장의 목적으로 쓰기 때문에 많이 넣어야 한다. 따라서 짜게 절여지게 된다. 중국의 채소절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김치는 고춧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소금을 조금 넣어도 된다. 그래서 크게 짜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김치에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은 과학적인 지혜이다.

맛깔스러운 젓갈과 식해

우리나라의 발효 음식 중에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음식이 있는데 이는 젓갈이다. 특히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 짭짤한 밑반찬 역할을 하는 것이 젓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상 기록은 『삼국사기』이며 683년 신문왕의 결혼예물에 ‘쌀, 술, 된장, 해’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해’는 젓갈과 식해로 볼 수 있다. 젓갈의 특징은 수산물에 소금을 첨가하여 만든 것이고, 식해는 수산물, 소금 외에 밥이나 채소를 혼합 발효시키는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생선, 조개, 새우 등을 20% 내외의 식염과 버무려 토기 항아리와 같은 광선이 차단되는 용기에 채워 놓고 윗부분을 2~3cm 두께의 식염으로 덮은 후 빗물이나 공기가 차단되는 덮개를 씌워 2~3개월 상온에서 저장하면, 내염성 세균과 효소의 작용으로 생선 비린내가 없어지면서 아미노산 발효로 구수한 맛을 내게 되며 즙액이 다소 생긴다. 이렇게 발효된 젓갈에 양념을 하면 우리가 먹는 창난젓, 조개젓, 새우젓 등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젓갈을 상온에서 6~12개월 발효시켜 육질이 모두 분해되도록 한 후 저어서 갈아서 부수고 체에 거른 후 끓여 살균하면 수년간 보관할 수 있는 젓국이 된다.

다음으로 우리 음식 중에 독특한 식해라는 것이 있다. 가자미식해 같은 것을 말한다. 이는 내장을 제거한 생선을 발효시키면서 곡물의 젖산 발효를 가미한 것으로, 생선에 6~8%의 식염을 가하여 하룻밤 절인 후 미리 삶아서 식힌 조밥 또는 쌀밥,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과 혼합하여 2~3일간 삭혀 만든다. 발효 2주 후에는 생선의 단백질이 적당히 분해되어 구수한 아미노산 맛이 생기고 유기산 발효에 의해 적당히 신맛이 나서 비린 맛이 나지 않는다. 생선의 뼈도 발효 중에 연해져서 뼈째 먹을 수 있게 된다. 젓갈은 반찬으로도 좋고 다른 음식의 조미료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한국음식의 특유한 맛이 여기서 나온다. 주로 김치에 많이 들어가는 것은 새우젓, 조기젓, 황석어젓, 멸치젓이고, 찌개의 간을 맞추는 데에는 새우젓, 나물을 무치는 데에는 멸치젓에서 나오는 멸장을 쓴다. 홍합을 건조할 때 만들어지는 합자장 등 동물성 단백질이 주를 이루는 장을 가지고 간을 맞추면 보통 장과 맛이 다르고 음식의 맛이 훌륭해진다.

정성과 기다림이 만드는 우리 음식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사람의 육신과 정신에 작용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음식이다. 음식은 생명을 가졌다면 누구나 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준다. 그 때문에 음식을 통해서 ‘느림의 철학’을 구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발효음식은 우리의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므로 몸과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준다.

우리 조상은 정성과 기다림으로 만들어지는 발효음식들을 먹음으로써 맑은 정신과 건강을 지켜왔다. 천천히, ‘느림의 미학’을 지향하는 발효음식에 깃든 정신이 우리 한국 음식문화의 철학이다. 발효음식은 긴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야만 만들어지는 음식이다. 그래서 발효음식을 먹을 때면 음식을 만든 사람의 정성과 기울인 시간을 생각하고 먹어야 한다.

 

[ 문화재사랑/20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