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와 검사Ⅱ(한명숙) ④ 검찰의 반격, 그리고 죄수H
(뉴스타파 / 김경래 / 2020-05-20)
https://www.youtube.com/watch?v=B_U1hB7JlMA&feature=youtu.be
이야기는 다시 2010년 12월 20일로 돌아간다. 검찰 조사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게 9억 원을 줬다고 진술했던 사업가 한만호는 이날 열린 공판에서 진술을 뒤집었다. 한만호가 감옥에서 작성한 비망록에 따르면 검찰이 자신을 추가 기소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컸다. 한만호는 당시 회사가 부도 났고 이미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형기를 마치고 나가면 재기를 해야 하는데 검찰 말 대로 하면 검찰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진술이 언론에 생중계되다시피 보도가 되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이용되는 모습에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가 비망록에 쓴 표현에 따르면 “검찰의 언론플레이는 마술사” 수준이었다. 한만호는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돈을 한명숙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줬다는 말을 했지만 검찰이 묵살했다고 비망록에 적었다. 한만호는 결국 공판을 기다려 증인석에서 검찰 진술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만호 비망록 52쪽>
● 검찰은 알고 있었다. 기자님들 들어주세요. 검찰은...다른 곳에 지원했거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증인이 2번 가량 ‘실탄’이란 용어 사용하며 이야기했고요... 못 알아들은 척 하였고 어렵게 이아기 했는데 핸드폰 들고 밖으로 나가서 한참만에 들어와서 오늘은 한 사장님이 피곤해하시니 그만하자, 오늘 드시고 싶은 메뉴를 말씀해달라. 회초밥을 먹었다. 무고한 총리님의 살점을 발라먹고 있다는 생각으로 복통 설사로 무척 고생했다.
▲ ‘한명숙 사건’의 핵심 증인 한만호가 감옥에서 작성한 1,200페이지의 비망록. 검찰에서 뇌물 공여를 진술한 이유와 이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이유 등이 상세히 적혀있다.
한만호의 진술 번복으로 ‘한명숙 사건’ 재판은 국면이 완전히 바뀌었다. 검찰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 검찰은 핵심 증인 한만호 진술에 기대지 않고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전달한 사실을 입증해 내야 했다. 또 한편으로는 한만호가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판사들 앞에서 증명해야 했다. 검찰은 한만호가 법정에서 위증을 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개시했다. 한만호의 감방을 압수수색해 비망록 등을 압수해갔다. 그리고 한명숙 전 총리 1심 판결이 나기도 전에 한만호를 위증 혐의로 기소한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검찰의 다급한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검찰은 또 다른 반격의 카드를 내놓는다.
다급한 검찰의 ‘반격 카드’ ①사기꾼
2011년 2월 21일 피고 한명숙 제 7차 공판. 검찰 측 증인으로 김00이 나왔다. 한만호와 함께 서울구치소에 있었던 사람이다. 1977년 생으로 당시 나이 35살. 2009년 사기로 구속됐다가 2010년 9월 출소했다. 이미 상습 사기 전과가 있었던 인물이다.
증인 김 씨가 재판정에서 한 증언의 핵심은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뇌물을 줬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여러차례 이야기했고, 8.15 특사를 기대했는데 검찰이 해주질 않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다. 쉽게 말하면 한만호가 법정에서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검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이었다. 김 씨의 증언은 핵심 내용도 한만호의 증언과 달랐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한만호의 주장과 완전히 배치됐다.
▲ 2010년 2월 21일 피고 한명숙 7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00. 검찰 측 증인이었던 김 씨는 한만호가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그림 : 윤석민)
증인 김 씨와 한만호는 2010년 4월 1일 서울중앙지검 구치감에서 만났다. 한만호는 통영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중앙지검 특수부에 소환됐다. 재소자가 검찰에 소환되면 구치소 버스를 타고 이동해 일단 검찰청 구치감이라는 곳에서 대기하게 된다. 여기서 김 씨와 한만호가 만난 것이다. 여기까지는 양 쪽 모두 똑같이 인정한 사실이다.
증인 김 씨는 구치소 수감 전부터 한만호와 경기도 일산에서 사업을 하던 중 여러차례 만난 사이로 서로 인사 정도는 하는 관계였다고 증언했다. 반면 한만호는 서로 고향을 물어보다 일산이라고 해 반가워했던만큼, 김 씨와는 구치감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고 주장했다.
<한명숙 사건 공판 조서 중>
● 김00 : (수감 전인) 2006년 일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한만호는 건설회사에 있었고 저는 부동산 관련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오다가다 뵙고 인사하는 사이였습니다.
● 한만호 : 저는 구치감에서 김OO이라는 사람을 처음 봤고 일산 후배라고 해서 반가운 내색을 해줬을 뿐입니다.
증인 김 씨는 또 한만호가 처음 만난 구치감에서 뇌물 때문에 문제가 됐다며 본인에게 의논을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만호는 김 씨를 그런 이야기를 나눌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한명숙 사건 공판 조서 중>
● 김00 : 한만호가 첫날 되게 불안해했습니다. 한만호의 표현이 그랬습니다. ‘나는 뇌물 준 것이 문제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라고 저에게 의논을 했습니다. 제가 ‘뇌물 처벌 받겠는데요’라고 했더니 ‘정지차금법으로 한번 둘러봐야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알아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 한만호 : 뇌물이고 정치자금이고 이런 쪽의 이야기는 한 기억도 없고,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진술을 하는 것인지 저로서는 감조차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 김00 : 한만호 사장님이 한명숙 총리 집에 간 내용까지 저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만호가 저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해주었습니다.
● 한만호 : 아무리 일산 사는 후배라고 하더라도 구치소에서 처음 보는 후배에게 무슨 돈을 준 이야기, 또 돈을 가져간 집의 구조나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지나치다. 정말 지나치다. 참 너의 뇌를 진짜 쪼개 보고 싶다.
한만호는 비망록에서 처음 중앙지검 특수부에 소환될 때 무엇 때문인지 알지도 못했다고 썼다. 그런 상황에서 소환 첫날 구치감에서 만난 김 씨에게 한명숙에게 준 뇌물에 대해 털어놨다는 것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만호 비망록 21쪽>
● 4월 1일. 통영에서 올라온 다음 날 소환되어 부도 경위와 피해자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제가 무슨 신분으로 조사받는 것이냐 물었다. 아무 신분도 아니고 그냥 조사하는 것이다.... 이때까지는 한 총리님 건이라 생각못했다.
한만호는 1961년 생, 2010년 당시 50살이었다. 비록 회사가 부도가 나 감옥에 갇힌 신세였지만 중견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증인 김 씨는 34살, 16살 어린 상습사기범에게 내밀한 뇌물 얘기를 만나자마다 털어놨다는 것 역시 다소 의아한 대목이다. 김 씨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명숙 사건 공판 조서 중>
● 김00 : 그 안(구치소)에서 같은 옷을 입고 사회에서 조금 알면 한 끼를 먹어도 가족 같이 지냅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사람들끼리 비록 죄를 짓고 들어왔지만 동질감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고, 증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인 김 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만호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이유는 한명숙에게 돈을 줬다고 털어놨는데 가석방이나 특사, 사업 재기 등에 검찰이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만호가 한명숙의 도움을 받을 생각으로 진술을 번복했다는 것이 김 씨의 주장이다.
<한명숙 사건 공판 조서 중>
● (한명숙 측) 변호인 : 증인은 한만호로부터 “검찰이 도움을 안 주니 (법정에서) 거짓말을 해야겠다, 진술을 번복하겠다”라는 말을 직접 들었는가요.
● 김00 : 예.
● 변호인 : 주로 한명숙이 도와줄 것이라고, 검찰보다 더 큰 기대를 했다고 하였지요. 그 근거는 뭐라고 하던가요.
● 김00 : 한명숙 총리님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변호인 : 야당 정치인이고 검찰에 의해서 기소까지 되어서 재판까지 받았고, 한만호는 불리한 진술까지 했는데도 한만호는 한명숙 총리가 자신을 계속 도와줄 것이라고 크게 기대했다는 것인가요.
● 김00 : 예.
● 변호인 :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 김00 : 시장 선거에서 떨어졌어도 옛날에 총리를 했었으니까요. ‘네가 봤을 때 일개 검사가 힘이 세겠느냐, 전 총리가 힘이 세겠느냐’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 집권 4년차였다. 아무리 전 총리라고 해도 이미 선거에서 떨어지고 뇌물 혐의로 기소까지 당한 한명숙 전 총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고 한만호가 기대했다는 진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급한 검찰의 ‘반격 카드’ ②약쟁이
한 달 뒤, 2011년 3월 7일 제 8차 공판에서도 또 다른 검찰 측 증인이 증인석에 섰다. 역시 한만호와 같이 서울구치소에 있던 최00. 상습 마약 사범이었다. 최 씨의 증언도 앞선 김 씨와 일맥상통했다. 한만호가 처음 만난 날부터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자신에게 말했으며,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9억 원이라는 액수,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서운한 감정까지 말했다는 것이다. 한만호는 역시 마약사범과 그런 말을 섞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 2011년 3월 7일 피고 한명숙 8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최00. 앞선 공판에 출석한 증인 김00과 마찬가지로 최00도 검찰의 기소 내용을 정확하게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그림 : 윤석민)
<한명숙 사건 공판 조서 중>
● 검사 : 한만호가 한 총리에게 돈을 주었고, 그 액수가 9억이라는 말을 처음 만난 날 하던가요.
● 최00 : 예. 처음 만난 날 들었습니다. 얼마 지난 뒤에 언론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제가 진짜 사실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 검사 : 그러자 한만호가 뭐라고 하던가요.
● 최00 : 웃으시면서 “내가 준 것을 줬다고 하지 안 준 걸 줬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검사 : 증인은 한만호가 한명숙 피고인에게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는 거를 들은 사실이 있는가요.
● 최00 : 제가 법정에서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험한 욕을 해 가면서 자기가 돈을 줄 때는 자기 회사 잘 될 때 갖다준 것이 아니고, 참 힘든 상황에서도 어렵게 갖다줬는데 약속을 안 지켰다면서 욕을 하고, 그 다음에 표현하기가 좀 그런데, 돈만 너무 밝힌다, 이러면서 욕을 하셨습니다.
● 한만호 : 이 사람이 웃기는 사람이네. 검사님이 전에 말씀하셨죠. “마약사범들 말 믿지 마세요. 박연차 회장도 당할 뻔했답니다.” 그렇게 말씀한 적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마약사범들에게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검사님 말씀 듣고 마약사범들과는 그냥 얘기를 듣기만 했지 누구 욕을 하나요.
검찰 측 증인 김 씨와 최 씨의 증언은 당시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했다.
<”한만호, 진술번복 대가로 사업 재개” 동료수감자 증언>(MBC)
<”한만호 진술 뒤집고 사업재개 생각했다”>(연합뉴스)
<”한만호 진술 번복 이전부터 계획”VS”근거없는 얘기>(노컷뉴스)
워낙 세간의 관심이 높은 재판이었기 때문에 증인들의 증언은 하나하나 보도되던 때였다. 한만호의 검찰 진술과 법정 증언 중 어떤 것이 진실이냐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던 상황이어서 위 검찰 측 증인 두 명의 법정 증언은 한만호의 평소 언행이 석연찮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수시로 검사실 출입했던 검찰 측 증인들
검찰 측 증인 김 씨와 최 씨는 공통점이 있었다. 구치소에서 친밀한 사이였다는 점 말고도, 검찰에 수시로 불려다니는 죄수들이었다는 점이다. 취재진이 입수한 두 증인의 출정기록에 따르면 김 씨는 2010년 3월부터 2010년 8월까지 6개월 동안 89차례 검찰에 출정을 갔다. 한 달 평균 15회, 이틀에 한 번 꼴이다. 특수부, 강력부, 형사부 등 다양한 검사실에 불려다녔다. 최 씨도 마찬가지였다. 최 씨는 2010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12개월 동안 148차례. 한달 평균 12회다. 직장인이 출근하듯 검찰청에 출정을 다녔다.
▲ 뉴스타파가 입수한 증인 김00과 최00의 출정 기록. 이들은 마치 직장인이 출근하는 것처럼 검찰청에 다닌 죄수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구치소에는 속칭 검찰의 ‘빨대’, ‘프락치’ 역할을 하는 죄수들이 있다. 검찰에 죄수들의 동향이나 범죄 첩보 등을 보고하고 편의를 제공 받거나, 자신들에 대한 구형량, 가석방 등을 거래하려는 자들이다. 검찰은 이런 죄수들을 수사에 적극 ‘활용’한다. 한만호의 변호인이었던 최강욱 변호사는 “사기전과자, 마약사범 등이 검찰에 가서 검사하고 딜을 많이 한다. 내가 뭐를 얘기해 줄 테니까 구형을 줄여달라, 이런 거”라며, 당시 한만호는 이들이 검찰과 거래하는 소재로 활용된 것이라 여겼다고 말했다. “자기(한만호)가 나중에 결국 그런 딜의 소재로 활용이 된 거잖아요. 그러니까 더 충격을 받았죠.” 최강욱 변호사가 전한 한만호의 당시 심경이다.
판결문에 숨어있던 ‘죄수H’의 존재
‘수상한’ 검찰 측 증인 김 씨와 최 씨의 공통점은 하나가 더 있었다. 두 증인의 증언이 의심스러웠던 한명숙 측 변호인은 한만호의 평소 언행을 들은 사람이 더 있냐고 반복적으로 질문했다. 이에 대해 김 씨와 최 씨는 공통적으로 대답한다. ‘죄수H’가 있었다고.
<한명숙 사건 공판 조서 중>
● (한명숙 측)변호인 : (한명숙 뇌물 사건을 한만호에게)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딱 듣고 증인은 누구에게 이야기하였나요.
● 김00 : H입니다.
● 변호인 : 한만호, H, 증인 세 사람이 같이 한만호의 사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가요.
● 김00 : 예.
● 변호인 : 구치소에서 H 외에 다른 사람에게도 “한만호 법원에서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이런 말한 적이 없나요.
● 최00 : 없습니다.
● 변호인 : 한명숙 재판 이후에 H와 김00, 셋이 만난 적도 있는가요.
● 최00 : 예. 있습니다.
● 변호인 : 검사실에서 만난 것인가요.
● 최00 : 예.
더구나 증인 최 씨는 죄수H가 본인들보다 한만호와 더 가까웠으며, 한만호가 진술 번복에 대해서도 죄수H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한명숙 사건 공판 조서 중>
● (한명숙 측)변호인 : 한만호, H 등과 구치감에서 다시 만난 사실이 있나요.
● 최00 : 만났습니다.
● 변호인 : 그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 최00 : 저는 H와 별 얘기를 나눈 것이 없고 H와 한만호가 둘이 붙어서 얘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 변호인 : 한만호, H, 증인 김 씨, 증인 최 씨 중에서 주로 한만호와 이야기한 것은 김 씨인가요?
● 최00 : 처음에는 김00이 많이 했고, 나중에 법원에서 진술을 뒤집겠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모두 H와 했습니다. 한만호가 자신의 결심 같은 구체적인 얘기는 H와 했습니다.
● 변호인 : 한만호와 H가 구체적으로 진술 번복에 관해 계획도 짜고 했는가요.
● 최00 : 그날은 그런 얘기만 했습니다. 두 분 사이에 어느 정도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정작 죄수H가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검찰은 한만호의 진술 번복 계획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죄수H를 왜 증인석에 세우지 않았을까. 여러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우리는 죄수H를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죄수H의 이름과 경제사범으로 꽤 긴 형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이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지금도 감옥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가설을 세우고 추적했다. 운 좋게도 죄수H가 광주교도소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죄수H’의 답장: “검찰은 썩은 집단”
취재진은 죄수H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다. 긴 시간이 흐르고 취재를 포기할 무렵 답장이 왔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심인보 김경래 기자님... 여기서 보는 검찰은 참으로 썩은 집단입니다.”
▲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죄수H가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보낸 편지. 뉴스타파는 죄수H와 10여 차례 편지를 교환했다.
여러차례 편지가 오간 뒤 죄수H는 면회를 허락했다. 우리는 광주교도소로 향했다. (5편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https://newstapa.org/article/8UJ0Y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uid=4967&table=byple_news |
죄수와 검사Ⅱ(한명숙) ③
"나는 검찰의 개였다" 한만호 비망록 단독 입수
이른바 ‘한명숙 2차 뇌물 사건’의 뇌물 공여자이자 핵심 증인인 고(故) 한만호 씨가 옥중에서 남긴 친필 비망록을 뉴스타파가 입수했다.
한만호 씨는 지난 2010년 4월 죄수 신분인 상태에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소환된 뒤 “한명숙에게 9억 원의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고 진술해, 한명숙 전 총리가 기소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법정에서 자신의 진술을 번복해 큰 파장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공책 29권, 천 2백 쪽 분량인 한만호 비망록에는, 한명숙에게 뇌물을 줬다고 진술했다가 번복한 이유가 자세히 적혀 있다.
비망록에서 한만호는, 자신이 추가 기소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사업 재기를 도와주겠다는 검찰의 약속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다며, 자신을 검찰의 “강아지”로 표현했다.
또 검찰이 처음 약속과는 달리, 언론 플레이를 통해 서울 시장 선거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보고 진술 번복을 결심했다고도 했다.
한만호가 검찰 조사에서 처음에는 한명숙이 아니라 당시 한나라당의 다른 정치인에게 뇌물을 줬다고 진술했지만, 검찰이 이를 묵살하고 한명숙 관련 진술만 요구했다는 주장도 비망록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났다.
마침내 공개되는 ‘한만호 비망록’
이른바 한명숙 2차 뇌물 사건의 두 번째 공판기일이었던 2010년 12월 20일, 서울중앙지검 510호 법정에 나온 한만호는 이렇게 말했다.
(아래 한만호 비망록에서 발췌해 인용하는 문장들은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어법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통영교도소로 이감된 지 불과 21일 뒤인 2010년 3월 30일, 한만호는 갑자기 서울 구치소로 이감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의 요구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만호는 자신이 왜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는지 전혀 몰랐다.
● 3월 30일 아침 화장실에서 세면 도중 이송명령 받고 즉시 짐 꾸려서 방 동료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송 교도관에게 어디로 누가 부른 것이냐, 무슨 자격이냐 (물으니) 검사가 부른 것이란 것 밖에 모른다(고 답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졌다. 추가 사건이 있나, 아마 누가 검찰에 직접 고소했나보다.
- 한만호 비망록 1072쪽 중
서울구치소로 이감된 한만호는 2010년 4월 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출정을 나가 조사를 받게 된다. 2-3시간 조사를 받고 나서야 한명숙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4월 1일. 통영에서 올라온 다음 날 소환되어 부도 경위와 피해자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제가 무슨 신분으로 조사받는 것이냐 물었다. 아무 신분도 아니고 그냥 조사하는 것이다.... 이때까지는 한 총리님 건이라 생각못했다… 2-3시간 지난 후 알고 지내는 정치인 있느냐 물었다. 이때부터 한 총리님 예감이 들었다.
- 한만호 비망록 21쪽 중
그런데, 비망록에 따르면, 한만호는 이날 조사에서 한명숙이 아닌 다른 정치인에게 돈을 준 사실을 얘기했다. 한나라당 친박계 의원이었다.
한만호는 비망록에 이 주장을 모두 4차례나 반복해서 적었다. 그만큼 이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만호가 정말로 한명숙이 아닌 한나라당 의원에게 6억 원을 줬는지는 지금에 와서 밝히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돈을 줬다는 당사자, 한만호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만호가 비망록을 통해 거듭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다른 의원의 이름을 댔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이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검찰의 관심은 오로지 한명숙에게만 있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뉴스타파는 검찰에 당시 한만호가 한나라당 다른 의원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게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왜 그러한 진술을 묵살했는지 질의했으나, 보도 시점까지 답을 받지 못했다. (검찰은 보도가 나간 뒤인 2020년 5월 14일 오후 1시 경 보내온 답변서에서 “한만호가 한명숙 외 다른 정치인에게 금품을 주었다는 진술은 전혀 없었으며, 비망록에 적힌 내용은 한명숙에게 전달한 금품의 사용처를 허위로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특수부 조사실에 법조 브로커 나타나 검찰 협조 종용”
2010년 4월 1일 중앙지검 특수부에 불려가 첫 조사를 받은 한만호는, 다음 날에도 특수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다. 검사와 수사관이 그에게 했다는 말은 협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한만호는 버텼다.
● 4월 2일 특수부 다시 소환됩니다. 수사관님과 검사님이 절대 불이익이 되지 않게 하겠다. 한 총리에 대해서 사실대로 답변해달라. 선택해라, 협조해서 도움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힘들게 해서 어려워지시든지. (그래서 저는) 한 총리님에 대한 이야기는 거론조차 하지 말아라.(고 답했고) 이렇게 종결됩니다.
- 한만호 비망록 21쪽 중
4월 3일, 검찰은 한만호를 또 소환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한만호가 비망록에서 ‘법조 브로커’라고 주장한 남 모 씨였다.
● 오후 끝날 무렵 조사실로 데려가더니 남00이 뛰어들어왔다. 얼굴 보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 한만호 비망록 21쪽 중
남 씨는 한만호가 구속된 이후 회사 정상화를 명분으로 한신건영에 감사로 입사한 인물이다. 감옥에 갇혀 있던 한만호는 수감생활 초기에는 회사에 있는 남 씨를 믿고 의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 씨가 사실은 자신의 회사를 빼앗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 남00에 대하여... (중략) 법정 관리 하겠다 하여 가져간 서류 악용해서 지분, 회사 양도해가고, 아버님께도 경매시 2억인가 준다고 하여 서류 받아가서 회사 강탈한 것임.
- 한만호 비망록 163쪽 중
그런데 남 씨는 스스로 법조계와 수사기관 인맥을 과시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한만호는 법조 브로커로 활동했던 남 씨의 뒤에 법조 권력이 있다 믿었고, 이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물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조사실에 나타난 것이다. 조사실에 나타난 남 씨는 한만호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 “사장님 협조하시고 도움을 받으시지요. 앞으로 다른 건 추가 기소로 또다시 어려워지실텐데요.”... “서울시장 선거도 있고 이 건은 전체를 직접 계획하고 주도하는 아주 윗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협조 안하시면 무척 힘들어지실 것입니다.”
- 한만호 비망록 21쪽, 61쪽
검사와 수사관들의 종용에도 한명숙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고 버티던 한만호는, 남 씨의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비망록에 “하늘이 무너지는 공포감”을 느꼈다고 썼다.
그날 밤, 구치소에 돌아온 한만호는 검찰에 협조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 돌아와서 밤을 꼬박 새웠다. 이것이 현실이고 대세며 따라야할 시류라면 따를 수 밖에. 협조해서 회사 찾고 복수하고 피눈물 흘리는 피해자분들 회복시켜드리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제 자신에게 합리화했다.
- 한만호 비망록 21쪽 중
한만호가 검찰에 협조하기로 결심한 첫 번째 동기가 공포였다면, 두 번째 동기는 희망이었다. 한만호는 구속된 이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복수와 재기를 꿈꿨다. 구속 이후 자신의 회사를 빼앗아간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출소 뒤 회사를 되찾아 재기하는 꿈을 꿨던 것이다. 비망록에 쓰여진 한만호의 주장에 따르면, 검찰은 그에게 협조의 대가로 그 꿈이 이뤄지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만호가 일단 검찰에 협조하기로 결심하고 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특수부 조사실에서 남 씨의 협박을 받고 난 다음 날부터 한만호는 “스토리를 구상해” 검찰에 진술하기 시작했다. 4월 5일 1차 조서, 4월 8일 2차 조서, 4월 12일 3차 조서, 4월 22일 4차 조서, 5월 11일 5차 조서가 완성된다. 검사와 수사관들은 그에게 식사 등의 편의를 제공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 자필 진술서 작성 이후부터는 한만호는 없어지고, 오로지 검찰의 안내대로 따르는 강아지가 되었고, 매일 점심이나 저녁 식사 때마다 검 수사관들의 립서비스에 마냥 흐뭇해하고, 옳고 그른지 판단력은 없어졌거나 마비되어버렸다.
- 한만호 비망록 1086쪽 중
“진술조서 암기시켜 테스트... 모멸감 잊지 못해”
한만호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처음으로 소환된 2010년 4월부터 그해 12월까지 검찰에 무려 73번이나 출정을 나가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한만호의 진술조서는 딱 5회 분량이다. 나머지 68번은 검찰 조사실에 나가 어떤 조사를 받았던 걸까. 비망록에 그 답이 있었다.
● 출정 전날에 방에서 운동장에서 시험 준비하느라 혼자 중얼중얼대서 다른 수감자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봤다. → 실수없이 잘하면 칭찬해주고 저녁(식사). 그 능멸, 모멸감을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 한만호 비망록 77쪽 중
검찰이 재판에 대비해 한명숙 측 변호인들의 질의에 대답하는 법을 알려주고 진술조서를 암기하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 과정 중에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한만호가 3차례에 걸쳐 3억 원씩 한명숙에게 가져다 줄 때, 두 사람 사이의 통화 횟수를 임의로 조정했다는 것이다.
● (9억 원을) 3번에 걸쳐 제공했다 허위 진술시 검찰에서 (한 총리와의 통화 횟수가) 매번 3번씩 433으로 스토리 만들었다가 나중에 332로 했다 소동이 되니 그냥 333으로 하자 합의하고 진술과 연습했다...종종 자금제공 순서가 바뀌고 해서 검사님이나 수사관님들이 당황한 적이 몇 번 있었다.
- 한만호 비망록 70쪽 중
한만호의 변호인을 맡았던 김정범 변호사 역시 한만호에게서 같은 얘기를 들었다.
“제가 한만호 씨한테 물어봤어요. 조서를 작성하지 않은 경우에는 뭘 했냐 하니까, 음식을 시켜서 먹고, 그 다음에 나중에 재판을 하다 보면 변호인이 이러이러한 공격을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될 것이냐, 그래서 시나리오를 가지고 연습도 하고 그랬다고, 한만호 씨는 그렇게 얘기를 했었어요, 당시에는. (기자: 만약에 그랬다면 그거 불법 아닌 겁니까?) 그렇죠. 당연히 불법이죠. 있을 수 없는 거죠. 대한민국 검찰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죠.”
- 김정범 변호사 인터뷰 중
“진술 번복의 동기는 검찰의 언론 플레이와 선거 개입”
이렇게 검찰의 “강아지”가 되어 충실하게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던 한만호는, 대체 왜 자신의 진술을 법정에서 번복하기로 결심한 걸까?
한만호 비망록에 따르면, 검찰의 ‘언론 플레이’와 ‘선거 개입’이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만호는 검찰에 협조를 결심하면서 검찰의 약속을 한 가지 받았다. 자신의 진술을 선거 전에 언론에 유포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한만호가 검찰에 협조를 시작한 게 2010년 4월 초, 서울시장 선거는 6월이었고, 이미 한명숙은 야당의 서울시장 후보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한만호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고 한다.
한만호와 검찰 수사관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까지 오갔다고 한다.
● 수사 초기에 언론에 악의적 보도 계속 터져나오게 되어 - 수사관에게 노무현 대통령도 저래서 (논바닥에서 시계)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 총리님도 이러다 그렇게 되시는 것 아닐까요. 정말 걱정됩니다. - 그런 일 절대 없을 것입니다. 한 사장님은 그런데 신경쓰지 마십시오. 우린 그런 걱정 안 합니다. 정말 걱정이 됐고 꿈도 서너 번 비슷한 내용으로 꾸었다.
- 한만호 비망록 1111쪽 중
한만호는 검찰이 약속을 지켰더라면 법정에서의 진술 번복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망록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 약속(언론에 안 나오게)대로 언론에 악의적인 이야기 흘리지 않았으면 증인의 심정이 그토록 고통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수 있었다. 총리님을 뵙는 것도 아니고. 증인도 살아야할 생각에 너무나 절박했기에 검찰의 진술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론 기사 내용은 그런 증인의 심정이 한층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아득함 뿐이었다. 거짓 진술, 사실이 아닌, 날조였기에
- 한만호 비망록 152쪽 중
한만호 비망록에 따르면 검찰은 한만호의 진술을 언론에 계속 흘리면서 (한만호는 이를 ‘언론질’이라고 표현했다) 서울 시장 선거 지지율을 계속 점검했다.
결국 한명숙은 서울 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불과 2만 6천여표, 0.6% 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선거 전 여론 조사에서 20% 포인트가 넘게 벌어졌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차이로 패배한 것이다. 한명숙이 간발의 차이로 패배하자, 한만호는 더욱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 총리님의 서울시장 선거 결과가 왜곡되고, 검찰이 언론을 통해 무차별 이미지 훼손 기사 나올 때마다 죄책감으로 가슴 속에 선혈이 터져나올 듯한 고통을 느꼈다. 부관참시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술을 바로잡아 진실을 밝힐 것이다.
- 한만호 비망록 7쪽 중
한명숙에게 돈을 줬다는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기로 결심한 한만호는, 그러나 검찰에는 이런 결심을 밝히지 않고 숨겼다. 선거는 이미 끝났고, 검찰에서 진술을 번복해봐야 통하지 않거나 겁박을 당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 검찰에서 진술 번복 시도하지 못한 이유는? 처음부터 윗선의 주도 계획하에 방대한 조직이 움직여서 시작된 수사라, 법정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시도했다간 어떤 명목으로든 (횡령 불법자금 로비 기타 등등)으로 보복당할 것이란 두려움에, 표정 관리하며 법정 증언날만 기다렸다.
- 한만호 비망록 134쪽 중
“검찰 언론플레이는 마술사” “언론은 관변 아첨 기관”
한만호는 비망록 곳곳에서 검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쓰는 듯한 언론의 행태에 분노를 표출했다. 한만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밖에서 사람들이 조중동이나 일부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라 해서 과장된 말이려니 했는데, 제가 직접 당해보니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어요. 언론의 권력은 견제 감시하는 기관이 아니고 ,적어도 정치 사건에 관해서는 기관지나 관변 아첨 기관이 되어 있는 것 알 수 있었지요. 조중동과 경제 신문은 충성 다툼이 술집 아가씨 분칠하듯 하구요.
- 한만호 비망록 1163-1164쪽 중
사건 당시 한만호의 변호인이었던 최강욱 변호사는, 한만호가 검사실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검사가 불러서 갔는데 어떤 사람이 앉아있다가 나가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책상에는 동아일보가 펼쳐져 있었고. 그 검사 지금도 현직에 있어요. 젊은 사람이 있다가 나가고 이 사람(한만호)이 이렇게 들어오니까, 둘이 스쳤을 거 아닙니까? 이렇게 쳐다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동아일보 기자예요.’ (라고 답하더라는 겁니다.)”
- 최강욱 변호사 인터뷰 중
검찰, 한만호 비망록은 “허위 사실, 모순된 논리”
검찰은 한만호의 비망록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면서, 증거 목록에 이런 설명을 달았다.
“한만호가 진술 번복 후, 허위 사실과 모순된 논리로 검찰을 공격”
검찰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비망록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한만호의 법정 진술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한만호가 어떤 이유로 법정에서 검찰 진술을 번복한 이후, 그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망록을 작성했다는 의미다. 검찰의 이같은 방어논리는 일리가 없지 않다.
뉴스타파는 검찰의 방어논리가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만호가 진술 번복을 하기 전에 적어놓은 기록들을 면밀히 살폈다.
한만호 비망록 가운데는 그가 검찰에 진술 협조를 결심한 시기인 2010년 4월부터 법정에서 진술 번복을 감행한 2010년 12월 사이에 기록해놓은 편지와 메모들이 다수 있다. 물론 그 가운데 한명숙 사건을 직접 언급한 부분은 많지 않다. 언제든지 뺏길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검찰이 다 확인하지 못했을, 의미심장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2010년 5월, 그러니까 한만호가 본격적으로 검찰에 협조를 하던 시기, 한신건영의 부하직원에게 보낸 편지의 초안이다.
한만호가 진술 번복 이후에 주장한 것처럼, 검찰에 협조를 하면 자신의 사건을 검찰이 적극적으로 수사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는, 즉 진술 협조의 댓가를 기대하며 암시하는 내용이다.
같은 시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제 검찰은 자신의 편이라는 자신감도 엿보인다. 감옥에 갇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을 토로했던 과거의 편지들과 사뭇 달라진 분위기였다.
● 혹시라도 이번 사건 이후에 어느 누구라도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려는 느낌만 들어도 서신하도록 해. 절대 용서하지 않고 뿐만 아니라 그 댓가가 처절함을 반드시 몸서리쳐지게 해줄 것이니까
- 한만호 비망록 989쪽 중
역시 아내에게 보낸 같은 편지 가운데는, 한명숙 총리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죄책감이 엿보이는 편지 내용도 있다.
● 이번 사건으로 내 운명이 어찌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내 인생의 마지막 남은 선택을 하게될 것 같아... 이 사건으로 희생되는 분들이, 어떤 형태로든 희생자가 생길 것이고... 출소 후에 그나마라도 희망을 기대했던 사람들 몰락시키는 것이…
- 한만호 비망록 989쪽 중
“용서받지 못할 일을 내가 저질렀나 보다”
감방에 갇힌 죄수도 신문을 구독할 수 있다. 한만호 비망록 가운데는 그가 신문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해놓은 노트가 있다. 역시 진술 번복 이전에 작성된 것이어서, 그가 어떤 심경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2010년 6월과 8월 사이, 한만호가 신문에서 필사해 적어놓은 메모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지만 앞 뒤 메모를 통해 날짜를 추정할 수 있었다. “금수회의가 따로 없습니다. 입만 열면 생고기 뜯고 난 비리칙한 냄새가 납니다. 포식을 끝낸 짐승처럼 저희들끼리 화해롭습니다. 피묻은 발톱을 핥고 고깃점이 묻어있는 털 고르는 일이 남았습니다.”
한만호는 이 메모에 대해서 별도의 설명이나 주석을 달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심정으로 이 부분을 필사해 두었는지는 추측할 수 있다. 자신과 검찰의 행태를 적확하게 묘사했다고 느껴 필사해둔 것은 아닐까.
보다 직접적으로 한만호의 심경을 보여주는 필사 메모도 있다. 2010년 10월과 11월 사이 작성된 메모다. 한만호는 이향아 시인의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라는 시를 필사해 두었는데, 시의 내용은 이렇다. “이 세상 후미진 곳에서 / 나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보다 / (중략) / 용서받지 못할 일을 내가 저질렀나 보다 / 그의 눈물 때문에 온종일 날이 궃고/ 바람은 헝크러진 산발로 우나보다 / 그래서 사시사철 내 마음이 춥고 / 바람결 소식에도 귀가 시린가 보다”
한만호는 자신의 진술 때문에 한명숙 총리가 선거에서 패배했을 뿐 아니라, 언론을 통해 여론 재판을 받게 되자, 그 괴로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위에서 인용한 이향아 시인의 시구 마지막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게 느껴진다.
● 독거방에 있을 때에도 식사 때 좋아하는 음식이나 간식을 포만하게 먹었을 때도 파렴치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선거가 끝난 뒤에 찾아온 한여름 독거방 더위에도 한밤중에 일어나 심정을 추스리느라 한여름이었음에도 귀가 시리고 손발이 저려왔다.
- 한만호 비망록 40-41쪽 중
한만호가 법정에 나와 진술 번복을 한 이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해 “허위 사실과 모순된 논리로 검찰을 공격”하기 위해 비망록을 썼다는 검찰의 방어 논리는, 그가 진술 번복 이전에도 비망록 곳곳에 검찰로부터의 대가를 기대하는 내용이나 양심의 가책을 표현하는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 근거가 취약하다.
진술 번복 그 후의 기록
한만호가 법정에 나와 진술을 번복하자, 검찰은 한만호의 부모를 찾아갔다. 검찰은 “진술 번복의 이유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한만호는 큰 압박감을 느꼈다.
● 증언 이후에 검사님이 부모님 만나고 왔다. 언제 출소할지 모르겠다 하고 오셨다. 기막히는 이야기였다. 번복하지 (용기내지) 못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추가기소나 형을 다 살아야) 때문이었는데 그 약점을 노리셨다.
- 한만호 비망록 38쪽
검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만호는 법정에 6차례나 다시 나와, 검찰에서의 진술이 허위였다고 재확인했다. 대질 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만호가 이렇게 법정에서 분투했던 때는, 그가 만기 출소하기 불과 서너달을 앞둔 시점이었다. 검찰에서의 진술을 법정에서도 유지했더라면, 그는 2011년 6월 별탈없이 만기출소했을 것이다. 그리고 검찰이 약속한 도움을 받아가며 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진술 번복을 유지했고, 결국 검찰은 그를 위증혐의로 기소하기에 이른다. 2011년 7월 한만호가 출소하고 불과 한 달 뒤의 일이다. 만기 출소 4일 전 감방 압수수색을 당해 비망록 전체를 검찰에 빼앗긴 것도, 이 위증혐의와 관련된 수사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위증은, 재판에서 고의로 거짓 증언을 했을 때 적용되는 범죄 혐의다. 한만호의 진술이 위증인지 아닌지는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 사건이 결론이 나야 밝혀지는 일이다. 그런데 검찰이 한만호를 위증혐의로 기소한 것은 한 전 총리 사건의 1심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의 일이었다.
“한명숙 총리에 대한 재판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기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한만호 씨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검사가 기소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고요. 결국은 한만호 씨의 진술을 다시 번복하도록 하려는 압박용이랄지 아니면 그 재판에 한명숙 총리에 대한 재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그런 방법으로 서둘러 위증죄로 기소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김정범 변호사 인터뷰 중
1심에서 무죄가 났던 한명숙 사건 판결이, 2심에서 정형식 부장판사에 의해 뒤집히고, 재판 거래 의혹을 받고 있던 양승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자, 검찰은 이미 기소해뒀던 한만호의 위증혐의를 기어코 다시 수사해, 2016년 5월 그를 구속시켰다. 한만호는 출소 5년만에 다시 감방에 가게됐고, 2년 뒤 만기 출소했지만,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출소 이후 스트레스와 무리한 음주가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년 만에 빛을 본 한만호의 비망록, 그것은 검찰의 겁박과 회유를 받아 거짓 진술을 했던 사람의 진실된 자기 고백이었을까, 아니면 법정에서 위증을 한 위증범의 자기 정당화였을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 한만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뉴스타파는 그의 진실을 밝혀줄 다른 증인을 찾아 나섰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한명숙 사건’의 쟁점은?
한명숙 뇌물 사건은 1차 사건과 2차 사건으로 나뉜다. 검찰이 2009년 12월에 기소한 1차 사건은 대한통운 전 사장이었던 곽영욱이 인사 청탁 등의 대가로 한명숙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줬다는 혐의다. 이른바 ‘의자가 뇌물을 받았다’는 것으로 회자되었던 이 1차 사건에 대해서는 1심과 2심, 대법원 상고심에서까지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뉴스타파가 이번에 <죄수와 검사Ⅱ>를 통해 다루고 있는 사건은 2차 사건이다. 한신건영 대표 한만호가 한명숙 전 총리에게 9억 원 상당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혐의다.
한만호는 법정에 나와 진술을 번복하면서, 9억 원 가운데 6억 원은 H교회 건물 공사 수주를 위한 로비 자금과 성과급 명목으로 한 전 총리 측과 무관한 다른 사람들에게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한만호가 돈을 줬다고 지목한 사람들이 법정에 나와 한만호와의 대질 신문까지 이루어졌으나 양측 주장이 엇갈렸다.
따라서 당시 재판에서는 나머지 3억 원이 주된 쟁점이 됐다. 한만호가 3억 원을 한명숙 전 총리의 비서 김 모 씨에게 빌려준 건 확인된 사실이다. 다만 이 돈의 성격이 사적인 대여금인지, 아니면 정치자금인지, 그리고 한 전 총리가 여기에 개입했는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3억 원 가운데 2억 원은 검찰 기소 전에 이미 한 전 총리의 비서 김 씨가 한만호에게 갚았다. 그런데 수표로 지급된 나머지 1억 원은 한명숙 전 총리 동생의 전세 자금으로 사용됐음이 드러났다. (이 1억 원 역시 검찰 기소 전에 상환됐다.) 검찰은 비서 김 씨가 3억 원을 받았다가 돌려주는 과정에 한명숙 전 총리가 개입했다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한 전 총리와 무관한 한만호 - 김 모 비서 - 한 전 총리 동생 3자 사이의 사적인 금전 대차 거래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심 법원은 23차례 공판 및 현장 검증 끝에 2011년 10월 무죄를 선고했다. 한만호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전달한 일시와 방법, 한만호가 한 전 총리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있었는지 여부, 한만호의 장부에 적혀 있는 ‘한’이라는 글자가 한 전 총리를 의미하는지 여부 등이 세부적인 쟁점이었다. 2013년 9월 2심 법원의 정형식 판사는 단 4차례 공판 끝에 1심 판결을 뒤집어 유죄를 선고하면서 9억 원의 정치자금법 위반을 모두 인정했다. 재판 거래 의혹을 받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은 2015년 8월 상고를 기각하고 최종적으로 유죄를 확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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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검사Ⅱ(한명숙) ②
사라진 증인, 빼앗긴 비망록
2011년 6월 13일 밤 11시쯤,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 앞에 한 기자가 나타났다. 한 시간 뒤 자정이 넘어가면 이른바 ‘한명숙 뇌물 사건’의 핵심 증인인 한만호 씨가 구치소에서 나올 예정이었다. 한만호는 요즘 말로 ‘핫한’ 인물이었다. 한 씨 출소를 기다린 기자는 오마이뉴스 소속 구영식 기자. 그는 한만호를 인터뷰하기 위해 한밤중에 이곳에 나왔다.
‘증인 한만호’는 누구인가
경기도 고양시에서 한신건영이라는 건설사를 운영하던 한만호는 2008년 부도 이후 사기죄 등으로 구속 수감됐다. 통영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한만호는 2010년 3월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그리고 곧바로 검찰에 불려간다. 검찰 출정은 여러 번 이어진다. 한만호는 검찰에서 엄청난 사건을 진술하고 만다. 2007년 당시 고양시 일산 갑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한명숙 전 총리에게 9억 원을 정치자금으로 줬다는 내용이다.
‘한명숙 뇌물 사건’ 관련 검찰 수사 과정은 2010년 4월 언론에 생중계되다시피 보도된다. 당시는 6월 2일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한명숙 전 총리는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상황이었다. 결국 선거에서 한 전 총리는 불과 0.6% 포인트 차이로 여당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한다. 검찰은 광범위한 수사 끝에 선거 직후인 7월 한명숙 전 총리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한다.
‘한명숙 사건’의 반전은 2차 공판기일에서 벌어졌다. 검찰에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한만호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당연히 검찰 측 핵심증인으로 나왔다. 이 자리에서 한만호는 검찰 조사를 받을 때 했던 진술을 완전히 뒤집는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준 사실 없다’는 증언이었다. 검찰 조사 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 재판은 검찰과 변호인단의 치열한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구영식 기자가 서울구치소 앞에 간 2011년 6월 13일은 한명숙 사건 공판이 한참 진행될 때였다. 그날은 검찰 핵심 증인이었으나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한만호가 2008년 사기죄로 받은 징역 3년 형을 마치고 출소하는 날이었다.
기자들은 오지 않았다
구영식 기자는 많은 기자들이 서울구치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장에 온 기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구 기자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명숙 사건에서 검찰 진술을 법정에서 뒤집은 핵심 증인을 만날 수 있는 첫 기회인데 왜 아무도 오지 않았을까. 구 기자는 당시 진보 언론들도 이미 한명숙 전 총리가 유죄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자정이 넘어 한만호가 구치소에서 나왔다. 구 기자는 2분 38초 동안 그를 인터뷰했다. 구 기자는 취재 수첩에 이런 내용을 빼곡하게 적어놓았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구치소 관계자가 옆에서 듣고 메모를 했다. 그리고 상부에 보고했다. 법무부와 검찰이 한만호를 매우 민감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만호는 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며, 한명숙 전 총리는 곧 누명을 벗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수사는 “잘못된 사람의 말을 믿고 잘못 작성된 자료를 근거로,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당시 서울 시장 당선을 돕고,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 세력을 척살하기 위해 저질러진, 잘못된 수사”라고도 말했다. 구 기자는 짧은 기사를 송고했다.
한만호의 인터뷰 중 구 기자가 쓰지 못한 대목도 있었다. 검찰이 한만호를 불러 여러 차례 ‘교육’을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한명숙 측 변호인 대역을 맡아 질문하고 한 씨에게 대답을 준비하게 하는 식이었다는 말이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날짜를 특정하는 방법, 상대 변호인의 질문을 피하는 방법까지 검찰이 교육했다고 한만호는 구 기자에게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한만호의 변호인이 구 기자에게 이 부분은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진술을 뒤집은 뒤 한만호는 검찰에 찍힐 대로 찍힌 상황이었고, 위증 혐의로 검찰 수사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검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구 기자는 이해했다.
검찰이 압수한 ‘한만호 비망록’
구 기자가 자정까지 한만호를 기다린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만호의 출소 나흘 전인 6월 9일 검찰은 한만호의 감방을 압수수색했다. 위증 혐의를 수사한다는 명목이었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한만호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작성한 모든 기록을 가져갔다. 일기, 편지, 메모, 참회록, 비망록… 한만호가 15개월 동안 쓴 두 박스 분량의 기록이 검찰 손에 넘어갔다.
구 기자는 한만호가 출소 이후 비망록을 다시 쓰지 않을까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만호는 비망록을 다시 쓰지 못했다. 검찰은 2011년 7월 한만호를 위증 혐의로 기소했다. 2015년 한명숙 전 총리는 유죄가 확정되고 구치소에 수감된다. 2016년 한만호도 위증죄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다시 수감됐다. 2018년 2년 형기를 채우고 한만호는 출소했다. 구 기자는 한 씨가 출소 이후 심리적 스트레스로 술을 많이 마시고 건강이 나빠졌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한만호 씨를 만나보고 싶었다. 검찰에 압수당했던 비망록을 되찾아서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한만호의 위증죄 재판에서 한 씨 변호인을 맡았던 변호사를 찾아 연락했다. 변호인은 최강욱 변호사였다. 최 변호사는 21대 총선에서 열린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최강욱 변호사는 한만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는 민변을 중심으로 변호인단이 구성돼 한명숙 전 총리 재판에 대응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 변호사는 한명숙 변호인단의 부탁으로 수감돼 있었던 한만호에게 접견 신청을 했다.
한만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사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초조해하다, 검찰의 회유로 거짓 진술을 했다고 최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최 변호사는 그렇게 한만호의 변호인이 됐다.
최 변호사도 한만호가 2018년 출소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한만호가 2018년 몇 번 찾아온 적이 있는데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청와대 공직을 맡은 이후로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사망 소식을 건너 들었다고 말했다. 가지고 있었던 가족들의 전화번호로 연락했지만 아무도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세상에 없는 ‘핵심 증인’
한만호가 운영하던 한신건영은 2008년 폐업됐다. 한신건영의 등기부등본 주소 등을 토대로 한만호가 살던 곳들을 찾아가 봤다. 가족들이 지금도 살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웃이었던 사람은 두 아들과 함께 살던 한만호를 기억했다. 재판을 받으러 다니는 등 어려운 처지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마지막에 집세 등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아서 안 좋게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어엿한 건설업체 사장이었던 한만호는 두 번의 수감 생활을 거치면서 각박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만호의 유족을 수소문했다. 한만호의 아버님이 종친회에서 임원을 했다는 풍문을 듣고 한 씨 종친회에 연락했다. 연결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가까이 지냈다는 지인들도 만나봤지만 허사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을 만나다 비교적 가까운 친지와 연락이 됐다. 기자에게 한만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지만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한만호는 2018년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옥살이를 2번 하는 동안 부친과 모친 모두 세상을 떠났다.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 중견 건설업체를 운영하던 아들이 옥살이를 하게 되고, 세간에서는 뇌물을 준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뒤 부모는 화병에 걸렸다고 한다.
부인과는 이혼했다. 한만호는 사망한 뒤 화장을 해 선산에 있는 부친 묘소 옆에 뿌려졌다고 한다. 아무도 묘를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따로 묘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게 취재진과 만난 친지의 말이다.
한만호에게는 어린 아들이 둘 있었다. 지금은 성인이 됐다. 아들에게 연락을 해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소문해 집으로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무도 한만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혹시 한만호가 남겼을 수도 있는 유품을 확인하려는 기대는 접어야 했다. 비망록은커녕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었다.
비망록은 어디에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은 1977년부터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했다. 2011년 한명숙 전 총리 재판 당시에는 노무현 재단에서 상임 운영위원을 맡고 있었다. 재단에서 한명숙 전 총리 재판 내용을 회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취재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재단 직원 중엔 기자 출신이 강기석 운영위원밖에 없었다.
강 기자는 그렇게 빠짐 없이 한명숙 재판을 방청하고 기록하는 일을 맡게 됐다. 2015년 대법원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유죄를 확정한 뒤, 강 기자는 취재 내용을 묶어 <무죄>라는 책을 펴냈다. 일종의 재판 기록이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이 책에서 한만호 비망록이 언급된 대목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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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한 사장의 만기 출소 직전에 그를 소환해 위증 혐의로 수사하고 감방을 압수수색해 일기, 비망록 등을 빼앗아 간 것은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비롯된 최후의 몸부림 비슷한 것이다... 검찰의 그런 두려움은 이날 변호인단이 “압수한 한 사장의 비망록 등을 증거로 제출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변호인단과 (그 내용을) 공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먼저 다 분석해 보고 필요한 부분만 증거 제출하고 변호인단과 공유하겠다”고 답한 검찰의 억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마디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 별 문제가 없는 부분만 골라서 내 놓겠다는 것이다… 이날 재판장은 검찰이 압수한 모든 문건을 변호인단과 공유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 <무죄> 116~117쪽
설사 한만호가 자기 비망록 원본을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당시 재판부 결정에 따라 법원에는 관련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뉴스타파 취재진은 비록 한만호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가 감방에서 쓴 비망록을 구할 수 있었다. 비망록 표지에는 ‘수인번호 3382 한만호’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노트는 재소자들이 사용하는 교정 노트. 분량은 1,200여 페이지.
이 안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뉴스타파는 한명숙 사건의 핵심 증인 한만호의 비망록 내용을 3편에서 최초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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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검사Ⅱ ①
뉴스타파, '한명숙 사건'을 취재하다
2017년 8월 23일 의정부교도소 앞. 한명숙 전 총리가 징역 2년을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다소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비교적 밝은 표정이었다. 교도소를 나온 뒤 한 전 총리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9년에 걸친 이른바 ‘한명숙 뇌물 사건’이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한명숙 사건’의 시작과 끝
‘한명숙 뇌물 사건’은 2009년 검찰 수사로 시작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다. 노 전 대통령 장례위원장이었던 한명숙 전 총리는 야권의 잠재적인 대권 후보였고,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2009년 말 검찰이 한명숙 전 총리를 첫번째로 기소한 내용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5만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곽 전 사장의 진술이 오락가락하면서 한 전 총리의 무죄가 유력했던 상황. 검찰은 ‘곽영욱 사건’ 1심 선고를 하루 앞둔 2010년 4월 8일, 한 전 총리의 또 다른 혐의를 언론을 통해 공개한다. 이번에는 한신건영이라는 소형 건설사의 사장 한만호가 한 전 총리에게 수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는 내용이었다.
‘한만호 사건’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검찰이 기소한 뒤 진행된 두 번째 공판에서, 한만호는 기존에 검찰에서 한 진술을 완전히 뒤집는다. 검찰이 횡령 등 자신의 추가 범죄를 수사할 것이 두려워, 검찰이 원하는 진술을 해줬다는 주장이었다.
치열한 법적 공방 끝에 2011년 10월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김우진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한다. 하지만 2013년 9월 2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 형사6부, 정형식 부장판사)는 1심을 뒤집고 징역 2년과 추징금 8억여 원을 선고했다. 2015년 8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심대로 유죄를 확정했다. 한 전 총리는 의원직을 상실했고, 수감됐다.
한명숙은 사법농단 ⠂ 검언유착의 피해자인가
‘한명숙 사건’은 이렇게 법적으로 종결됐지만, 대중의 뇌리에서는 사라지지 않고 종종 소환된다. 2018년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 때가 대표적이다.
2018년 7월 31일 ‘대법원 사법행정권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196건의 문건에는 ‘한명숙 사건’이 포함돼 있다.
2015년 5월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한명숙 의원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해 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했으며, 대법원이 이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할 경우 김무성 대표에게 상고법원안 처리를 설득하는 게 어려워진다는 내용이다.
2018년 문건이 공개 된 뒤, 더불어민주당은 “한명숙 전 총리는 억울하게 희생됐다”며 “의혹을 밝혀야한다”고 논평을 냈다.
최근에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한명숙’을 다시 소환했다. 채널A 기자가 구속 수감된 죄수를 상대로 유시민 이사장 관련 비위 사실을 말하라며 협박한 행태가 폭로되면서다. 채널A 기자와 모 검사장의 유착 의혹은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이다.
유 이사장은 MBC 라디오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죄수가) 저한테 의자에 돈 놓고 나왔다고 말하던가, 어디 도로에서 차 세우고 트렁크에 돈 실어줬다, 이렇게 말했으면, 저는 한명숙 전 총리처럼 딱 엮여 들어간다.”
의자에 돈을 놓고 나왔다는 건 ‘곽영욱 사건’을, 도로에서 차 세우고 돈 실어줬다는 건 ‘한만호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죄수와 검사> 그리고 한명숙
뉴스타파는 지난해 검찰개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죄수와 검사>를 연속 보도했다. 서울남부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던 죄수(일명 제보자X)가 검찰 수사에 참여하면서 목격한 검찰 치부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뉴스타파는 검찰이 죄수를 수사에 활용하기 위해, 죄수에게 불법적인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고, 가석방 등을 약속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검찰이 특정한 수사를 덮기도 하고, 사건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여러 정황과 증거들도 드러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검찰 스스로 ‘특수수사 기법’이라고 그럴 듯하게 이름 붙이기도 한다.
<죄수와 검사> 프로젝트 취재원 중에 ‘한명숙’이라는 이름을 꺼낸 사람이 몇몇 있었다. <죄수와 검사> 내용에 검찰이 ‘한명숙 뇌물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과 흡사한 대목이 있다는 말이었다.
1차 뇌물사건의 당사자인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은 비자금으로 먼저 구속돼 죄수가 된 뒤, 검찰에 한명숙 전 총리의 이름을 불었다.
2차 뇌물사건 당사자인 한만호 전 한신건영 사장도 같은 순서로, 즉 사기 혐의로 죄수가 된 뒤 한 전 총리 관련 내용을 검찰에 진술했다.
두 사건 모두 한 전 총리의 혐의를 주장하는 근거가 ‘죄수’의 입이었다는 말이다.
또 한 전 총리 재판 과정에서는 복수의 또 다른 죄수들이 법정 증인으로 나서, 검찰의 기소 내용을 정확하게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한명숙 사건을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죄수와 검사>를 보면서, 조건 반사적으로 ‘한명숙’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수 있다.
다시, 한명숙 사건을 깊게 들여다보다
사법 판단이 끝난 사건을 다시 취재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한명숙 사건’은 수많은 검사와 변호사들이 정면 승부를 벌인 세기의 재판이었다. 하지만 빈 공간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다.
뉴스타파는 한명숙 사건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비어있는 공백,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부분을 다시 들춰봤다.
방대한 재판 기록에는 사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 인물들의 행적을 쫓아가봤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충격적인 증언도 있었다.
뉴스타파는 언론기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새로운 이야기와 증언을 취재하고 검증했다. <죄수와 검사Ⅱ>는 뉴스타파가 한명숙 사건과 관련해 새롭게 밝혀낸 사실과 증언, 그리고 그것을 검증한 긴 과정을 다룬다.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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