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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道雨 2021. 2. 22. 15:50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 남인(南人)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 여유당(與猶堂) :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여유당(與猶堂)은 다산(茶山)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대표적인 호.

그가 생전에 저술한 500여 권의 서적을 모두 모아 간행한 전서(全書)의 제목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그의 고향 마을 생가에 오늘날에도 걸려 있는 당호(堂號) 역시 여유당(與猶堂)이다.

여유당이란 호는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남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정약용은 친가와 외가 모두 남인의 명문가였다. 그의 친가 직계 조상들은 8대가 연이어 문신의 꽃이라 하는 옥당(玉堂, 홍문관)에 오를 정도로 대학자를 다수 배출했고, 외가는 호남의 명문가인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등이 있음) 집안임.

 

숙종 시절 서인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남인은, 권력의 핵심부에서 배제되었기에,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며, 비판적인 현실 인식과 사회 개혁론을 많이 주장했다. 노론의 보수적 성리학자들과 다르게, 서양의 과학 기술이나 신문물, 특히 천주교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인 입장을 보였다.

 

성호 이익은 조선 최고의 백과사전인 성호사설(星湖俟說)을 엮는 등, 백과전서적인 학풍을 남겼다.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은 모두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먹고 자랐다고 할 정도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청나라 연경(燕京, 베이징[北京])에 가서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이승훈(정약용의 매형)이 정약용에게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이승훈의 외삼촌)을 소개해주어, 정약용은 처음으로 이익의 학문 세계와 만나게 됨.

나의 큰 꿈은 성호(星湖)를 따라 사숙(私淑,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배움)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정약용의 말)

 

실학의 정신과 방법으로 경세치용과 사회 개혁을 이루겠다는 큰 꿈을 갖게 한 인물이 성호 이익이었다면, 그와 같은 꿈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정약용을 가르치고 지원해준 사람은 정조대왕이었다.

정조는 정약용을 개혁 인재 양성 코스인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함.

정조는 37세 이하 당하관(堂下官) 가운데 참신하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해 초계문신으로 부르도록 하고, 규장각에서 학문 연마 및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규장각이 길러낸 이들 개혁 인재들은 정조의 개혁 정치에 크게 기여했으며, 정약용은 정조가 가장 총애한 최우등 개혁 인재였다.

 

1800년 정조가 49세의 이른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자, 선왕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노론 세력이 권력을 쥐면서, 정조의 개혁 정치를 무너뜨리고, 개혁 정치를 뒷받침한 남인 세력과 젊은 개혁 관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노론이 움켜쥔 탄압의 무기는 천주교였다.

 

정조 생전에도 천주교 문제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은 정약용은, 이때 벼슬에 대한 모든 뜻을 접고, 생가가 있는 초천(지금의 남양주시 마현마을)으로 낙향해 오직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그 당시 정약용은 자신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는 숙청의 피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스스로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내거는 한편, 여유당기(與猶堂記)를 지었다.

 

··· 나는 노자(老子)의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與兮若冬涉川].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猶兮若畏四隣].”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물이 뼈를 에는 듯 차갑기 때문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건너지 않는 법이다. 또한 사방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남의 시선이 자신에게 미칠까봐 염려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나서지 않는 법이다. ···

                                                                   - 다산시문집』 「여유당기

 

노론이 모든 군력을 장악한 조선에서 남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토록 가혹한 일이었다.

 

 

# 다산(茶山) : 유배지 만덕산(萬德山)의 ‘차(茶) 나무’와 ‘팔경(八景)’

 

노론은 정조가 사망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8012, 천주교 신앙을 빌미삼아, 정조 때 남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혁 세력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데[신유사옥(辛酉邪獄)], 노론의 칼날은 특히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신유사옥 때의 정치적 탄압으로, 채제공 사망 이후 남인의 영수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이가환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지식인이 처형당했다. 그 당시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처형당한 사람만 무려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고,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지금의 전남 완도군 신지도), 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정약용 자신은 장기현(지금의 포항시 장기면)으로 유배형을 당했다.

그해 10월에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연경(베이징)의 프랑스 신부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처음 정약용은 마땅한 거처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나마 거처라고 정한 곳이 동문 밖 주막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스스로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 사의(四宜)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 일을 말하는데, ‘’담백한 생각, 장엄한 용모, 과묵한 언어, 신중한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을 거처로 삼은 시기는 유배 생활을 한 지 7년이 지난 1808년 이후였다.

 

정약용이 유배당한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소재한 만덕산(萬德山)의 또 다른 이름이 다산(茶山)이다. 이는 이곳에 수많은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차 마니아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자신에게 아낌없이 차를 제공해주는 만덕산을 애호하게 되었고, 이에 그 산의 별칭인 茶山을 기꺼이 自號로 삼았다.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 오기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한다. 그러나 정약용이 강진 다산[만덕산]에서 직접 차를 제조하고 주변 인물과 사찰로 차를 전파하기 전까지, 조선에는 이렇다 할 차 문화가 없었다.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당한 지 4년 째 되는 1805, 우연히 만덕산에 자리하고 있는 백련사라는 절에 놀러 갔다가, 주변에 야생차가 무수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 정약용은 백련사의 승려인 아암(兒庵) 혜장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유배 생활 도중 얻은 위장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용(藥用)으로 차를 마셨기 때문에, 차가 떨어지면 차 제조법을 가르쳐준 혜장에게 걸명시(乞茗詩)’ 혹은 익살스럽게 상소문의 형식을 띤 걸명소(乞茗疏)’를 보내 차를 보내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혜장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청한 이 시는 최초의 걸명시(乞茗詩)로도 유명하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7년째 되는 1808, 47세의 정약용은 귤동 마을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외가로 먼 친척뻘 되는 윤단(尹慱)이라는 사람의 산정(山亭)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茶山草堂)이 된다.

 

만덕산(다산) 아래 자리한 다산초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유배지 문화’, 그중에서도 특히 사라져 버린 차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고 전파한 차 마니아정약용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꽃핀 차 문화는 이후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며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정약용이 사랑했던 다산(만덕산)의 또 다른 절품(絶品)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 ‘8(八景)’이다. 다산시문집다산팔경노래가 실려 있다.

 

1. 불장소도(拂墻小桃) : 담을 스치고 있는 작은 복숭아나무

2. 박렴비서(撲簾飛絮) : []에 부딪치는 버들가지

3. 난일문치(暖日聞雉) : 따뜻한 날 들려오는 꿩 울음소리

4. 세우사어(細雨飼魚) : 가랑비 내리는 날 물고기 먹이주기

5. 풍전금석(楓纏錦石) : 비단 바위에 얽혀있는 단풍나무

6. 국조방지(菊照芳池) : 연못에 비친 국화

7. 일오죽취(一塢竹翠) : 언덕 위 푸르른 대나무

8. 만학송도(萬壑松濤) : 깊은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

 

 

# 사암(俟菴) : 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며···

 

정약용은 생전에 10개가 넘는 호를 썼다고 한다. 여유당, 다산과 함께 삼미자(三眉子), 열수(洌水), 철마산초(鐵馬山樵), 탁옹(籜翁),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苔叟), 문암일인(門巖逸人), 사암(俟菴) 등이다.

 

이 가운데 정약용이 처음 사용한 호는 삼미자(三眉子)’였다.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고 난 후 남은 마마 자국 때문에 눈썹이 세 마디로 나뉘었는데, 이를 두고 三眉子라고 自號하였다.

열수(洌水)는 한강(漢江)의 다른 이름이고, 자신을 철마산의 나무꾼이라고 한 철마산초(鐵馬山樵)의 철마산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자신을 대나무 껍질[]’에 빗대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한 탁옹(籜翁)에서는 역적과 폐족의 신세로 전락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정약용의 비애를 읽을 수 있다.

 

정약용이 직접 쓴 자찬 묘지명(自讚墓誌銘)에서는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으로 소개하였다.

정약용이 평생 남긴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는 대부분 18년 강진 유배 생활 도중 탄생했다.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소개한 사암(俟菴), 바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큰 꿈을 이루어줄 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 정약용이 집필한 수많은 저서들은, 그가 정조대왕과 함께 이룩하고자 했던 경세치용과 사회 개혁안의 완성이자, 미래 조선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었다.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가 정치·경제·행정·법제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조선 사회를 위한 청사진.

자신이 못다 한 경세치용과 사회 개혁의 큰 꿈을 이루어줄 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렸던 정약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