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 조선의 관포지교, 오성과 한음
# 백사(白沙) : 이름 없는 강 나루터 노인의 호(號)를 탐하다
조선의 관포지교라 할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
이항복과 이덕형이 처음 만난 시기는 1578년(선조 11)으로, 이항복의 나이 23세, 이덕형의 나이 18세 때였다고 한다.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인 안동 권씨와 이미 혼인했고, 이덕형 역시 17세에 이산해의 딸인 한산 이씨와 혼인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성년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 역시 감시(監試)를 치르는 과거 시험장이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런데 정승(政丞)의 반열에 먼저 오른 사람은 이항복이 아니라, 다섯 살 어렸던 이덕형이었다.
이 두 사람이 조정에 나아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던 시대에 조선은 당쟁(黨爭)과 전란(戰亂)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서로 신의를 잃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란에 처해서는 서로 협력하여, 이항복은 병권을 쥔 병조판서로, 이덕형은 외교 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쳐 나라와 백성을 구했다.
전란 이후 광해군 때에는 끝까지 정치적 뜻을 함께하다가, 두 사람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이로 인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별호가 크게 명성을 얻었다.
‘오성’은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항복을 호성일등공신으로 봉하면서 내린 작호(爵號)이자 군호(君號)였던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서 비롯되었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이항복을 ‘오성 대감’으로 불렀다.
반면에 ‘한음’은 이덕형의 실제 호였다.
이항복의 호는 ‘백사(白沙)’였는데, ‘흰 모래’ 혹은 ‘하얀 모래사장’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청준의 수필 ‘작호기(作號記)’에 이항복의 호 ‘백사(白沙)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옛날 이항복이 강 나루터 노인의 호가 욕심나서, 노인이 세상 뜨기를 기다렸다가, 연후에 그 ‘백사(白沙)’를 자기 호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었다.
북악산 기슭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백사실(白沙室) 계곡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신병주 교수).
“이항복의 호 중 대표적인 것이 필운(弼雲)과 백사(白沙)인데, 필운은 필운대(弼雲臺)와 관련이 깊으며, 백사는 백사실에서 유래한다. ··· 백사실은 필운대에서 조금 떨어진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비경이었다.”
이항복은 이름 없는 강 나루터 노인의 호였던 ‘백사’가 욕심이 났지만, 차마 살아있는 사람의 호를 자신의 것으로 취해 사용할 수는 없었던 까닭에,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백사’를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白’은 ‘맑고, 깨끗하고, 단정하고, 담백한‘ 뜻을 간직한 글자다. 자신의 삶과 마음이 온통 ’흰 白‘으로 뒤덮인 모래사장 같기를 소망했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모두 다섯 차례나 병권을 쥔 병조판서로, 전대미문의 대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일둥공신으로서 오성부원군이라는 군호까지 얻었고,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의 자리라고 불리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62세의 나이에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서인(廢庶人)’을 비롯한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이이첨 등 간신배들의 횡포에 대해 직언을 올렸다가 머나먼 북녘땅 북청(北靑)으로 유배형을 당했다. 그리고 유배지에 도착한 지 불과 3개월째 되는 1618년 5월 13일, 63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만다.
# 필운(弼雲) : ‘경복궁을 보필하다’라는 산(山, 인왕산)의 뜻을 취하다.
이항복은 말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백사(白沙)’라는 호를 얻어 사용할 수 있었다. 이항복 생전에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그의 호는, 그가 어려서부터 살았던 인왕산 필운대(弼雲臺)에서 취한 ‘필운(弼雲)’이었다.
인왕산은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의 소재지이자, 서울의 주산인 북악을 보좌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중 우백호에 해당한다. 인왕산은 또한 필운산(弼雲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경복궁을 보필하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는 필운산처럼, 임금을 보좌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뜻을 ‘필운’이라는 호에 새겼던 것이다.
어린 이항복의 남다른 기상과 자질을 눈여겨본 이가, 권율의 아버지이자 선조 즉위초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었다. 장차 나라를 이끌 인재가 돌 인물임을 알아챈 권철은 아들 권율에게 아직은 서생(書生)에 불과했던 이항복을 사위로 삼으라고 권했고, 권율 역시 이항복이 마음에 들어 흔쾌히 자신의 딸을 이항복과 맺어주었다.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 이항복이 어렸을 적에 필운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 석벽에 새긴 ‘필운대(弼雲臺)’ 세 글자는 곧 백사 이항복의 글씨이다.
이항복의 9세손으로 고종 시절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필운대’라는 명칭 또한 이항복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면서, 이 바위가 이항복의 유적 중 하나라고 밝혔다.
필운대는 또한 조선 시대 한양의 최고 명승지 가운데 하나였다.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는 물론이고,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필운대의 꽃구경’에 관한 시편을 남겼다. 특히 정조는 국도(國都) 한양의 승경(勝景) 여덟 가지를 시로 노래하면서, 그중 ‘필운대의 꽃과 버드나무[弼雲花柳]’를 첫 번째로 꼽았다.
# 한음(漢陰) : 한강 북쪽은 한양(漢陽), 한강 남쪽은 한음(漢陰)
서울의 조선 때 지명인 한양(漢陽)은 한강의 북쪽 햇볕 드는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강 이남을 가리키는 말인 한음(漢陰)이 바로 ‘오성과 한음’의 한 주인공인 이덕형의 호이다.
이덕형은 광주(廣州) 이씨로 본관이 경기도 광주이다. 이덕형이 죽어 묻힌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이 두 곳은 모두 한강 이남에 자리하고 있다.
이덕형은 자신의 호처럼 ‘한음(漢陰)’에 뿌리를 두고 세상에 나왔으며, 또한 자신의 육신과 혼백을 ‘한음(漢陰)’에 묻고 세상을 떠났다.
이덕형의 조상은 원래 고려 말엽 광주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던 아전(衙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덕형의 8대조가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에 와서 문신이자 문사의 집안으로 크게 이름을 얻었다. 오늘날 서울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이 바로 이집의 호인 둔촌(遁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공민왕 때 신돈이 바른 말을 간하는 그를 핍박하자, 이집이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은둔했던 곳이 바로 지금의 둔촌동이 된 것이다.
이집의 증손이자 이덕형의 5대조가 되는 이극균(李克均)은 벼슬이 좌의정에 까지 올랐지만, 연산군의 폭정과 패륜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미움을 사, 끝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이덕형은 이러한 집안의 가풍을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이 평생 품고 살아야 할 큰 도리라고 여겨, 조상의 혼백이 서린 ‘한음’을 자신의 호로 삼았던 것이다.
이덕형은 벼슬에 나선 이후 온갖 화려한 경력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이미 1591년(선조 24) 31세 때 나라 안의 선비들을 통솔하고 학자들을 대표하는 문형(文衡, 예문관 대제학)에 올라, ‘최연소 문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을 호종하고 북쪽으로 피난 가던 도중에는, 뒤따라온 왜군에게 붙잡힐 급박한 상황에 봉착하자, 스스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나아가 대동강 한가운데서 적군과 담판을 지어 위기를 모면했다.
또한 직접 명나라에 들어가 원군(援軍)을 데려와 불리한 전쟁의 형세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이와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1598년(선조 31) 불과 38세의 나이에 정승(우의정)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나이에 좌의정을 거쳐 1602년(선조 35) 42세 때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최연소의 나이로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30여 년 관직 생활 동안 최고 관직인 영의정을 세 번, 나라 안의 선비와 학자들을 대표하는 문형을 세 번이나 지냈다.
1608년 나이 48세 때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이덕형은 불운한 정치가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 등 일부 간신배 무리가 권력을 전횡하고 농단하다 못해, 인목대비를 폐서인 하려고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이로 말미암아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았고, 북한강 가 용진(龍津)나루의 사제촌(莎堤村,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으로 낙향해버렸다.
북한강은 예전에 용진강(龍津江)이라고도 불렀는데, 용진나루라는 지명 역시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제촌은 이덕형이 말년에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부친을 모셔와 봉양하면서 관직에 나가지 않을 때 거처했던 곳이다.
이덕형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9월 강원도 안협(安峽)에 피난 중이다가 왜적이 접근하자 몸을 더럽힐까 두려워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절한 부인 이씨와 1594년 5월 김포 통진에서 돌아가신 모친 유씨의 묘를 양근군 중은동(지금의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으로 옮긴 후, 묘소가 잘 보이는 강 건너편 사제촌을 은거지로 삼았다. 이 해가 1603년으로 이덕형의 나이 43세 때였다. 이때부터 죽음을 맞은 1613년까지 10여 년 동안 이덕형은 한양에 있지 않으면 이곳 북한강 가에 머물렀다.
그 당시 사제촌에 은둔한 이덕형의 심정을 구구절절 묘사한 시가(詩歌) 한 편이 전해오는데,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의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지는 노계(蘆溪) 박인로의 작품이다. 박인로는 이덕형이 사제촌에 머문 10여 년 동안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벗이었다.
이덕형은 두물머리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운길산의 수종사를 아꼈다.
이덕형이 사제촌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참소는 그치지 않았고, 결국 1613년 9월 이덕형은 삭탈관직(削奪官職)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이로부터 불과 한 달 만인 10월 9일, 나이 53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덕형의 자손들은 자신이 죽으면 부인 이씨와 합장하라는 유언을 받들어 그를 사제촌의 강 건너편 북한강의 남쪽 동네인 양근군 중은동(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등성이에 묻었다. 자신의 호처럼 ‘한음(漢陰)’에 묻힌 것이다.
이덕형이 죽자, 이덕형보다 먼저 파직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항복은, 일생의 벗의 죽음을 애도하며 직접 그를 염하고, 애도의 글을 지었다. 이덕형의 묘지(墓誌)도 이항복이 썼다.
이덕형이 죽고 난 후 150여 년이 흐른 18세기 중반, 북한강(용진강)과 운길산 그리고 수종사를 놀이터 삼아 이웃하고 자란 또 한 명의 걸출한 선비가 나왔다. 그는 바로 1762년 두물머리 부근 마재 마을에서 태어난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이덕형의 7대 후손이면서 실학자였던 복암(伏菴) 이기양과 막역하게 지냈다고 한다. 정약용은 이덕형을 우러러 찬미하는 시까지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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