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 유형원과 잠곡 김육
- 개혁을 설계한 땅, 부안 우반동과 가평 잠곡
# 반계(磻溪) : 우반동에서 조선 최고의 개혁서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하다
전북 부안 변산(邊山)에 위치한 우반동(愚磻洞)은, 허균이 일찍이 마음을 빼앗겨 정착하려 했을 만큼, 아름다운 산수와 풍요로운 물산을 자랑하는 곳이다.
허균은 1608년(선조 41, 나이 40세) 가을에 관직에서 해임되자, 정사암(靜思庵)이 있던 곳에 집터를 잡아 중수하고, 생계를 연명할 약간의 전장(田莊)까지 갖추었다. ‘정사암중수기(靜思庵重修記)’에 기록.
조정 관료와 사대부들은 허균의 기이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고, 1609년 1월, 허균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해 우반동에서 한양으로 불러 올린 다음, 명나라로 보내버렸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형조참의에 올랐다가 다시 유배형에 처해지고, 또 다시 관직에 복직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허균은 틈만 나면 우반동을 찾았다.
그러다 1618년 역모를 꾸몄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다.
허균이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지난 1653년, 또 한 명의 풍운아(유형원)가 우반동을 거처로 삼으며, 이곳은 ‘혁명과 개혁의 땅’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실학의 대부인 성호 이익이, 조선이 개국한 이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시무(時務)를 알았던 사람은 오직 율곡 이이와 유형원 뿐이라고 했고, 북학파의 비조(鼻祖, 시조)인 담헌 홍대용이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책 가운데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은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유형원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隧錄)』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조선 최고의 개혁서로 평가받고 있는 『반계수록』이었다.
유형원은 1622년(광해군 14)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유형원이 태어나 지 불과 1년 만에 그의 아버지 유흠(劉歆)은 이른바 ‘유몽인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자결하고 만다.
그 후 유형원은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이원진은 훗날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남인 실학파의 산실 역할을 한 이익의 당숙이었다. 또한 김세렴은 중국 사정에 밝고, 사신으로 일본에도 내왕한 적이 있는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유형원은 이 두 사람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유학의 경전과 제자백가서는 물론, 역사, 지리, 병법, 법률 등 다방면에 걸쳐 학문을 배우고 익히면서, 높은 안목과 깊은 식견을 쌓을 수 있었다.
정치·경제·교육·국방·행정 등 모든 방면에서 조선의 현실을 분석하고 개혁 대책을 담은, 방대한 규모의 『반계수록』을 저술할 수 있었던 학문적 기틀은 이때 이미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유형원은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14세 때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원주 → 양평 → 여주 등지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양대 전란 이후에 불어 닥친 사회 변화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다.
유형원은 평생 진사(進士) 이상의 지위를 누리지 않았다. 진사라는 타이틀조차도 자신의 입신양명을 바라는 할아버지의 유명(遺命)을 저버리지 못해, 과거에 마지못해 응시해 얻었을 뿐이다. 이 때문인지 33세나 되는 늦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를 치렀고, 이후 다시는 과거 시험장에 발걸음도 들여놓지 않았다.
1653년(효종 4) 나이 32세 겨울에, 할아버지 유성민의 전장(田莊)이 있던, 전북 부안현 변산의 우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우반동에 몸을 맡긴 이후, 유형원은 자신의 호를 ‘반계(磻溪)’로 삼았다. 반계는 ‘우반동의 개울’이라는 뜻이다. 실제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개울의 이름이 반계이다.
강태공이라는 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여상(呂尙)이 낚시를 한 그곳의 이름이 다름 아닌 ‘반계(磻溪)’다.
문왕(文王)을 따라 출사한 여상은 이후 주나라 개국의 기반을 만들었고, 또한 문왕이 죽고 난 후에는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여상은 제(齊)나라를 분봉 받아, 제나라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반계’에는 이렇듯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몸은 숨겼지만, 자신의 뜻을 펼칠 때가 오면 세상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대책’을 실천하겠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유형원은 우반동에 거처한 첫해부터 49세가 되는 1670년까지, 무려 18년에 걸쳐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체제 개혁 대책을 연구했고, 그 성과를 집대성한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반계수록』은 토지 제도 개혁을 다른 ‘전제(田制)’, 재정 및 상공업 개혁을 다룬 ‘전제후록(田制後錄)’, 교육 개혁을 담은 ‘교선제(敎選制)’, 관료 제도의 개혁을 다룬 ‘직관제(職官制)’, 녹봉제 개혁을 담은 ‘녹제(祿制)’, 국방 개혁을 담은 ‘병제(兵制)’, 지방 체제와 행정 개혁을 다룬 ‘군현제(郡縣制)’ 등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어느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정치·경제·사회·교육·국방·행정 등 모든 방면을 두루 다룬 방대한 규모의 개혁서(改革書)였다.
이 책이 ‘조선 최고의 개혁서’라고 불리는 까닭은, 경자유전(耕者有田)과 토지 공유제(土地公有制)를 근간으로 하는, 농민 중심의 토지 개혁을 최초로 제기했다는 점 때문이다.
유형원은 토지 개혁을 통해, 자신의 경작지를 소유한 자영농이 나라의 재정과 국방을 담당하는, 부강한 조선의 미래를 그렸다.
유형원은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초야에 묻힌 채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유형원과 같은 현인(賢人)이 나왔지만, 이 현인을 중용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성군은 출현하지 않았으니, ‘보수의 시대’이던 17세기 조선의 ‘비극’이다.
18세기 들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토지 개혁론, 즉 이익의 ‘한전론(限田論)’과 박지원의 ‘한전론(限田論)’ 그리고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과 ‘정전론(井田論)‘ 등은 모두 유형원의 토지 개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약용은 누구보다 『반계수록』을 숙독하고 깊이 탐구했다. 이러한 까닭에 정약용은 유형원이 뛰어난 식견과 경륜을 지녔음에도 산림 속에 묻혀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을 크게 한탄하기도 했다.
# 잠곡(潛谷) : 잠곡에서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 ‘대동법(大同法)’을 구상하다
조선의 16세기가 ‘사림의 시대’였다면, 조선의 17세기는 ‘보수의 시대’였다.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집 → 우암 송시열로 계보를 잇는 보수적 성리학자들이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한 것은 물론, 사상과 지식 권력까지 장악한 채,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농촌 경제가 피폐해지고 민생이 파탄나면서, 백성들이 유랑민과 도적으로 변해 살아가는 등, 사회 문제가 되었다.
조정에서도 이에 대해 공론화되었고, ‘보수파’와 ‘개혁파’ 관료 사이에 대논쟁을 촉발하게 되었다. 당시 개혁파 관료들을 대표했던 사람이 김육이었다.
김육은 신분 질서와 사회 통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호패법(號牌法)’을 통해 사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수파 관료들에 맞섰다.
그가 들고 나선 것은, 과중한 공물(貢物)에 따른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어 민생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지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었다.
호패법과 대동법을 둘러싼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최초 논쟁은, 김육이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에서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온 직후인 1623년(인조 원년)에 일어났다.
당시 최명길, 유공량 등 보수파 관료들은, 백성의 유랑민화나 도적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호패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육, 조익과 같은 개혁파 관료들은, 호패법은 사회 정치적 불안과 위기감을 한층 더 고조시킬 뿐이므로, 먼저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면서,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했다. 백성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민생 안정과 나라 재정을 복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김육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육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대동법의 시행을 다시 건의한 1638년으로 연기되고 만다.
대동법은 사회를 통제하고 감시하며, 과중한 공역과 세금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데 혈안이 되었던 관리들이 판을 치는 암흑의 시대에, 백성들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한 개혁 정책이었다.
김육은 어떻게 해서 ‘대동법’과같이 민생을 최우선에 두는 정책을 입안하고, 시종일관 그 시행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답은 김육이 34세 때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한양을 떠난 후, 10여 년 동안 몸소 농민들과 더불어 농사짓고 살았던,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 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 13년인 1580년 한양의 서부 마포리에서 태어난 김육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지산(芝山) 조호익에게 처음 가르침을 받다가, 15세 때 해주에 가서 율곡 사후 서인(西人)의 큰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우계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로 인해 김육은 당색(黨色)으로 보면 서인의 정통에 속했다.
김육은 26세(1605년, 선조 38)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연이어 성균관시(成均館試)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광해군 즉위 2년 째 되는 해(1610년)에, 김육은 태학생(太學生)의 신분으로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를 성사시켰다.
그런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大北派)의 영수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는 일이라는 상소문을 올려 반대하고 나섰다.
조식의 제자였던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은 제외시키고 이황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당시 김육은 성균관의 학생회장 격인 재임(齋任)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성균관 유생들과 상의한 끝에, 유학자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김육은 정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광해군은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지워버린 김육을 엄하게 처벌하려고 했으나, 이항복과 이덕형의 간청으로 사건이 무마되면서, 김육은 간신히 처벌만은 면할 수 있었다.
김육은 경기도 가평 잠곡의 청덕동(淸德洞)에 홀로 들어가 우거할 결심을 한다. 이때 김육의 나이 34세였다. 김육은 잠곡의 지명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으면서, 오직 은둔에 뜻이 있음을 내외에 밝혔는데, 그의 문집인 『잠곡유고(潛谷遺稿)』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무런 생계 수단 없이 무작정 잠곡으로 옮겨 온 김육은, 처음 토굴을 파서 거처를 꾸미고 살았다. 몸소 화전(火田)을 일구고 농사를 짓다가, 그것으로도 연명할 수 없으면 숯을 구워 한양까지 무려 130여 리의 길을 걸어가 팔기도 했다.
이렇듯 농부의 삶을 살면서, 김육은 백성의 곤란과 고통을 몸소 뼈저리게 체험했다. 특히 김육은 다음 해에 가족들까지 모두 잠곡으로 데려왔다.
김육이 잠곡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지은, ‘회정당(晦靜堂)’이라 이름 붙인 작은 집의 대들보에 올린 상량문(上樑文)과,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계곡(谿谷) 장유가 쓴 「회정당기(晦靜堂記)」에는 잘못된 세상을 향한 김육의 비분강개한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회정당(晦靜堂)은 ‘군자이회처정사(君子以晦處靜俟)’ 곧 ‘군자는 숨어 살면서 고요하게 기다린다.’는 옛글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김육은 잠곡에 새로이 지은 집에 ‘회정당(晦靜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상량문까지 지어, ‘숨어서 고요하게 살아가는 뜻’을 붙이고, 구석구석 밭을 갈고 김을 매며 산중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고, 세상 바깥의 번잡한 말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문장가 장유는 ‘회정당’에 새긴 뜻이 사실 ‘숨어 살면서 고요하게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점을 온전히 밝히면서, “숨어 사는 것이 막바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고, 고요하게 거처하는 것이 극치에 이르면 반드시 움직이게 된다. 저 우레와 번개가 잠복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는가.”라고 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새로이 인조가 즉위한 직후 중앙 정계에 복귀한 김육이,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동법을 시행하라’라고 일갈한 것을 보면, 장유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육은 1619년(광해군 11) 나이 40세 때에는 ‘귀신 이강(羸羌)’과 ‘늙은 여우(老狐)’에 빗대어 당시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망치고 자신의 배를 불리려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권신(權臣)과 간신배들을 풍자하기도 했다.
1613년 나이 34세에 시작된 김육의 잠곡 생활은,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1623년 나이 44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10년 동안 백성들과 더불어 살면서 실제 농부의 삶을 살았던 김육은, 중앙 정계에 있으면 도저히 알 수 없었을 ‘민생 현장’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강상윤리(綱常倫理)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강조하며, 양반 사대부 계층과 자기 당파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던 서인에 속했으면서도, 만약 백성과 나라와 임금과 관리의 이해관계가 달랐을 경우, 먼저 ‘백성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김육의 민본 사상과 개혁 성향은, 다름 아닌 잠곡의 10년 생활을 통해 자각(自覺)하고 자득(自得)한 것이었다.
10여 년 동안이나 중앙 정계를 떠나 있던 사람이, 조정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한 것으로 보아, 김육은 잠곡에서 농부로 살면서 ‘대동법’과 관련한 정책 구상을 이미 마무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동법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킨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이라고 평가되는데,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에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경제 개혁 정책이었다.
그 하나는 지방 군현의 가구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을, 토지 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하도록 바꾼 것이다.
가구 단위로 조세를 부과하는 방식은, 토지의 소유 여부 또는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이익을 얻는 폐단을 낳았다.
다른 하나는 지방 토산물을 거두어들이는 조세 방식을, 일정한 수량의 베나 쌀로 납부하도록 바꾼 것이다. 이것은 지방 토산물(현물)의 납부에 따른 점퇴(點退, 받은 물건을 살펴보아 마음에 들지 아니한 것은 도로 물리침)와 방납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동법은 토지가 없거나 또는 적은 토지를 소유한 일반 백성의 삶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반면에 그동안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공물 납부의 부담을 일반 백성에게 전가시켰던 부호나 지주, 방납 활동으로 막대한 이득을 누렸던 상인, 공물 수납 과정에서 부정한 이득을 취했던 지방 관리들에게는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밖에 없는 개혁 정책이었다.
특히 지방의 부호나 지주, 그리고 관리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한편, 자신들이 바로 대토지 소유자였던 중앙의 고위 관료들 역시, 대동법이 자신들에게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거대한 정치·사회 세력을 이루어, 김육이 내세운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 이를 반대하는 보수파 간에 대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1623년 첫 번째 논쟁에서 참패한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가 된 1638년(인조 16, 나이 59세)에 다시 대동법 시행을 임금에게 건의하면서, 이 논쟁에 재차 불을 지폈다.
김육의 건의는 지방 토호 세력과 양반 계층, 그리고 방납 활동을 하는 상인들과 관리들이 중앙의 보수파 관료들과 결탁해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또다시 좌절되고 만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646년(인조 24) 나이 67세에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붙었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와 세수입의 감소를 염려한 인조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대동법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이 새로 즉위하자,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관료들은 또다시 삼남(충청도·경상도·전라도)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조정은 공납제를 개혁해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김육의 개혁파(한당)와, 대동법을 반대하고 공납제의 일부 개선과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는 김집의 보수파(산당)로 분열되었다.
온 조선을 뒤흔든 대논쟁의 결말은 ‘호서 지역(충청도) 실시, 호남 지역 불가’라는 절충안으로 매듭지어졌다.
그 후 5년이 지난 1657년(효종 8, 나이 78세), 김육은 다시 효종에게 호남 지역에도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청했고, 다음 해 비록 전라도 해안 주변의 마을에서나마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해 김육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잠곡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이후 평생 대동법 시행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김육의 삶이었다.
김육의 고군분투로 뿌리를 내리게 된 대동법은, 단순히 조세 체제의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시장 경제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와 쌀만 조세로 수취하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중앙 관청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때, 공인(貢人)이라는 민간 상인에게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물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그래서 공인 계층은 관청과 민간 수공업을 중계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관청에 납품할 물건을 주로 한양의 시전(市廛)이나 지방의 장시(場市)들을 통해 조달했다. 이로 인해 시장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상공업 활동은 활발해졌다.
일반 백성들 역시 쌀이나 베를 마련해 조세를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산한 다른 여러 농산물이나 물품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상업적 농업을 경험하거나 상품 교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은 이렇듯 조선 후기 농업, 수공업, 상업의 생산 및 교환 활동을 자극하면서, 상품과 시장 경제의 싹을 틔웠다.
대동법 같은 개혁 정책으로 양대 전란의 후유증을 말끔히 털어내고, 새롭게 사회 경제적 활력과 성장 동력을 찾았기 때문에, 조선은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경제 부흥과 문화 융성을 맞이할 수 있었다.
대동법을 가리켜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이라고 하는 이유다.
대동법은 100년 앞을 내다본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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