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추사(秋史)인가? 완당(阮堂)인가?
# 100개가 넘는 호의 주인공
김정희는 정확한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호를 사용했다.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적게는 100여 개에서부터 많게는 500여 개나 된다.
그를 대표하는 호는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이다.
일반적으로 김정희 하면 ‘추사’, ‘추사체(秋史體)’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유홍준 교수는 김정희의 평전을 출간할 때, 제목을 ‘완당평전’이라고 붙였다. 김정희의 삶과 학문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그를 대표하는 호는 ‘추사’가 아니라 ‘완당’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추사(秋史) :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과 역사학(歷史學)의 독보적 권위자
오늘날 김정희를 대표하는 호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추사(秋史)’는, 역설적이게도 그 연원과 뜻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기록이 없다. 반면에 ‘완당(阮堂)’이라는 호는 김정희가 스승으로 섬겼던 청나라의 대학자 완원(阮元)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사실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김정희가 평생 343개의 명호(名號)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다시 1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추사, 명호처럼 살다』의 저자 최준호 씨의 주장.
“추사(秋史)는 ‘추상(秋霜)같이 엄정한 금석서화가(金石書畵家)’란 의미로 자신을 이른 명호이다. 가을 서리같이 엄정한 금석학자이자, 서화가란 의미이다.”
금석역사가로 해석하기도 한다.
‘추(秋)’는 ‘춘추(春秋)’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春秋’는 공자가 쓴 춘추 전국 시대 노(魯)나라의 편년체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연원한 말이다. 현존하는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서가 다름 아닌 『春秋』다.
금석학은 고동기(古銅器, 구리로 만든 옛날의 그릇이나 물건)나 비석(碑石)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실증과 고증, 해독과 해석의 방법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고고학과 역사학의 한 분야다. 즉 금석학은 곧 역사학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김정희가 추사라는 호를 처음 사용한 시기만 보더라도, 여기에는 서화가 김정희보다는 역사가 김정희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추사 바로 전에 썼던 명호가 현란(玄蘭)이다. 김정희는 1808년(23세) 여름에서 1809년(24세) 중국 연경에 가기 얼마 전까지 ‘현란’을 사용하다가 ‘추사’로 바꾸었다. 이 시기 즉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걸쳐 김정희는 금석역사가로서의 재능과 역량을 한껏 과시했다. 서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훨씬 이전에 이미 금석역사가로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추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였고, 이 분야에 관한 한 추사는 전무후무한 권위자였다.”
김정희에게 고증학과 금석학은 동일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한양 북한산 비봉과 함경도 함흥 황초령의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김정희의 고증과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김정희는 31세가 되는 1816년 7월,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승가사를 유람하다가 비문을 발견해, 이끼를 벗겨내고, 희미해진 글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탁본을 반복해 확인했고, 마침내 그것이 진흥왕의 옛 비석임을 밝혀냈다. 1천 2백년 전의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환히 밝혀져서, 무학대사의 비(碑)라는 황당하고 기궤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김정희가 금석학적 연구를 통해, 비로소 무학대사비로 잘못 전해져 온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 때 세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힌 것은, 역사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젊은 시절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비가 무학대사비가 아니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김정희는 47세가 되는 1832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는 절친한 벗 권돈인에게, 또 다른 진흥왕 순수비인 함경도 함흥의 황초령비를 찾아가 탁본한 다음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권돈인은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황초령비를 다시 찾아내 탁본해서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이후 김정희는 다시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사 관련 기록과 문헌을 깊이 연구했고, 마침내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는 뜻의 이른바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혹은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고 부르는 걸출한 금석역사학 논문을 썼다.
··· 신라왕의 시호(諡號)는 중엽부터 일어났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호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고 호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호칭한 것이 열여섯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고 호칭한 것이 넷이다. ···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웠는데, 그 제액(題額)에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고 호칭했고, 북한산 비문에도 역시 ‘진흥(眞興)’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 살펴본다면, 법흥(法興)이나 진흥(眞興)이라는 칭호는 왕이 사망하고 장사 지낸 뒤에 칭한 시호(諡號)가 아니다. 이는 살아 있을 때 부른 칭호였다. ···
- 『완당전집』,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
김정희는 학문적으로는 ‘금석문과 역사’에서, 또한 예술적으로는 ‘그림과 서예’에서 탁월한 대가였다.
공자의 『춘추』가 추구한 역사 철학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대로 기록할 뿐, 임의로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이 ’述而不作‘의 철학은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추(秋)’라는 글자에는 ‘춘추(春秋)’라는 의미가 담겨있고, 다시 ‘춘추’에는 김정희의 역사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述而不作’과 ‘實事求是’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고 본다.
‘사(史)’에는 ‘역사 혹은 역사가’의 뜻과 의미가 담겨져 있다.
‘秋史’가 담고 있는 의미는 곧 ‘금석서화가’보다는 ‘금석역사가’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완당(阮堂) : ‘청조학(淸朝學)의 제1인자’,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을 스승으로 삼다
최준호 씨는 “흔히 말하길, 사람은 그 이름이나 명호의 의미대로 산다고 한다.”라고 밝히면서, 김정희를 대표할 호는 ‘추사’라는 주장이고, 김정희의 명호를 총 정리한 책의 제목을 『추사, 명호처럼 살다』라고 붙였다.
반면 유홍준 교수는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대표할 호는 추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평전의 제목을 『완당평전』이라고 붙였다.
청나라에 가기 이전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북학파의 두뇌나 다름없던 초정 박제가였다.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 덕분에, 일찍부터 북학에 뜻을 두고 학문을 익히고 지식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청나라의 학계와 문예계에 관한 소식과 주요 학자와 문사들에 관한 정보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1805년 나이 20세 때 스승 박제가가 갑자기 사망한 이후에는, 오직 연경에 가서 예전에 스승과 교류했던 청나라의 대학자들을 직접 만나 교제를 맺고 가르침을 받겠다는 소망을 가졌다. 그러한 소망을 실현할 기회가 스승 박제가가 사망한 지 4년이 지난 후에 찾아왔다.
김정희는 24세가 되는 1809년(순조 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私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연경에 도착한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와 인연을 가졌던 청나라 지식인을 통해,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던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사람과의 만남은 김정희의 삶과 학문 및 예술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김정희는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이후 지속된 교류를 통해, 명실상부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옹방강과 완원 중 김정희가 먼저 찾아가 만난 사람은, 당시 47세의 나이로 청조학(淸朝學)이라 일컫는 청나라의 학술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대학자 완원이었다. 김정희는 완원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도의를 맺었다.
김정희를 만난 완원은, 비록 자신보다 22년이나 연하였지만, 그의 자질과 학문적 수준에 몹시 기뻐했으며, 자신이 편찬의 책임자로 참여해 각 권마다 서문까지 썼을 만큼 정성을 기울인 『13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 한 질을 선물로 주었다.
모두 24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방대한 규모의 서적은, 유학의 13경(十三經)에 대해 한(漢)나라에서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학자들의 저술을 총정리하고 종합해놓은 경전 연구의 최고 대작(大作)이었다.
완당(阮堂)이라는 호 역시 이때 김정희가 완원과 맺은 사제의 인연으로 탄생했다. 완원(阮元)에서 ‘완(阮)’자를 따와, 김정희가 마침내 자신의 당호를 ‘완당’이라고 한 것이다.
김정희의 삶과 철학, 학문과 예술 세계에서 완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첫 번째 스승 박제가와의 인연은 15세 무렵부터 20세까지 불과 5년 정도였던 것에 반해, 완원과의 교류는 이때부터 완원이 사망한 1849년까지 무려 40여 년 가까이 이어졌다.
완원을 만난 이후, 김정희는 청나라의 원로학자인 옹방강을 찾아가, 또한 사제의 도의를 맺었다. 당시 나이 78세였던 옹방강은 명실상부 청나라 학계를 대표하는 원로학자였다. 특히 옹방강은 고서화와 희귀 금석문(탁본)과 전적 수집에 남다른 관심과 탁월한 수완을 보여, ‘석묵서루(石墨書樓)’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서고에 무려 8만 점에 달하는 수장품을 보관하고, 이를 학문 연구의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옹방강은 김정희에게 이 서고를 마음껏 둘러보도록 허락했고, 김정희는 조선에서는 평생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서적과 금석학의 자료들을 직접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옹방강 역시 김정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서적과 서화는 물론, 귀중한 금석문의 탁본까지 선물로 주었다.
더욱이 완원과의 만남에서 ‘완당’이라는 호를 얻었던 것처럼, 김정희는 옹방강과의 만남을 통해 ‘보담재(寶覃齋)’라는 호를 얻었다.
소동파를 사랑했던 옹방강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서재’라는 의미로 ‘보소재(寶蘇齋)’라고 한 뜻을 좇아, 김정희는 ‘담계(覃溪) 옹방강을 보배롭게 여기고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담재(寶覃齋)’라고 하고 또 하나의 자호로 사용했다.
이 ‘보담재’라는 호는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추사나 완당과 더불어 김정희를 대표하는 또 다른 호로 크게 대접받았다.
보담주인(寶覃主人), 보담재, 보담재주인, 보담재인 등의 명호가 이와 관련되고, 평생 수백 개의 호를 사용한 김정희의 이른바 명호벽(名號癖)은 바로 ‘보담(寶覃)’의 작호(作號)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추사보다도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 김정희의 여러 기록과 서화 작품들을 살펴보더라도, 그가 ‘추사’라는 호보다는 ‘완당’이라는 호를 더 애호(愛好)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가 <세한도(歲寒圖)>이다.
김정희의 고고한 기상과 정신세계를 집약해놓았다고 평가받는 <세한도>는 그의 생애 최고 걸작품이었다.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째 되는 1844년 김정희가 나이 59세 때,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화제(畵題)를 써준 <세한도>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의 학문 세계와 예술의 미학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김정희는 수많은 호를 제쳐 두고, ‘阮堂’ 혹은 ‘阮堂老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림의 제목에 해당하는 화제(畵題)에서 김정희는 ‘歲寒圖 蕅船是賞 阮堂(세한도. 우선시상. 완당)’이라고 썼다. 이 화제를 풀이하면, ‘세한도. 우선(蕅船) 이 그림을 감상해보게. 완당’이라는 뜻이다. 이상적의 호가 우선(藕船)인데, 김정희는 이를 우선(蕅船)이라 바꿔 쓴 것이다. 그림의 제목에 ‘阮堂’이라고 쓰고 낙관을 찍은 김정희는 그림에 붙이는 글, 즉 ‘발문(跋文)’에서는 ‘阮堂老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지난 해에 『만학(晩學)』과 『대운(大雲)』 두 책을 보내주고, 올해에는 우경(藕畊)의 『문편(文編)』을 보내오니, 이러한 일은 모두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머나먼 곳에서 구입해 오고,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서 얻은 것으로 일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서로 멀어진다’고 하였다. ··· 공자가 말하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 특별히 성인(聖人)은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이전이라고 해서 더한 것이 없고, 이후라고 해서 덜한 것이 없다. 이전에 나를 대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대를 칭찬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해도, 이후로 나를 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대는 성인이 칭찬한 것으로 역시 칭찬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아! 쓸쓸하고 슬픈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阮堂老人)이 쓰다.
59세였던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이상적이 스승이 그려준 <세한도>를 가지고 청나라를 방문해, 그곳의 이름 높은 학자와 문사들에게 보여주자, 아낌없는 환호와 찬사가 쏟아졌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던지 무려 16명이 앞을 다투어 <세한도>에 제찬(題贊)을 썼을 정도로, 당시 김정희의 국제적 명성과 권위는 높았다.
(세한도는 19세기후반 이상적의 제자인 역관 김병선에게 전해졌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김준학에게 전해졌다. 김준학은 세한도 앞쪽에 제목과 시를 쓰고, 세한도 뒤쪽 청나라 문인들의 감상 글 사이에 두차례 시를 적어 넣었다. 김준학은 1914년 1월과 2월, 연이어 글을 쓰면서, 자신이 세한도의 소장자임을 명시했다.)
이런 점에서 비록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호는 ‘秋史’이지만, 김정희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호는 ‘阮堂’이 더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 삼연노인(三硯老人), 연도암(硏圖庵), 승설도인(勝雪道人), 고다암(苦茶庵) : 조선의 서예와 차 문화의 선도자(先導者)
김정희가 학문에 있어서 고증학과 금석학과 역사학의 독보적인 권위자였다면,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조선의 서예(書藝)와 차(茶) 문화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사대부와 지식인들 사이에 큰 유행과 융성을 불러일으킨 대가였다.
김정희의 삶에서 서예나 차와 관련한 호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추사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만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창적인 서체를 얻을 수 있었다.
완옹(阮翁)의 서체(書體)는 어렸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했다. ···
만년(晩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이후부터,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구속받거나 남을 따라다니는 경향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러 대가(大家)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하나의 서법을 이루었는데, 신기(神氣)가 오는 듯해, 마치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것과 같았다. ··· 간혹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서체가 거리낌이 없고 제멋대로 썼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신중함과 엄격함의 극치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 『환재집(瓛齋集)』, 「유요선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유묵(遺墨)에 쓰다(題兪堯仙所藏秋史遺墨)」
“70년을 살아오면서 열 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닳게 했다.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벼루가 첫 번째이고, 그 다음은 종이이며, 그 다음이 붓이다.
서예가들은 묵(墨)을 제일로 삼는다. ··· 종이가 아니면 묵을 수용할 수 없고, 벼루가 아니면 묵을 발산시킬 수 없다. ··· 반드시 먼저 벼루를 얻은 연후에야 글씨를 쓸 수 있다.
- 『완당전집』, 「묵법변(墨法辨)」
김정희는 평생에 갖고 싶은 세 가지를 말하면서, 그 첫 번째로 중국의 단계 지방에서 나는 돌로 만든 단연(端硯)이라는 벼루를 꼽았을 만큼, 벼루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컸다.
‘세 개의 벼루’를 뜻하는 ‘삼연재(三硏齋)’나 ‘삼연노인(三硯老人)’, ‘벼루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그림’에서 의미를 취한 ‘연도암(硏圖庵)’, ‘임금이 하사한 벼루를 기린다’는 뜻의 ‘사연당(賜硏堂)’, ‘벼루를 갈고 다듬는다’는 뜻의 ‘마연도인(磨硏道人)’, ‘오래된 벼루’에 빗대어 지은 호인 ‘고연재(古硯齋)’ 등이 있다.
김정희는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에 모두 뛰어났지만, 그 가운데 전서(篆書)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자신의 서예 실력을 길렀다고 한다.
‘청구(靑丘, 조선)에서 전서를 쓰며 지내는 산사람’이라는 뜻의 ‘청전산인(靑篆山人)’, ‘전서를 탐구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전암(篆盦)’ 등의 호를 사용했다.
서예 문화와 함께 김정희가 유행시킨 또 다른 문화는 ‘차(茶)’였다. 조선에 들어와 사라지다시피 한 차 문화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라면, 그의 뒤를 이어 19세기 조선에서 차 문화를 본격적으로 발전·융성시킨 사람은 바로 김정희였다.
김정희가 ‘처음 차의 참맛을 느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연경에서 완원을 찾아갔을 때인데, 당시 완원은 조선에서 찾아온 젊은 천재에게 당대 최고의 명차(名茶)였던 ‘용단승설(龍丹勝雪)’을 달여 대접했다. 당시 맛본 용단승설이 김정희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이 때문에 차와 관련한 김정희의 호 역시 용단승설에서 기인한 것이 많다. 승설도인(勝雪道人), 승설학인(勝雪學人), 승설노인(勝雪老人) 등이다.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차를 매개로 깊은 교류를 맺었다.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50여 통에 이른다. 이들 50여 통의 편지 중 무려 15통 정도가 차와 관련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차로 맺어진 초의선사와의 인연은 다시 다산 정약용과의 인연으로 확장되었다.
김정희의 나이 33세 때인 1818년 8월, 정약용은 기나긴 강진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약용의 고향 마을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운길산의 수종사에 가보면, 정약용과 초의선사와 김정희가 함께 모여 이곳의 샘물로 차를 달여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정희는 초의선사가 만든 차를 매우 즐겨 마셨던 듯하다. 평상시에는 물론,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참혹한 순간과, 죽음을 맞을 때를 준비한 말년의 과천 시절에도, 끊임없이 서신을 통해 초의선사에게 ‘걸명(乞茗)’, 곧 차를 보내 달라는 청을 했다.
김정희는 글씨를 써서 답례로 초의선사에게 보내주곤 했는데, ‘명선(茗禪)’ 즉 ‘차[茗]가 곧 선(禪)’이라는 명작을 써준 것이 대표적이다.
차와 관계되는 김정희의 호도 여럿이다. ‘차의 갓 돋아난 어린 싹을 따서 만든 맛이 쓴 차’를 뜻하는 고차(苦茶)에 빗대어 ‘고다암(苦茶庵)’, ‘고다노인(苦茶老人)’이라는 호를 지어 썼고, 자신의 서실을 가리켜 ‘차를 달이는 화로’에 비유하여, ‘다로경권지실(茶爐經卷之室)’과 ‘경향다로실(經香茶爐室)’이라 부르고 또한 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 한국사 최고의 ‘작호(作號) 달인’
김정희는 삶의 변곡점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이 추구한 뜻을 드러낸 수많은 호를 지어 사용했다. 그는 어떠한 구속에도 따르지 않고, 또한 어떠한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작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호는 그저 자신의 뜻이 향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지으면 된다는 것이 김정희의 작호관(作號觀)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희가 처음 사용한 호는 ‘현란(玄蘭)’인데, 현란은 묵란(墨蘭)과 같은 의미이고, 묵(墨)은 선비가 갖추어야 할 문방사우(文房四友) 중의 하나이고, 난(蘭)은 선비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현란’이라는 호는 자신이 선비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나라 연경에 가기 이전 김정희는 ‘玄蘭’과‘秋史’라는 호를 썼고,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교류하면서 ‘阮堂’과 ‘寶覃主人’ 등의 호를 얻었고,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보담주인’과 비슷한 뜻을 갖는 ‘寶覃齋’, 혹은 ‘覃齋’라는 호를 썼다.
‘阮堂’이라는 호 또한 '阮叟‘, ’老阮‘, ’阮堂老人‘, ’阮盦‘, ’阮舫‘, ’庚阮‘, ’阮堂老叔‘, ’阮堂學士‘, ’病阮‘ 등으로 자유롭게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완원과 함께 소동파를 흠모하는 마음을 담아 ‘완파(阮坡)’라고 하기도 했다.
청나라를 다녀온 지 2년이 지난 1812년 무렵에는, 옹방강이 써서 보내준 ‘시암(詩盦)’이라는 글씨를 호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시가 있는 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김정희는 청나라 학자들과 글과 편지 등을 통해 교류할 때, ‘자신은 조선 사람이다’라고 자부하는 의미를 갖는 여러 가지 호를 사용했다.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 해동추사(海東秋史), 동해순리(東海循吏), 동해둔사(東海遁士), 동해서생(東海書生), 고계림인(古鷄林人), 천동(天東), 동방유일사(東方有一士)’ 등이다.
고증학과 금석학의 독보적인 권위자로서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드러낸 호로는 ‘실사구시재(實事求是齋)’와 ‘상하삼천년종횡십만리지실(上下三千年縱橫十萬里之室)’을 꼽을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삼천년, 공간적으로는 10만 리에 걸쳐 있는 학문과 지식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자부심이 크다.
옹방강이 직접 새겨 보내준 인장에 적혀 있던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도 당당함을 나타낸다.
김정희의 나이 55세인 1840년(헌종 6), 조정의 권력을 쥔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의 사건[윤상도 옥사사건]을 다시 들춰내, 그 배후로 김정희를 지목해 누명을 씌운 다음,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는 우의정 조인영, 형조판서 권돈인, 병조참판 김정희로 대표되는 반(反)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안동 김씨의 공격이었다. 특히 안동 김씨의 칼날은 정치적 경쟁 세력인 명문가 경주 김씨의 종손이었던 김정희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김정희는 국문을 받던 중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 옛적에 함께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를 탐문하기도 했던, 절친한 벗 조인영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간곡한 상소를 올려,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생활 도중 <세한도>와 같은 우리 예술사에서 길이 빛날 위대한 걸작을 남겼다.
김정희는 자신이 귀양살이하던 대정현(大靜縣) 포구(浦口)에서 글자를 취해 ‘정포(靜浦)’라는 호도 사용했다.
귀양살이 도중 회갑을 맞아서는, 자신이 태어난 1786년과 회갑 연도인 1846년의 병오년(丙午年)에 빗대어 ‘병오노인(丙午老人)’이라는 호도 썼다.
나이 63세가 되던 1848년 12월 6일 비로소 유배지에서 풀려나, 다음 해 1월 한양으로 올라온 김정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1851년 7월까지 한강변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넘는 북청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과천에 머물며 말년을 보냈다.
당시 병든 몸으로 편안하게 머물 곳조차 찾지 못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이 시기동안 다채롭고 흥미로운 작호(作號) 활동을 했다.
자신이 거처하던 금호(琴湖,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의 東湖 인근)의 지명에서 취해 ‘금강(琴江)’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노량진 앞 한강 부근을 일컫는 노호(鷺湖)의 아름다운 풍경을 뜻하는 ‘삼묘(三泖)·삼묘노어(三泖老어)’라는 호를 썼다.
지금의 마포를 가리키는 삼호(三湖)를 취해서는 ‘삼호의 어부’라는 뜻으로 ‘삼호어수(三湖漁叟)’라는 호를 사용했다.
호(號)의 옛글자인 고(沽)를 취해 ‘삼고(三沽)’라는 호를 짓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노호(老湖), 노호(鷺湖), 강상(江上), 금상(琴上), 용산(蓉山, 서울 마포구 용산 부근에 연꽃 피는 곳이 있어 생겨난 별칭), 용정(蓉井) 등, 한강변에 살던 자신을 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호로 드러냈다.
‘노어초(老漁樵)’ : 남은 삶 동안 그냥 이름 없는 강변의 늙은 어부나 나무꾼처럼 살고 싶다.
‘매화구주(梅花舊主)’ : 매화의 고결한 품격을 자신의 인격에 비유함.
‘춘효거사(春曉居士)’ : 생명이 막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봄날과 동틀 무렵 새벽.
‘삼십육구주인(三十六鷗主人)’, ‘칠십이구당(七十二鷗堂)’, ‘노구(老鷗)’, ’동해한구(東海閒鷗)‘ : 한강변을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자신과 동일시함.
생애 마지막 4년을 보낸 과천에서는, 그 지명에서 취한 ‘과(果)’자가 들어가는 호를 많이 사용했다.
과노(果老), 노과(老果) : 과천의 늙은이
과농(果農) : 과천의 농부
과도인(果道人) : 과천의 도인
과정(果丁) : 과천의 문지기
남충(南充) : 과천의 옛 지명
과남(果南) : 과천의 남쪽
과월(果月) : 과천의 달
과전(果田) : 과천의 밭
과우(果寓) : 과천의 집
유(儒)·불(佛)·선(仙)을 두루 섭렵했기에 불가(佛家)나 선가(仙家)와 관련된 호들도 많이 사용했다.
‘부처’라는 뜻의 ‘나가(那迦)’, 여기에서 파생된 나산노인(那山老人)·나옹(那翁)·염나(髥那)·노가(老迦)·나가산인(那伽山人)·나수(那叟) 등이 있고, 불교 용어인 ‘정혜쌍수(定慧雙修)’에서 유래한 쌍수(雙脩)·쌍수도인(雙修道人), 부처가 되기 위해 수도하는 ‘바라밀(婆羅密)’에서 연원한 단파거사(檀波居士)·찬제(羼提)·찬제거사(羼提居士)·찬제각(羼提閣)·과파(果波)·노파(老波)·밀암(密庵) 등의 호를 지어 썼다.
비로자나불이 거처한다는 연화세계(蓮花世界)에 비유해 승련노인(勝蓮老人)·화지(華之)라고 하거나, 고기를 먹으면서 두타행(頭陀行, 불교의 승려가 닦는 수행 방법)을 한다고 해서 ‘육식두타(肉食頭陀)’라고 했고, ‘부처의 노예’라는 뜻으로 ‘불노(佛奴)’라고 하고, 부처가 고행(苦行)한 곳이라고 알려진 설산(雪山)의 소에 비유해 자신을 ‘설우도인(雪牛道人)’이라고 했다.
선가(仙家)와 관련해서는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에 빗대어, ‘봉래산의 나무꾼’이라는 뜻의 ‘봉래산초(蓬萊山樵)’와 ‘소봉래(小蓬萊)·소봉래학인(小蓬萊學人)’이라 했고,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이자 신화에서 천제(天帝)의 장서(藏書)가 있는 서고(書庫)라고 전해오는 ‘낭환(琅환)’에서 유래한 ‘동해낭환(東海琅환)·낭경인(琅瞏人)·우낭환선관(又琅환僊館)’ 등의 호도 썼다.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호는 ‘과칠십(果七十)’과 ‘칠십일과노인(七十一果老人)·칠십일과(七十一果)’였다. 70세가 되는 1855년에는 ‘과천의 칠십 세 늙은이’, 사망한 71세에는 ‘칠십일 세의 과천 늙은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마지막 순간 김정희가 자득한 ‘작호(作號)의 미학(美學)’은, 특별함과 기이함과 고상함과 우아함이 아닌, 바로 평범함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