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역사속의 라이벌 : 김경신 vs 김주원

道雨 2021. 5. 21. 14:35

역사속의 라이벌 : 김경신 vs 김주원

 

 
 

- 김경신 / 2인자 안주 않고 적극적 행동으로 왕위 차지

- 김주원 / 왕위 계승 눈앞에 두고 정적에게 자리 뺏겨

 

신라 선덕왕(37대) 때 권력의 제2인자는 김경신이었다. 선덕왕 김양상과 함께 혜공왕을 타도했기 때문이다. 많은 신하와 사병이 그의 휘하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김양상이 거사하기 전 시중직에 있었던 김주원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거사가 없었다면 사실 왕위는 김주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경신은 항상 노심초사했다. 권력의 제 2인자로 만족할 것인가, 김주원을 제치고 다음 왕위를 노릴 것인가. 이것이 당면한 그의 숙제였다.

 

김경신은 어느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 그가 복두(귀족들이 머리에 쓰던 일종의 모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측근에게 해몽을 잘 하는 자를 불러오라 했다. 불려온 자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는 흉몽인 것 같습니다.”

그는 초조하여 물었다.

“무슨 의미인데 흉몽이라 하는가?”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죄수의 칼을 쓸 징조입니다. 또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감옥에 갇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디 근신하 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소?”

대답하는 김경신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갔다.

‘내가 왕이 될 수는 없는 모양이구나. 김주원을 제거할까 했더니 포기해야겠군’.

그리고는 외출을 삼가고 두문불출했다.

 

이때 아찬 여삼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야망이 있는 자였다. 김경신의 측근에게서 그 꿈 이야기를 듣고는 쾌재를 불렀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김경신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경신은 처음에는 만나기를 거절했으나, 간곡히 청하므로 겨우 허락 했다.

여삼이 물었다.

“공께서 요즈음 통 조정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어쩐 일이십니까?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한참을 생각한 그는 자신이 꾼 꿈의 내용과 이를 점쳤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여 삼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꿈 해몽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지만, 이는 분명 길몽이옵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라도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꿈을 풀어보 겠습니다.”

“좋네. 자네가 한번 풀어보게나.”

 

경신은 좌우 신하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단둘이 앉았다.

“예. 복두를 벗는다는 것은, 이제 신하의 위치에서 벗어나 더 이상 윗사람이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공이 바로 내물왕의 12대손이 아니옵니까?”

“그렇네만 천관사 우물 속에 들어간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궁궐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하니 이 어찌 길몽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듯한 해석이었다. 경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내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왕위에 오른단 말인가?”

“왕은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하늘이 알아서 하는 것이니, 북천(北川)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만 잘 지내십시오.”

김경신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다.

 

얼마 안 돼 선덕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맞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런데 왕의 즉위식을 하기로 한 전날 밤,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 북천의 냇물이 불었다. 마침 북천의 북쪽에 집이 있었던 김주원은 냇물을 건널 수가 없었다.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신하 중의 하나가 말했다.

“이보시오. 제가 전일 뭐라 했습니까? 김주원 공은 왕의 자격이 없다 하지 않았소. 그리하여 하늘도 그것을 알아보고 이렇게 비를 내려 김주원 공을 못오게 하는 것이 아니오?”

이는 여삼이 공작하여 포섭해놓은 김경신측의 인물이 었다.

“그렇다면 누가 왕위에 올라야 한단 말이오?”

“그야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김경신 공이지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신하들이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 중에 여삼이란 자도 끼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원성왕(785~798)이었다.

이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한편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로 도망가 살았다. 원성왕은 그를 명주군왕에 봉해주었다. 명주군 지역에서만 왕노릇을 하라는 일종의 배려였다. 먹고살 수 있는 식읍도 주었다. 명주를 비롯해 양양·삼척·평해·울진 등이 그의 식읍이었다. 그가 바로 명주(강릉) 김씨의 시조가 됐다. 원성왕은 자신의 정적을 살해하지 않고, 나름대로 대우를 해주는 포용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김주원에게 내려졌던 정치활동 제한 조치는 그에게 한정됐다. 그 아들대에 와서는 복권됐다. 김주원의 아들이었던 김헌창은 조정에 벼슬을 하여, 무진주(지금의 광주) 도독을 거쳐 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무진주 도독을 지낸 후 웅천주 도독에 임명되자, 휘하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했다. 백제의 수도였던 웅천주(공주)를 근거지로 삼아 백제의 부흥을 표방하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백제인들의 반발심을 이용한 것이었다. 헌덕왕 14년(822) 의 일이었다.

그는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 원년이라 했다. 오랫동안 평안한 나라가 됐으면 하는 뜻이었다. 그리고 무진주(전남 광주)·완산주(전주)·청주(진주)·사벌주(상주)의 4도독과 국원경(충주)·서원경(청주)·금관경(김해)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해 자신의 소속으로 삼았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청주도독 향영은 진영에서 이탈해 도망했다. 한산주(경기도 광주)·우두주(춘천)와 패강진(황해도 평산)· 북원경(원주) 등의 여러 성은 김헌창의 역모를 알고 병사를 모아 자체 방어를 꾀했다. 또 완산주의 장사(長史) 벼슬에 있던 최웅과 주조(州助)직에 있던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은 경주로 도망가 변란을 고했다.

 

신라 정부는 토벌대를 구성해 헌창군을 공격했다. 각지에서 패배한 김헌창의 군대는 웅진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현재의 공산성을 거점으로 최후의 항전을 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열흘이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성이 장차 함락될 것을 안 김헌창은 스스로 자살의 길을 택했다. 그러자 그 부하가 헌창의 머리와 몸을 잘라 각각 다른 자리에 파묻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시신을 보존하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난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그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산적과 결탁해 다시 난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고구려 부흥을 표방하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도읍을 정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난도 역시 실패함으로써, 김헌창 계열은 멸족되다시피 했다.

 

김경신과 김주원은 일종의 정적이었다. 하나는 실권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신하들도 양편으로 나누어졌다.

김경신의 꿈을 둘러싸고도 이같은 양분은 계속됐다. 김주원측의 인물은 그 꿈을 흉몽이라 하여 김경신을 묶어두려 했다. 그러나 김경신 측의 인물은 길몽이라 해석해 적극적인 의지를 갖도록 했다. 결국 왕위는 실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한 김경신에게 돌아갔다.

 

〈김갑동/대전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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