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남명 조식의 유적과 남명기념관 답사기 및 사진(2007. 10. 7)

道雨 2007. 10. 9. 15:25

 

 

                    남명 조식의 유적과 남명기념관 답사기 및 답사 사진

 

 

* 산청군 시천면(덕산)에 남명 조식과 관련된 유적(덕천서원, 산천재, 남명 묘소, 신도비 등)이 모여 있어서 답사하기에 좋은 코스이기도 하지만, 남명의 생애야 말로 기개있는 선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기에 많은 답사객들이 찾는 코스가 되었다.

  나도 여러차례 이곳을 방문했고, 해운대 해변도서관 주부독서회원들의 답사 안내를 위해 오기도 했지만, 올 때마다 뭔가 숙연해지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러한 것이 있다. 

  눈으로 볼 꺼리보다는 마음으로 느껴야 할 답사코스라고 생각한다.

 

 

  남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서 동시대인인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문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부각되지 못했다. 벼슬을 일절 사양하고 지리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것이 큰 이유였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식의 족적은 소외돼왔다.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광해군 때에는 한동안 집권세력이 되기도 했으나,  인조반정 직후 정인홍이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지면서, 정인홍에 의해 처음으로 엮어진 조식의 문집도 훼손되어 버렸다. 대개 남명의 제자였던 북인들은 그 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평생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처사로 지낸 것을 자긍심으로 삼고, 벼슬살이 할 것은 다하고 명정에다 '처사'라고만 쓰라고 유언을 남긴 퇴계 이황을  비판한 일이나, 상소문에서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라고 칭한 일은 그의 기개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 덕천서원의 강당인 경의당(敬義堂) 건물 지붕이 뒷산의 능선과 잘 어울리고 있다. 덕천서원은 남명이 타계하고 5년 뒤인 선조 9년(1576)에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웠으며, 광해군 1년(1609)에 사액을 받았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져 1920년대에 다시 중건되었다.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 경의당에서 출입문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십자모양의 길이 뭔가 정갈하고 엄격한 느낌을 준다. 문 밖의 키가 큰 나무는 남명이 심었다고 전하는, 서원의 교목이라할 수 있는 은행나무이다. 은행 열매처럼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 강당 뒷편에 있는 제향공간인 숭덕사이다. 남명과 그의 제자인 최영경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8월 10일에 남명제를 지낸다고 한다.  

 

 

* 서원 밖 강가에 있는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을 가진 세심정(洗心亭). 남명이 살았을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 이곳에 앉아 남명의 고고한 인품을 느껴보는 것도 좋으리라.

 

 

* 이곳은 산천재(山天齋)로서, 남명이 61세 되던 명종 16년(1562)에 이 서재를 짓고 죽을 때 까지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비가 많이 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단의 답사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 현판 위의 벽에 신선이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벽화그림이 있다.  

 

 

* 오른쪽 벽에 버드나무 밑에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벽화그림이다.

  '장자'에 전하는 '소부허유 문답'하던 고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허유라는 은자는 요 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맡아달라는 말을 듣고 거절한 뒤,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 그러자 소부라는 이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  이번에 덕산을 찾으니 예전에 없던 시설이 보인다. 바로 '남명기념관'이다. 산천재 바로 앞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새로 건립되었다.

 

 

 

* 남명기념관의 출입문인 성성문(惺惺門)이다. 성성이란 깨우치고 또 깨우친다는 뜻이다. 남명이 늘 차고 다니던 방울 이름이 성성자이다. 

 

 

 

* 남명기념관 안에 있는 남명의 상과 신도비. 남명의 상은 기념관과 함께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며, 가이드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우암 송시열이 쓴 남명의 신도비이다. 열정적인 가이드는 송시열의 신도비가 이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듯이 보였다.  

 

 

* 우암 송시열이 쓴 남명의 신도비.

  남명의 처음 신도비는 정인홍이 세웠지만, 그가 실각하자 넘어졌고, 후손들이 다시 명사들의 글을 구하였는데, 어쩌다가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의 글이 동시에 당도했다. 두 사람 모두 산림처사 출신인 남명을 추앙하였지만, 각각 남인과 노론의 지도자 격이었던 두사람의 비를 함께 세울 수는 없었다. 난처해진 자손들은 미수의 비를 덕산에 세우고 우암의 비는 남명의 출생지인 삼가에 세웠다.

  한편 정세가 남인이 쇠퇴하고 노론이 집권하게 되자, 남명의 자손들은 미수의 비를 쓰러뜨리고, 우암비를 덕산에 옮겨다 남명의 별묘에 세웠다. 

  기념관 뒤쪽의 가까운 산자락에는 남명의 묘소가 있으며, 그 앞에는 여러 개의 넘어진 비석들이 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인해 그리된 것이다.

  평생 처사로 살다간 남명의 기개와는 다른, 후손과 문도들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 기념관(전시관) 입구에 그려져 있는 남명 철학의 개념도.

 우측에 내명자경(內明者敬) 좌측에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씌어 있다.

  남명은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히 절제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특히 경의(敬義 : 마음이 밝은 것을 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義라 함)를 중시하여, 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義 로써 외부생활을 해나간다는 생활철학을 실천하였다.  

 

 

*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敬義劒). 

  남명은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늘 자기를 깨우치고, 칼을 머리맡에 두고 의리의 결단을 생각했다고 한다.

 

 

 

***  남명기념관이 새로 들어서 덕산 일대가 남명의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다. 부디 외형적인 확장에 그치지 말고, 남명의 고결한 사상과 실천철학을 마음에 새겨서, 이 시대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남명 묘소에는 가지 않고 단속사지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