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도종환 시인의 구구산방

道雨 2008. 9. 20. 12:21

 

 

 

* 아래 글과 사진은 '대상 17회' 카페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문학기행 : 도종환 시인의 구구산방




말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있다
사람은 그 자신 혼자라서 아무 말없이 시간을 벗한다
사람 옆에 산이 있다
산은 산대로 사람의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스스로 바람소리를 만들어내고 녹음을 만들어내며
사람 옆에 가만히 있다



다람쥐가 산에서 내려와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다람쥐 역시 언어가 다르니
사람과 대화할 수 없고 산과도 대화할 수 없다
다람쥐는 숲 속에 작은 집을 지어놓고 지내는
시인의 마당에 와서 도토리 몇 알을 먹고는 슬며시 사라진다



시인 도종환의 구구산방, 창작의 공간 이전에 자연과 동물과 사람이 동거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시인은 누군가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하루를 보낼 때도 있지만 서글프지 않다
서글프기는 커녕, 호미에 흙을 묻히며 일하고, 일을 끝낸 후에는 계곡 물에 호미를 씻으며 감사해 한다



손에도 흙이 잔뜩 묻었지만 손의 흙을 씻어내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다
호미를 씻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의 흙도 씻어 내려가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늘 내가 무엇을 했던가 묻지 않는다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앞산과 뒷산에 꼭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
허물없이 하루가 간 것만으로도 자족할 수 있다



그 자족의 공간은 유일하게 바다를 끼지 않은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 구구산방이다
구구산방은 도종환 시인의 지인이 암에 걸린 동생의 투병생활을 위해 지었던 황톳집이다
지인의 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지인은 심신이 약해진 시인에게 시도 짓고 요양도 하라며 권했고
시인은 이곳으로 짐을 옮겨 시 짓는 방으로 삼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숲 속 황톳집에 이르는 길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곳에서 지은 시 중 [산경]은 무욕의 삶을 실천하는 시인의 작품 중에서도 백미로 통한다

 

 


[산경/도종환]

하루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도 안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 떠 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구구산방이 있는 법주리는 일년 내내 침묵의 강처럼 조용하다
그러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그 자리에서 바삐 움직인다
시인은 시를 짓고 나무는 광합성작용으로 산소를 뿜어내고
계곡물은 마을의 논과 밭으로 들어간다
집배원은 조용히 시인의 집에 편지를 배달하고
나비와 벌은 꿀을 찾아 소리 없는 비행에 나선다
문명의 발전에 연연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부족함을 모르는 공간이다



시인은 이곳을 보고 자연과 일체화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인이 지어놓은 황톳집으로 슬그머니 들어 앉았다
한참 걸어 나가기 전에는 가게도 없고 술집도 없고 이웃도 없는 산 밑이다
처음에는 시인은 무섭기도 했지만 구구산방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