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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구한의사회 동백섬 건강걷기대회에 부쳐

道雨 2009. 4. 22. 16:28

 

 

 

           해운대구한의사회 동백섬 건강걷기대회에 부쳐

 

 

이번 주 일요일 동백섬 일원에서 걷기대회를 한다니, 차제에 동백섬과 관련한 자료를 소개한다.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고, 가족, 자녀들과 함께 풍성한 얘기를 나누는데 도움이 되었으면좋겠다.

 

 

 

1. 해운8경


예로부터 지리상 살기 좋은 고장을 삼포지향(三抱之鄕)이라 하여 명산(名山) · 명강(名江) · 명해(名海)를 싸 안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해운대는 온천 하나를 더하여 사포(四抱)의 이름난 고장으로 산(萇山) · 강(春川) · 바다(東海) · 온천(龜南溫泉)이 있어 사포지향(四抱之鄕)이라 할 수 있는 좋은 고장이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해운대를 사랑하는 풍류객들에 의하여 해운8경이 전해지고 있다.

   

 (1) 해운대상(海雲臺上)

  신라 말기에 고운 최치원이 대(臺)를 쌓아 노닐었다는 동백섬 남쪽 끝에 있는 해운대 위에서 대마도를 향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을 말한다.

 

   (2) 오륙귀범(五六歸帆)

  어선들이 오륙도 저 멀리서 고기잡이를 마치고 만선의 즐거움을 안고 하얀 포말을 날리며 해운포로 돌아오는 경관을 말한다.

 

    (3) 양운폭포(養雲瀑布)

  장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좌동 쪽의 장산계곡을 지나 폭포사(瀑布寺) 뒤쪽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데, 이것이 마치 구름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양운폭포라 하고 8경의 하나로 꼽았다.

 

   (4) 구남온천(龜南溫泉)

  지하에서 솟아나는 온수(溫水)의 신비로움을 8경의 하나로 삼았다.

 

    (5) 봉대점화(烽臺點火)

  간비오산 봉수대에서 지핀 봉화(烽火)가 칠흑같은 해운대 일대의 밤 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는 광경을 말한다.

  

  (6) 우산낙조(牛山落照)

  달맞이 동산이 있는 와우산(臥牛山) 위에서 시뻘건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관을 말한다.

 

  (7) 장지유수(萇旨流水)

  장지천은 현재 해운대고등학교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해운대고등학교 아랫쪽의 장지마을을 지나 굽이굽이 흘러내려 춘천과 합류하여 바다에 들어가는데, 강둑에는 버드나무 · 소나무 등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어 이 또한 좋은 경관이었다.

 

    (8) 춘천약어(春川躍魚)

  장산계곡에서 흘러내린 물과 부흥봉 쪽에서 흘러온 물이 합류하여 해수욕장 뒷편을 흐르는 춘천이 되는데, 달 밝은 밤이면 이 맑은 물에서 물고기들이 뛰노는 모습이 또한 장관을 이루었다.


 

2. 동백숲 사이로 겨울오는 동백섬      

       -  겨울 알리는 첫신호 동백꽃      

           

  동백섬(부산지방기념물 제46호)은 해운대구 우1동 706-6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면적은 4만5천여평이다. 동백섬이란 지명은 예전 이 일대에 동백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모양이 다리미 같이 생겼다 해서 다리미섬이라고도 불려졌다.

  태백산맥의 한줄기인 금련산맥이 장산으로 내리달아 광활한 남해안으로 강하하면서 만들어낸 섬으로 예전에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었다. 그러나 장산에서 흘러내린 물과 좌동 동쪽 부흥봉에서 내려온 물이 합류한 봄내(춘천)가 좌동 우1동 중1동 지역을 지나 지금의 조선비치호텔 앞으로 흘러내리면서 모래를 실어내린 결과 오랜 퇴적작용으로 지금과 같이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가 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고적조에는 해운대를 '산이 바다 속으로 든 것이 누에의 머리와 같다. 그 위에는 모두 동백나무와 두충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덮여 있어 싱싱하고 푸르러 사철 한결같다. 이른 봄철이면 동백꽃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발굽에 채이고 밟히는 것이 3~4치나 된다.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바라보인다. 통일신라말 때 최치원이 대를 쌓고 놀았다 하는데 유적이 아직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해사일기》를 보면 '해운대는 대 앞에 기암이 층층으로 층이 지고 곡곡으로 굽어졌는데 천 사람이 앉을 만큼 넓고 바라보이는 전면이 널브러져 대마도를 마주할 수 있어 중간에는 가리우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해천만리 높이 열린 것 같아 흉금을 활짝 열고 만상 그 모두를 접할 수 있다.'고 하여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명소임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동백섬은 쪽빛 하늘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 10여센티 가량 땅에 깔린 붉은 동백꽃이 어우러진 동백숲이 총 천연색으로 절경의 극치를 이루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는 첫 신호를 알려주는 곳이다.

  겨울을 상징하는 꽃 동백은 다른 나무들이 가을에 잎사귀를 바람에 날려보내지만 동백섬은 붉은 꽃을 활짝 피운 채 정열적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동백(冬柏)의 본 이름은 산다화(山茶花) 《해동농서》에 산다화의 속명이 동백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백은 차나무과에 속하며 사계절 푸르른 상록성 교목이다. 겨울(12월~3월)에 꽃이 핀다하여 동백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동백꽃의 전설을 소개하면, 옛날 섬에 귀양을 온 한 쌍의 부부가 땅을 개간하고 고기잡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도둑이 들어 아내의 몸까지 요구하였다. 아내는 달아나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던 남편은 물 위로 떠오른 아내의 시신을 거두어 산 정상에 묻었다. 그 뒤 아내의 무덤에서 절개를 상징하듯 눈보라 속에서도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동백꽃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온 섬으로 번졌다. 그래서 동백꽃을 여심화(女心花)라고도 한다.

  

동백나무는 가루받이를 해주는 벌과 나비가 없는 계절이라 찾아오는 새가 동박새이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포악한 왕 때문에 죽어간 동생은 동백나무가 되고 두 아들은 동박새가 되어 그 나무를 찾아든다는 전설이 있는 새다. 이 나무와 새는 서로 영양가 높은 꽃가루와 꿀을 나눠주며 산다. 동백꽃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조매화(鳥媒花)이기도 하다. 한 송이의 동백꽃을 피우기 위해 꿀을 먹고 그 값으로 가루받이를 하는 동박새가 없으면 동백꽃은 피지 못한다.

  동백꽃은 청렴, 절개, 길상, 정열을 상징하며 오래 살고 푸르름이 변하지 않으며 영화롭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부산시와 해운대구의 꽃이 동백꽃이며 범어사 대웅전 기단부에 동백꽃이 양각되어 있어 부산의 상징은 동백꽃이라는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3. 동백섬과 최치원      

      -  43세 때 동백섬에서 풍류 즐겨      

           

  최치원(857~?)은 우리나라 문학을 연 첫 대가로 꼽힌다. 학문으로는 유불선(儒佛仙) 3교에 달통했고 후세의 규범이 될만한 주옥같은 명시 명문을 남겼다.

  868년(경문왕 8)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가서 남이 백 번하면 저는 천 번하기(人百之 己千之)를 기약해 18세에 당당히 과거에 급제해(874년) 벼슬길에 나아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율수현위(876년)가 됐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행영병마도통으로 있던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임무를 맡게 됐다. 그는 이때 특유의 명문장으로 반란군 진압과 민심 회유에 크게 기여했다.

  881년 7월 그의 명성을 세상에 크게 떨치게 한 것이 저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였다.

이 격황소서는 심오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명문으로 24세되는 청년 최치원의 학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884년(헌강왕 10) 10월 신라로 출발한 최치원은 28세였다. 풍랑으로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3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885년 헌강왕은 크게 기뻐해서 높은 벼슬을 내리고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지만 이미 신라는 망국의 내리막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886년(헌강왕 12) 1월 최치원은 당나라 체류 중에 지은 글들을 모아 《계원필경집》 1부 20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시부》 3권 등 28권을 편찬해서 왕에게 올렸다.

  최치원은 높은 경륜을 펴보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부패 귀족들이 가로막고 나서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단념하고 890년(진성여왕 4) 34세의 최치원은 자청해 지방장관으로 나가봤지만 역시 사태를 수습하기란 역부족이었다.

  894년(진성여왕 8) 2월, 38세의 최치원은 왕에게 당시의 혼란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정책으로서 '시무10여조'를 올리자 왕은 이를 칭찬하여 아찬이란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해내려는 개혁의지를 담은 그의 시무책은 시행되지 못했으며 애석하게도 '시무10여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정치적 좌절에서 오는 절망감으로 정치에 뜻을 잃은 최치원은 898년(효공왕 2) 11월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거리낄 것 없는 자유인의 몸으로 43세 때부터 자연으로 돌아가 시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생활하며 깊은 산, 숲 속이나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며 서책을 쌓아두고 자연을 노래하고 풍월을 읊었다. 문학적 자질을 발휘하며 풍류적 생활을 즐기는 세속적 초탈의 경지가 강하게 작용하였으리라 본다.

 

  최치원은 해운대 동백섬에 언제 찾아왔을까? 899년(효공왕 3) 관직에서 물러난 43세 때 경주 남산을 등지고 바다를 따라 가야산 입산길에 이곳을 지나다 주변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동백섬 동남방에 자리잡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자연석 대 위에 흙으로 누각을 짓고 대가엔 산다화를 심고 그야말로 소요자방(逍遙自放)을 즐기게 됐다.

  이같이 바다와 구름을 따라 바람과 달을 음미하면서 동백섬을 산책하다가 자신의 아호인 해운(海雲)을 따 자연석에다 '海雲臺'라 음각하니 이것이 해운대석각(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45호)이다. 이 해운대 석각 유적이 해운대 지명 유래의 진원지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절경을 '해운대8경' 중 제1경인 '해운대상(海雲臺上)'이라 하였다.

  해운대에서 풍류를 즐기다 용당동 신선대, 양산 임경대, 진해 청룡대, 마산 월영대, 산청 단속사, 하동 쌍계사 등을 거쳐 합천 가야산 자락 홍류동 계곡에 이르는 입산과정 유적지를 찾을 수가 있다.

  동백섬 정상에는 해운선생의 약전을 소개하는 유적비가 1965년에 조성됐고 1971년에는 동상이 건립됐으며 '해운정'이 전망대와 전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4. 누리마루

2005년도에 APEC정상회담이 열린 곳으로, 우리나라 전통 정자의 양식을 현대적인 건축기법으로 표현한 건물이다.

누리(온세상, 세계)와 마루(정상, 최고)의 합성어로서 순 우리말로 지은 이름이다.

APEC정상회담 때 21개국 정상들이 모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의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라고 한다.

 

5. 동백나무와 동박새      

      -  아비는 동백나무가 되고, 두 아들은 동박새가 되어      

           

  동백나무는 따뜻한 해변 산지에서 잘 자라는 차과의 늘 푸른 나무이다. 각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처음에는 산다목이라 불렸고 다음에는 동백나무, 다시 산다화라 불렸다. 지방에 따라 동백, 산다화로 표기했으며 중국에서는 산다수 산다화 남산다 동백 춘학단 등으로 부르며 일본에서는 춘(椿)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동백나무는 봄철의 대표적인 꽃나무로 꼽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동백나무를 꺾어 망치를 만들어 마루에 걸어 놓으면 귀신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동백나무의 신령함을 상징하는 풍속이었다.

  동백나무는 나무 줄기가 높이 10~20m 정도까지 자라며 나뭇잎은 매우 두터운 편이며 앞면은 사계절 내내 윤기가 흐른다. 잎의 뒷면은 연한 녹색으로 광택이 나지 않으며 줄기는 매끈하고 황갈색을 띤다. 꽃은 1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통꽃으로 매우 크고 아름다우며 꽃은 대개 다섯 장씩이지만 더러 일곱 장인 것도 있다. 꽃잎은 밑뿌리 부분에서 합쳐지는데 꽃의 색깔은 짙은 붉은 색이며 수술이 아주 많은데 끝에는 노란색의 꽃밥이 많이 달려있다. 꽃이 질 때에는 화려한 색깔 그대로 꽃잎과 꽃술이 시들지 않고 함께 가볍게 떨어진다. 향기로운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자라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쯤 되면 밤알 크기만한 열매가 익는다.

  동백섬에는 이름 그대로 동백나무가 섬 산지에 정자나무처럼 뒤덮고 있다. 나뭇잎에서 광택이 나 봄의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고 그 사이에 살며시 내민 붉은 동백꽃, 지저귀는 동박새…3박자 조화의 풍경은 아무리 보아도 아름답다.

  

동백나무와 동박새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욕심 많고 잔인무도한 임금이 있었다. 그에게는 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없으니 자연히 임금자리는 동생 아들인 조카에게로 이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게 싫었던 임금은 두 명의 조카들을 죽일 생각을 하였다. 임금의 동생은 임금의 뜻을 눈치채고 사랑하는 두 아들을 멀리 떠나 보낸 뒤 두 아들을 닮은 소년을 데리고 살았다. 그러나 임금은 동생이 몰래 숨겨둔 아들들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임금을 속이려 했다는 벌로 동생에게 두 아들을 직접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는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임금의 동생은 자기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임금이 준 칼로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두 아들은 순간 두 마리의 새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갔고 이어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쏟아져 내렸고 동생의 가족을 무참히 짓밟으려 했던 임금도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천벌을 받은 것이었다.

  임금의 동생이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간 자리에서는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가 돋아났고 그 나무가 크게 자라자 아버지의 죽음을 어쩌지 못하고 새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던 두 아들이 아비의 혼이 깃들어 있는 동백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이 새가 바로 동박새이다.’

  

동백꽃 꿀주머니 속에는 꿀이 많이 들어있다. 동백꽃이 피는 때는 이른봄이라 벌과 나비가 나오지 않는다. 동백꽃의 꽃가루는 동박새가 옮겨주는데, 동박새는 꿀을 빨아먹고 꽃가루를 이 꽃 저 꽃에 옮겨 준다. 이와 같이 새가 꽃가루를 옮겨주는 꽃을 '조매화'라 한다.

  동박새는 장산을 비롯하여 해안이나 도서지방의 활엽수림에 많이 산다.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동백섬을 찾아와서 꿀을 먹고 암술머리에 꽃가루를 옮겨줌으로써 일종의 공생을 하는 셈이다. 동박새는 참새보다 조금 작고 머리와 등은 황녹색이며 턱과 목밑은 연한 황색, 배는 흐린 백색이다. 눈가에 안경을 쓴 것처럼 부드러운 털이 선명한 테두리를 하고 모양이 귀엽고 예쁠 뿐만 아니라 고운 소리로 잘 운다.

 

 

 

 

*** 많은 회원과 가족들이 참여하여 싱그러운 봄의 기운을 만끽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