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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20년 동안 숨어 있던 사랑과 이별의 드라마

道雨 2009. 10. 13. 13:45




택지공사장에서 마주친 사백여년 전 여인의 얼굴

어떤 지역이든 그 지역의 역사가 묻혀 있는 곳은 주거지역의 주변에 위치하는 야산들이다. 지방 소도시의 경우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야산들은 그대로 그 지역의 역사의 현장이며 거기에는 멀게는 수천 년 전에서부터 가까이는 수십 년 전까지의 무덤들이 땅 속에 층층이 겹쳐 있고 무덤 외에도 산성이나 집터 또는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흔적들이 묻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이러한 야산들은 점차 주거지역에 흡수되고 자연 그 속에 묻힌 우리의 역사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소위 원이엄마 편지가 출토된 이응태 묘가 조사된 것도 이러한 개발사업의 와중에서였다.

1998년 4월에 들어서면서 정상동의 야산들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택지공사가 본격 진행되면서 분묘 이장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간의 경험에서 박물관 학예사와 학생들을 현장으로 내보내서 이장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꼼꼼히 살피도록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정상동에 살고 있는 고성이씨 귀래정파의 후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고성이씨 15세손 이명정의 묘를 이장하려고 회곽을 노출시켰는데 회곽이 너무 강해서 포클레인을 동원해도 잘 깨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처럼 단단한 회곽은 본 일이 없으니 대학 박물관에서 와서 조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얼른 조사준비를 하고 분묘에서 복식자료가 많이 출토될 것을 예상하여 의류학과에서 복식사를 전공하는 이은주 교수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조사단이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묘는 이미 파헤쳐져 있었는데 남편 이명정의 회곽은 강도가 약하여 이미 제거되었으며 목관도 거의 부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 합장된 부인 일선문씨의 회곽은 매우 단단하여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회곽은 포클레인의 돌 깨는 장비를 이용하여 겨우 깨 낼 수 있었다. 일선문씨의 목관은 전혀 부식되지 않은 상태로 노출되었다. 일선문씨가 먼저 죽고 이명정이 나중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일선문씨의 관곽은 온전히 보존되고 시신과 유물도 그대로 있었던 반면 이명정의 관곽은 모두 부식되고 인골도 유물도 모두 부식되고 없었다.

우리는 목관의 외관과 내관의 뚜껑을 열고 내부 상태를 확인한 후 내관을 묘소 앞의 그다지 넓지 않은 빈 터로 옮겼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작업할 시간은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이은주 교수를 비롯하여 학예사와 학생들이 재빠르게 손을 놀려 시신을 감싼 이불부터 벗겨내고 관의 빈 곳을 채운 옷가지들 그리고 시신에 입혀진 옷들을 부지런히 벗겨냈다. 시신의 피부는 검게 변색되고 표면이 약간 건조되어 굳어 있었지만 시신 전체는 완전히 굳지 않아서 팔다리와 몸을 움직여 옷을 벗겨내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얼굴을 덮은 명목(시신의 얼굴을 덮는 모자처럼 생긴 얼굴가리개)을 벗겨내자 일선문씨의 곱고 단아한 얼굴이 잠을 자는 듯이 눈앞에 나타났다. 머리카락 일부가 약간 희게 세었으나 주름이 없는 얼굴로 보아 나이는 많아야 50 전후일 것으로 보였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날 오후 일선문씨 무덤의 조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지고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단시간에 걸친 유물의 수습이었지만 지금까지 조선조 분묘에서 출토된 복식자료들이 이장 당시 인부들에 의해 찢겨진 채 벗겨져 내버려진 상태로 수습되었던데 비해 이번에는 겉에 싼 이불부터 시신의 가장 안쪽에 입혀졌던 속옷들까지 입혀진 순서와 유물의 부장 위치 등이 정확하게 기록된 첫 번째 조사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조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들도 우리처럼 사랑할까요?” 불쑥 나타난 사백년전 사랑편지

일선문씨의 분묘조사가 끝나고 유물 정리가 한창이던 4월 25일 또 하나의 무덤이 조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표조사 당시 이 분묘는 후손이 없는 무연고 분묘였다. 따라서 분묘는 발굴대상으로 정해졌고 분묘의 주변에는 출입금지를 위한 경계선이 쳐지고 안내판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발굴을 위한 행정절차가 진행되고 있던 1997년 11월 중순 안동의 어느 문중에서 이 분묘를 자신들의 조상묘로 추정하고 몰래 파헤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묘를 파헤친 사람들이 외관 뚜껑을 열고 확인한 것은 철성이씨鐵城李氏라고 쓰인 명정이었다. 철성은 고성의 옛 지명이므로 이 묘의 주인은 곧 고성이씨였던 것이다.

무연고 분묘는 다시 유연고 분묘가 되었고 고성이씨 문중의 분묘이장작업에 이 분묘도 포함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짜가 4월 25일로 정해진 것이다. 우리는 문중 후손들과 함께 현장에서 제사를 지낸 후 봉토를 제거하였다. 봉토와 묘광은 이미 작년 11월 파묘로 인해 제거되었다가 다시 복토된 상태로 있었다. 깨진 회곽 속에는 방금 깎아 짜 맞춘 것처럼 대패자국이 선명한 목관이 드러나 있었고 향긋한 송진내음이 그대로 풍겨 나왔다. 관은 예상한대로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두께가 9센티미터나 되는 두꺼운 목재를 사용하였다. 관뚜껑을 벗겨내니 관 속에는 시신을 감싼 이불과 빈 공간을 채워 넣은 옷가지들로 빈틈 하나 없이 꽉 차 있었다. 일단 내관만 포클레인을 이용하여 묘광 밖으로 옮겼으나 현장에서 관 내부를 개방하여 조사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열악했고 이미 시간도 저녁 무렵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관을 산 밑의 고성이씨 문중 정자인 귀래정 앞으로 옮겼다.

본래 오늘 예정이던 이장 작업은 내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니 관 내부의 유물과 시신의 수습은 오늘 밤 안으로 끝내야 했다. 해가 지면서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관을 대문안으로 해서 정자 위로 옮겨가야 했으나 중장비가 정자 앞마당으로 들어갈 수 없고 관이 너무 무겁고 커서 인력으로 안에까지 옮기기도 쉽지 않아 작업은 정자앞 문 밖 마당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전기선을 끌어오긴 했으나 작업을 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할 수 없이 자동차의 전조등을 켜고서야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시신을 싼 겉 이불 밖에서도 작은 옷가지 등 여러 가지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옷가지들이 하나씩 수습되던 중 가슴 위에 굵은 글씨가 쓰여 진 커다란 종이가 덮인 것이 보였다. 그것은 굵은 붓으로 쓰인 한시로 된 만사輓詞였다. 그런데 그 종이에 붙어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또 확인되었다. 그 종이에는 작은 글씨가 가득 쓰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한글이었다. 유물 중에는 부채도 있었고 또 작은 주머니들도 있었다. 유물 수습을 겨우 마치고 나니 시간은 새벽 한시가 넘었다. 시신은 얼굴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가슴 아래로는 이미 완전히 부패되어 살은 흙으로 변한 뒤였다. 수습된 유물을 정리하여 비닐 포장을 하고 유골을 새 관에 안치하고 정자 밑으로 옮겼다. 마치 우리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준 듯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묘의 주인을 알려준 편지들

박물관에서 유물을 정리하면서 한글 문서는 죽은 이의 젊은 부인이 먼저 간 남편을 향해 쏟아낸 한 맺힌 사랑의 편지였음이 밝혀졌다. 이 편지의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또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도 학술적으로 많은 결과물들이 나온 바 있다. 유물 정리 과정에서 또 하나 놀라운 물건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부인 자신의 머리카락을 섞어서 삼은 짚신이었다. 병으로 누운 남편을 낫게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아 신긴다는 옛 말은 있으나 그것이 실제 유물로 등장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외에 작은 주머니 속에서 죽은 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나왔다. 이 편지들에서 죽은 이의 이름은 응태應台이고 그의 부친은 요신堯臣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요신은 앞서 조사된 이명정과 일선문씨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곧 이 묘의 주인은 이응태이며 미라로 발견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일선문씨의 손자였던 것이다. 그의 형의 만시에서 서른 한 살에 죽었다고 하였고 그의 부인 편지글에 병술년 유월 초하루라고 적혀 있으니 그는 1586년 5월 하순에 죽은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고성이씨 족보에 이응태는 묘를 잃었다고 되어 있고 성회誠會라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은 청송 진보로 이주하였다고 되어 있을 뿐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또 그의 부인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남지 않았다. 다만 아들 성회가 진보로 이주하였다고 하니 혹시 외가가 있는 곳으로 간 것이 아닐까 추정될 뿐이다. 부인의 편지에 보면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또 하나의 아들은 어찌 되었는지 그것도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의 무덤이 어떤 과정에서 실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죽은 뒤 육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전쟁의 와중에서 그의 묘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였고 그 후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추정될 뿐이다. 그러나 묘는 뜻 밖에도 그의 조부모의 묘와 함께 조사되었고 사백여 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존재를 후손들에게 밝히게 되었으니 이는 그를 뒤늦게 맞이한 후손들은 물론 그들의 부부애와 가족 사랑을 알게 된 오늘의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인간미 넘치는 가정의 본보기를 보여주게 되었으니 하늘에서도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 분묘의 조사는 정밀한 고고학적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국 미라 연구가 단순한 생체적 연구가 아니라 미라가 만들어지게 된 문화사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임세권 안동대학교 박물관장  
사진·안동대학교 박물관

출처 : 국악 전통과 퓨전의 소리길~(여천악회)
글쓴이 : 여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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