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자작나무 이야기

道雨 2010. 5. 13. 16:15

 

 

 

              자작나무 이야기

 

 

자작나무 이름의 유래

   자작나무라는 이름은 이 나무의 껍질을 태울때 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백서(白書)로도 불리운다.

 

2. 남한에는 자생하지 않아

   자작나무는 북부 지방의 심심 산천에 자라는 나무다. 그러나 거제수 나무의 수피가 회백색으잘 벗겨져 많은 사람이 혼동하는데, 심어 가꾸는 나무 외에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남한에 없다.
 
n3.화촉(華燭) 밝힌다는 의미
   옛 문헌에 자작나무는 대개 화(樺)자를 쓰고 간혹 화(華)자로 쓰기도 했다. 지금도 결혼식을 올리면 ‘화촉(華燭)을 밝힌다’고 하며 ‘축 화혼(祝 華婚)’이라고 축하의 글을 보낸다.
예전에는 전기는 커녕 초도 없어서 불이 잘 붙는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사용했는데, 화촉을 밝힌다 함은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고 행복을 부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n4. 껍질은 종이 대용으로 사용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이나 중국도 이 자작나무 껍질에 부처님의 모습을 그리거나 불경을 적어 두어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책자를 만들기도 하였고 단궁을 만들 때 궁배를 싸는 것을 비롯하여 낚싯대, 각종 연장의 손잡이를 감싸는 데도 이 껍질을 이용하였다.
자작나무를 백서(白書)라고도 하는데, 이는 옛날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이 이 나무의 껍질을 태워서 그 숯으로 그림을 그렸고, 가죽을 염색하는데 사용하면서 부른 이름이다. 
      
n5. '닥터 지바고와 자작나무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에는 어김없이 자작나무 숲이 나온다.
‘닥터 지바고’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雪原)에 몰아치는 눈보라에 의연히 맞서, 쭉쭉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한껏 자랑하던 자작나무 숲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이었다.
자작나무 숲이 없었더라도 ‘닥터 지바고’가 그토록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n6. 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한 너와지붕
   백두산 근처의 집은 너와집이 많은데, 통나무로 집을 지어 지붕을 이고는 자작나무 껍질로 덮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그 위에 돌을 가득 올려 놓는다. 이 자작나무 지붕이 좋은것은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산길을 가다가 자작나무 토막을 밟거나 길을 내려갈 때 쓰러져 있는 나무줄기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 역시 껍질은 살아있는 나무처럼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도 속은 모두 썩어있기 때문이다.
 
n7. 두루두루 이용된 자작나무 용도
   <본초강목>에 “화(樺)는 색은 황색이고 분홍색 반점이 있으며, 수피는 두껍고 부드러우며, 신발의 뒤창에 붙이고, 때로 칼집으로 쓰며, 말안장이나 활을 싸기도 하고, 껍질로 밀을 감싸 초를 만들어 불을 붙이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제2차세계대전 중 물자가 부족하던 일본 군인들은 군화 뒤창을 이 껍질로 대용하였다고 한다.
자작나무 목재는 아주 단단하고 조직이 치밀하여, 벌레가 잘 안 생기고 또 오래도록 변질되지 않아 건축재, 조각재는 물론 여러가지로 이용 된다.
 
n8. 신라 천마총과 자작나무
   1973년에는 경북 경주의 한 고분에서 하늘을 나르는 천마(天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다. 그래서 고분의 이름을 천마총이라 아였다.
말다래는 말안장에 늘어뜨려 진흙이 말에 튀는것을 막는 장식품을 말한다.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의 주재료가 자작나무 껍질이었던 것이다.
한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경주의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관의 안쪽 머리에 쓰는 부분이 자작나무 껍질과 섬유였다.

 

 

 
9. 수액을 채취하는 나무
   고로쇠나무나 거제수나무 처럼 곡우(5월초)때 자작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어 그 수액을 마시무병장수 한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우리나라 북부 지방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이 수액으로 대접한다.
북한에서는 이 수액을 용기에 담아 판매 한다고도 하며, 또 이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 아주 일품인데 아무리 마셔도 한 시간이 지나면 깨끗하게 술이 깨는 명주라고 한다.  
 
n10. 효심에서 비롯된 개천이라는 풍습
   북부 지방에서는 장사를 지내고 3년 뒤 다시 묘를 열어 백골이 된 시신을 꺼내서 자작나무 껍질로 빈틈없이 싸고 다시 묻어 분묘을 만드는데, 이는 오래도록 부모의 백골을 보존하기 위한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이 풍속을 ‘개천’이라고 부른다.
 
n 11. 백노인의 죽음과 자작나무 전설
   옛날 백두산 기슭에 사냥으로 살아가는 백노인과 손녀 설화가 살고 있었다.
백노인이 포수들과 사냥을 떠나고 없을 때였다. 부인을 아홉이나 둔 부잣집 막내 아들이 백노인의 집 앞을 지나다가 설화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막내 아들은 중매쟁이에게 설화를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설화는 중매쟁이의 꼬임에 넘어가 부잣집 일을 돕다가 막내아들의 시중까지 들게 되었다.
얼마 후 마을에는 설화가 막내아들에게 손목을 잡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데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을에 퍼진 소문을 들은 백노인은 곧장 부잣집으로 달려가 주인과 아들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렸다.
혼자 남은 설화는 하늘을 보고 통곡하다가 기절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린 후였다. 설화는 정신없이 할아버지를 찾았다. 설화가 할아버지를 찾아 험한 봉우리를 오르고 있을  때 멀리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 할아버지를 발견한 설화는 너무 기뻐 달려 갔으나, 할아버지는 설화를 반기지 않았다. 설화는 돌처럼 굳어 버린 할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울다가 지쳐 죽고 말았다.
그 후 백노인과 설화가 죽은 자리에서 하얀 자작나무와 진달래과에 속하는 노란 만병초가 자라났다.
 
n12. 왕자의 죽음과 자작나무 전설
   옛날 칭기스 칸이 유럽을 원정할 때 칭기스 칸 편에 서서 도움을 준 유럽의 한 왕자가 있었다. 정체를 숨긴 왕자였는데, 칭기스 칸의 군대는 막강하고 엄청난 무기가 있다는 등의 거짓 소문을 퍼뜨려, 유럽의 군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미리 도망가게 만들었다.
후에 이 사실을 안 유럽 왕들은 이 왕자를 잡으려고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왕자는 칭기스 칸의 군대로 피신하지 않고 혼자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음을 알게 된 왕자는 땅에 큰 구덩이를 파고 자신의 몸을 흰 명주실로 친친 동여 매고 그 속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다음해 봄, 왕자가 죽은 곳에서는 나무가 한 그루가 자라났는데 이 나무가 바로 흰 비단을 겹겹이 둘러싼 듯, 하얀 껍질을 아무리 벗겨도 흰  껍질이 계속 나오는 자작나무라는 것이다.
왕자가 죽어서 된 자작나무는 왕자의 넋을 기리는 듯 사람을 피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있는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다.
 
n13. 자작나무 종류 구별하기
   자작나무 종류에는 자작나무 이외에도 거제수나무, 사스래나무가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나무껍질이 하얀 것이 거의 같아 구별이 어렵다.
그렇다면 자작나무 무리에 들어가는 이 세종류는 어떻게 구별할까?
거제수나무는 잎 모양이 타원형형이고 잎맥의 수가 10~16쌍인데 비하여, 작나무는 잎 모양이 거의 삼각형이며 잎맥은 5~8쌍 정도이다.

또 사스래나무는 거제수나무와 거의 비슷하나 껍질에 은백색이 강하며 톱니가 불규칙하고 잎맥이 7 ~11쌍이다.
거제수나무는 거제수(巨濟樹)로 쓰기도 하는데, 거제도에 이 나무가 많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자라는 지역으로 볼  때 남한에 자작나무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곳은 없다. 지리산을 비롯해 남부지방의 높은 산에서 흔히 만난다고 하는 ‘자작나무’는 사실은 거제수나무나 사스래나무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거제수나무를 물자작나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어서 더욱 혼란스럽다.
 

    슬픈 사연으로 태어난 자작나무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이 땅에 존재했던 나무들에게, 그 중에서도 아주 많은 도움을 준 나무들을 위해 슬픈 탄생 설화를 만들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무의 탄생 설화는 거의 예외 없이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나무를 비롯한 어떤 존재든 아픔과 슬픔 없이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도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동유럽의 어떤 왕자가 죽은 후 태어났다.
몽골의 영웅이자 세계역사를 바꿔놓은 칭기즈칸이 유럽을 침략하던 시절,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한 왕자가 칭기즈칸 군대의 우수함을 과대 선전해서 유럽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유럽의 왕들이 이 왕자를 잡으려 했으나,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구덩이를 파고 흰 명주실로 친친 동여매고 그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흰 비단을 겹겹이 둘러싼 듯 하얀 껍질을 벗기면 계속 나오는 자작나무는 바로 왕자가 환생한 것이다.
자작나무는 화가의 손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옛날 화공(畵工)들이 자작나무의 껍질을 태워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보 제207호인 천마도 장니(障泥)」를 그린 것도 자작나무 껍질이다. 백마가 구름을 헤치고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을 그린 천마도 장니는 산골에서 50년이상 잘 자란 자작나무껍질 47겹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자작나무과의 자작나무의 껍질에만 관심을 가지면 슬픈 사연으로 태어난 자작나무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봄에 피는 자작나무의 꽃은 슬픈 사연을 닮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암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수꽃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자작나무의 잎은 이태리포플러보다 작지만 모습은 아주 닮았다. 그래서 바람 부는 날 자작나무 곁에 서면 잎에서 슬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람이 그치면 자작나무잎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 금관이 나뭇가지의 모습을 갖고 그 위에 둥근 옥과 나뭇잎을 달고 있는이유는?
북방의 한 기마민족이 섬겼던 신성한 나무는 잎이 넓은 나무 중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 추운 벌판에서 귀한 존재였을 것이고,  그런 곳에서 자랄 수 있는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는 성스러운 존재로 보호 받았을 것이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자작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마음은 신라의 귀족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왔고, 귀족이 죽은 후에 무덤에  함께 묻힌 것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장니며, 자작나무를 가장 상징적으로  잘 형상화시킨 것이 금관이다.

 

 

 

 

 

 

 *** 아래는 <나무열전>에서 발췌한 것.

 

자작나무는 백두산과 시베리아를 상징하는 나무이며, 이 나무의 특징은 흰 껍질이다. 이 나무는 주로 추운 북쪽에 자생하지만, 요즘에는 남쪽에서도 조경수로 많이 심어 쉽게 만날 수가 있다.

자작나무를 의미하는 한자는 화(樺)이다.

 

자작나무는 꽃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작나무는 껍질은 하얗지만 껍질 사이로 드문드문 검은 반점이 보인다. 겉은 희지만 속은 검은데, 검은 색은 기름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자작나무는 기름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을 화촉을 밝힌다고도 하는데, 화촉(樺燭)이 바로 자작나무로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화촉(華燭)으로 사용하지만, 원래는 자작나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인은 자작나무로 불을 밝혀 사바나 처녀들을 잡아갔다고 한다.

 

자작나무의 껍질인 화피(樺皮)는 종이가 없던 시절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