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설, 설화

시뷜레 이야기

道雨 2019. 7. 19. 12:25




시뷜레 이야기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뷜레

이 책은 첫머리에서 고대인들이 세계의 창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아보았으니, 이제 이야기가 그럭저럭 끝나가는 이 대목에서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사는 세계 이야기를 좀 해보기로 하자.

이 사자()의 세계에 대해서는 가장 뛰어난 고대 시인 중의 한 사람이 소상하게 그려낸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묘사는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가장 권위 있는 철학자들의 교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베르길리우스가 하계로 통하는 입구라고 생각했던 곳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초자연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에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베스비우스 산 가까이 있는 화산 지대가 이런 곳이다.

이 일대는, 대지가 엄청난 깊이와 넓이로 갈라져 있었고, 여기에서는 유황 불길이 솟아올랐다. 속에 갇힌 증기 때문에 이곳 지면은 늘 요동했고, 땅 밑에서는 신비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오르노스 호수는, 물로 가득 찬 사화산의 분화구였던 듯하다.
아오르노스는 폭이 반 마일이나 되는 둥근 호수였다. 수심은 아주 깊고 주위에는 높은 둑이 있었으며, 베르길리우스 시대에만 하더라도 이 둑은 울창한 숲에 덮여 있었다.

호수에서는 늘 유독한 증기가 오르고 있어서 둑에서는 벌레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고, 호수 위로는 새도 날지 못했다.

베르길리우스에 따르면, 이곳에 하계로 통하는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네이아스는 이곳에서 하계의 신들인 페르세포네, 헤카테, 그리고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뉘에스에게 제물을 드렸다. 그러자 땅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면서 둑 위의 숲이 움직였다. 이어 개들이 짖는 소리가 이 신들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렸다.

이윽고 시뷜레가 말했다.

「자, 용기를 내셔요, 여기서부터는 그게 필요하답니다.」

시뷜레는 동굴로 내려갔다. 아이네이아스는 시뷜레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두 사람은 지옥의 현관 앞에서 우중충한 무리 사이를 지났다. 현관에 운집한 것은 다름 아니라 〈한탄〉과 복수의 〈원한〉, 창백한 〈역병〉과 음울한 〈노년〉, 〈공포〉와 끝없는 〈기아〉, 〈노기〉, 〈궁핍〉, 그리고 〈죽음〉으로 모두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델포이의 시뷜레〉

미켈란젤로가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다섯 시뷜레 중의 하나인 〈델포이의 시뷜레〉.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뉘에스들은 그곳에다 침상을 내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도, 가닥가닥이 뱀인 머리카락을 피로 물든 댕기로 매고 거기에 있었다.

여기에는 또 팔이 백 개나 되는 브리아레오스, 슛슛 소리를 내는 휘드라, 불을 뿜는 키마이라 같은 괴물도 있었다. 아이네이아스가 이런 괴물에 놀라 칼을 뽑아 금방이라도 내리칠 태세를 취하자, 시뷜레가 이를 말렸다.

두 사람은 이윽고 코퀴토스라고 불리는 검은 강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카론이라는 뱃사공이 있었다. 카론은 나이가 지긋하고 좀 변덕스럽기는 하나, 그래도 힘이 좋고 정력이 왕성한 사나이였다. 카론은 신분이 구구각색인 손님들을 자기 배에다 태우고 있었다.

기다리는 무리는 영웅, 소년, 처녀 등 십인십색이었는데, 그 수는 가을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의 수,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 수보다 많았다. 이들은 강둑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한시 바삐 건네 주기를 애원했다. 그들의 소원은 오직 강 저쪽 둑(피안)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정하고 엄격한 뱃사공은 자기가 고른 이들만 태울 뿐 나머지는 모두 쫓아 버렸다.

아이네이아스는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시뷜레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차별하는 것이지요?」

시뷜레가 대답했다.
「정식으로 장례식을 치러 받은 영혼들이라야 나룻배에 탈 수가 있답니다. 죽어서도 매장을 당하지 못한 영혼은 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백 년 동안 이 강둑을 오르내리며 서성거린답니다. 백 년이 지나면 이들에게도 나룻배를 탈 자격이 생기는 것이지요.」

아이네이아스는 폭풍 속에서 죽은 자기 부하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운명을 슬퍼했다.


저승의 강 아케론의 뱃사공 카론

저승의 강 아케론의 뱃사공 카론. 카론은 고집이 매우 센 노인으로, 동전 한 닢 받지 않고는 절대로 혼령을 강 저쪽으로 건네 주지 않는다.



바로 그 때 아이네이아스의 눈에 팔리누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팔리누로스, 뱃전에서 바다로 떨어졌던 키잡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팔리누로스에게 다가가,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변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팔리누로스는, 자기가 손으로 키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키와 함께 배에서 바다로 떨어졌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이네이아스에게, 도움을 베풀어 자기도 함께 강 저쪽 둑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시뷜레는 그런 짓은 하데스의 규정을 범하는 것이라면서 팔리누로스를 꾸짖었다. 시뷜레는 꾸짖은 게 마음에 걸렸던지, 조금만 기다리면 그의 시신이 파도에 밀려나오고, 해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어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에 자극을 받아 장례식을 정식으로 치러 줄 것이며, 그 해안의 곶 이름은 〈팔리누로스 곶〉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그를 위로했다.

과연 그곳은 지금도 〈팔리누로스 곶〉이라고 불린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팔리누로스를 뒤로 하고 ,아이네이아스와 시뷜레는 나룻배 쪽으로 다가갔다. 카론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영웅을 노려보며, 대체 무슨 권리로 생명이 있는 자가, 더구나 무장까지 하고 강둑에 접근하느냐고 물었다.

시뷜레가 나서서, 자기네들은 결코 난폭한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아이네이아스의 목적은 아버지를 만나는 것뿐이라면서, 저 황금가지를 보여 주었다. 카론의 분은 황금가지를 보는 순간 가라앉았다.

카론이 둑에다 배를 대자, 두 사람은 그 배에 올랐다. 그 배는 원래 육체를 떠난 가벼운 영혼만을 태우게 마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네이아스가 타자 몹시 삐걱거렸다.



케르베로스를 끌고 나온 헤라클레스

저승의 지킴이 개 케르베로스는 딱 한 차례 헤라클레스에게 끌려 지상으로 나온 적이 있다. 이 항아리 그림은, 케르베로스를 끌고 나온 헤라클레스(오른쪽의, 머리에는 사자 가죽을 쓰고 손에는 곤봉을 든)와, 케르베로스가 무서워 항아리에 숨는 겁쟁이 왕 에우뤼스테우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기원전 4세기의 항아리 그림.



두 사람은 곧 건너편 둑에 이르렀다. 건너쪽에는 머리가 셋인 개 케르베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케르베로스의 목에는 수많은 뱀이 털처럼 돋아나 있었다. 케르베로스는 세 개의 목으로 시끄럽게 짖다가, 시뷜레가 던진 약 묻힌 과자를 먹고는 동굴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아이네이아스와 시뷜레는 강둑을 올랐다. 문득 두 사람 귀에 어린 아기 우는 소리가 낭자하게 들렸다. 인생의 문을 나서는 날에 죽은 아기들이었다. 아기들 옆에는 무고()로 죽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미노스가 판관()으로 법정에 서서 이들의 행적을 심문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삶을 혐오하여 스스로 죽음을 피난처로 여기고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도 다시 태어난다면 가난도, 노동도, 그 밖의 어떤 고통도 달게 견디어 낼 터였다.

그 옆으로 펼쳐져 있는 곳이 비탄의 들이었다. 비탄의 들에는 몇 줄기 가느다란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오솔길은 모두 도금양목() 숲으로 통했다. 그곳에는 짝사랑으로 희생되어 죽어서까지도 고통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혼령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아이네이아스는 화상() 자국이 생생한 디도의 모습을 얼핏 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어둠 속이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으로 가까이 갔다.

틀림없이 디도였다. 눈물이 아이네이아스의 두 볼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가엾어라, 디도여! 그대가 죽었다는 소문은 빈말이 아니었구나. 나 때문에? 신들께 맹세코, 그대를 버린 것은 내 본의가 아니었다. 내가 어찌 제우스 신의 명을 어길 수 있으랴. 우리의 이별이, 그대에게 그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할 줄 누가 알았으랴. 걸음을 멈추고 다정한 이별의 말 한 마디라도 해주어요.」

디도는 잠깐 동안 그 자리에 선 채 고개를 떨구고 발치만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었다. 아이네이아스의 간원에도 디도는 바위처럼 무감각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잠시 뒤따라가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시뷜레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둘이서 갈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이어서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영웅들이 배회하고 있는 들판으로 갔다. 그곳에는 그리스쪽 장수들과 트로이아 쪽 장수들의 망령이 운집해 있었다.

트로이아 쪽 장수들은 아이네이아스 주위로 몰려왔다. 그들은 아이네이아스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왜 왔느냐, 어떻게 왔느냐는 등 정신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그리스 쪽 장수들은 전사자 들판의 어둠 속에서 번쩍거리는 갑주를 보고 다가왔다가, 아이네이아스를 알아보고는 돌아서서 도망쳤다. 트로이아 전장에서 아이네이아스가 익히 보던 모습들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언제까지나 트로이아의 전우들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시뷜레의 권유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그 다음에 도착한 곳은 두 줄기 길이 나뉘는 갈림길이었다. 한쪽 길은 엘뤼시온으로 통하는 길, 다른 한쪽 길은 저주받은 자들의 나라로 가는 길이었다. 옆으로는 거대한 도성의 성벽이 보였다. 도성을 에워싸면서 플레게톤이 흐르고 있었다.

도성 정면에는 더없이 튼튼한 문이 있었다. 신들도 부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문이었다. 문 옆에는 첨탑이 솟아 있었고, 그 위에서 복수의 여신 중 하나인 티쉬포네가 망령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도성에서는 신음 소리, 가죽 채찍 휘두르는 소리, 쇳소리, 사슬이 쩔꺽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이네이아스는 공포로 파랗게 질린 채, 무슨 죄들을 지었길래 벌받는 소리가 저렇게 요란하게 들리느냐고 물었다. 시뷜레가 대답했다.

「여기에는 라다만튀스의 법정이 있습니다. 라다만튀스가 망령들이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범죄자는 어떻게든 이 죄를 감추고 싶어하지만 어디 어림이나 있나요? 티쉬포네는, 이 죄인들을 전갈 채찍으로 몰아 그의 누이인 복수의 여신들에게 넘긴답니다.」

그 때였다.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청동문이 열렸다. 아이네이아스는 문 안쪽에서 지키는, 머리가 쉰 개나 되는 휘드라의 모습을 보았다. 시뷜레는, 무한 지옥 타르타로스의 동굴은 내려갈수록 깊어지는데, 맨 안쪽은 하늘 높은 것만큼이나 깊다고 말했다.

그 동굴 바닥에는 옛날 올륌포스 신들과 싸웠던 저 티탄 족이 가로누워 있었다.

살모네우스도 거기에 있었다. 살모네우스는 감히 제우스와 겨루어 보겠다고, 청동으로 다리를 만들고, 그 위를 전차로 달려 천둥 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었으며, 사람들에게 불타는 나무를 던져 벼락 때리는 흉내를 내다가, 제우스의 진짜 벼락에 맞아 죽은, 말하자면 인간의 무기와 신의 무기가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던 자였다.

거인 티튀오스도 여기에 있었다. 티튀오스는 몸이 어찌나 컸던지, 가로누우면 바닥 면적을 9에이커나 차지했다. 독수리가 이 티튀오스의 간을 파먹고 있었는데, 이 간은 먹힐 때마다 다시 소생했다. 따라서 그의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았다.

아이네이아스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그러나 그 옆에는 복수의 여신 에리뉘에스 중 하나가 서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려는 순간에 그 음식을 빼앗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생전에 형제를 미워했거나, 부모를 매질했거나, 자기를 믿는 친구를 배신했거나, 부자로 살면서도 어려운 이들에게 적선한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적선에 인색했던 자들이 가장 많았다. 결혼 약속을 어겼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싸웠거나, 주인의 신뢰를 저버린 자들도 거기에 있었다. 돈 때문에 제 나라를 판 자, 법을 악용한 자, 법을 오늘은 이렇게 해석하고, 내일은 저렇게 해석한 자도 여기에 있었다.

익시온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도는 불 수레바퀴에 묶여 있었다.

시쉬포스도 있었다. 시쉬포스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려도, 그 바위는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다시 기슭으로 굴러 내려왔으니, 그는 그 돌을 다시 굴려 올리려고 영원히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었다.

탄탈로스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연못에 잠겨 있었다. 물은 그의 턱밑에 찰랑거렸으나, 마시려고 백발로 덮인 머리를 숙이면 물이 발밑까지 달아나 버렸으니, 그는 영원히 갈증을 면할 수가 없었다. 머리 위로는 배, 석류, 사과, 무화과 등이 달린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손을 내밀면 바람이 가지를 저만치 날려 손이 닿지 못하게 했다.



익시온과 시쉬포스, 탄탈로스

한 자리에 그려진, 영원히 불바퀴에 매달린 채 돌아야 하는 익시온,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쉬포스, 그리고 영원히 갈증에 시달려야 하는 탄탈로스.



시뷜레는 아이네이아스에게, 지겨운 곳은 그만 구경하고 축복받은 이들의 땅으로 가보자고 했다. 두 사람은 캄캄한 중간 지대를 지나 엘뤼시온으로 나갔다. 축복받은 사람들이 사는 극락정토의 숲이었다.

두 사람은 심호흡을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보랏빛 안개에 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그곳만 비추는 태양과 별이 따로 있었다.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삶을 즐기고 있었다. 파란 잔디 위에서 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힘과 솜씨를 겨루는 사람, 춤추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아를 창건한 국조()들을 보았다. 모두 보다 나은 시대를 살던 고결한 영웅들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더 이상 쓰일 일이 없어 그곳에 조용히 놓여 있는 당시의 이륜차나 번쩍거리는 무기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쓰던 창은 대지에 박혀 있었고 마구()에서 풀린 말은 들판을 뛰놀고 있었다. 그 같은 무기를 다루었고, 그런 말을 길들였다는 영웅들의 자존심은, 저승에서도 조금도 빛 바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진수성찬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월계수 숲에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인간 세상으로 흘러가는 포 강의 발원지였다. 그곳에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이들, 순결을 지켰던 사제(), 아폴론 신의 예언을 노래했던 시인들, 유익한 기술상의 발명으로 인간의 삶을 고무하고 다채롭게 했던 사람들, 그리고 인류에 봉사함으로써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 눈같이 흰 띠를 매고 있었다.

시뷜레는 그들에게 어디로 가면 안키세스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간 시뷜레와 아이네이아스는 곧 푸른 나무 우거진 골짜기에서 안키세스를 발견했다. 안키세스는 그 골짜기에서, 자손들에 관한 일, 그들의 운명 그리고 장래 그들이 이룰 위업을 묵상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아이네이아스를 알아본 안키세스는 두 팔을 벌리고,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맞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오느냐? 올 줄 알고 기다렸다. 위험이 첩첩이었을 텐데 용케 찾아왔구나. 이 아비는 네 여로()를 지키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잿더미가 된 트로이아를 떠나는 안키세스

안키세스는 이탈리아 반도로 가는 도중, 시실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이네이아스는, 그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만나러 저승에 와 있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F. 바로키의 그림.




아이네이아스가 대답했다.
「아버님, 아버님 모습이 늘 앞에서 저를 지키고 인도하시더이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껴안았다. 그러나 그의 품에 안긴 것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뿐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눈앞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나무가 산들바람에 흔들릴 뿐, 참으로 조용한 곳이었다. 그 골짜기를 망각의 강 레테가 흐르고 있었다. 강둑에는 참으로 많은 군중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름 하늘을 어지럽게 나는 날파리 떼만큼이나 그 수가 많았다. 아이네이아스는 그 엄청난 숫자에 놀라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았다. 안키세스가 대답했다.

「때가 오면 육체를 얻을 영혼들이다. 뼈와 살을 얻을 때까지는 저 레테 강변에 살면서 그 물을 마시고 전생을 잊고자 하는 것이야.」

「아버님, 이렇게 평온한 곳을 버리고 상계()로 가고 싶어할 만큼 뜬세상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안키세스는 천지창조의 줄거리를 설명하면서 아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창조주는 맨 처음 영혼을 구성하는 소재를 창조했다. 불과 공기와, 흙과 물, 이 네 원소가 그것이다. 이것을 통합하자, 가장 놀라운 요소 곧 불의 형상을 얻은 〈불꽃〉이 되었다. 이 불꽃이 태양, 달, 별 같은 천체 가운데에 씨앗처럼 뿌려졌고, 하급신()들이 이 씨앗으로 인간을 비롯한 동물을 창조했다. 이 창조 과정에 흙이 들어가는데, 많이 들어가고 적게 들어가는 데 따라 그 순수성이 달라진다. 구성 요소 중 흙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으면 덜 순수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듯이, 남자든 여자든 육체가 성숙해서 어른이 되면 아이 적의 순수성을 지닐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육체의 불순물은 영혼으로 그 자리를 옮긴다. 그러니 이 불순물이 사후에 정화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불순물만을 태워 버리는 방법이 있다(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만). 곧장 이 엘뤼시온으로 들어와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이 불순물을 정화한 뒤, 레테 강에다 전생의 기억을 말끔히 씻고, 새로운 육신을 얻어 지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야. 그러나 개중에는 인간의 육신을 받기에는 너무 더러워진 영혼도 있다. 이러한 영혼들은 사자나 호랑이나 개나 원숭이 같은 동물로 환생한다. 이것이 바로 〈매템프쉬코시스(metempsychosis)〉, 곧 영혼의 윤회전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도의 원주민들은 아직도 이런 관념을 신봉하고 있다더라. 그래서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도 자기 친족이 윤회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이다.」

안키세스는 설명을 마치자, 앞으로 태어날 아이네이아스의 자식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그들이 지상에서 이룰 위업이 어떤 것인지 들려주었다.

예언이 끝나자, 화제를 현재 시점으로 돌려, 아이네이아스 일행이 이탈리아에 완전히 정착하기까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곧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고, 신부를 맞을 것이며, 트로이아 인들의 나라가 서고, 그 나라에서 로마의 권세가 비롯되어, 이윽고 세계의 주권국이 되리라고 예언한 것이었다.

아이네이아스와 시뷜레는 안키세스와 작별하고 지름길을 통해 지상으로 돌아왔다. 베르길리우스도 이 지름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뷜레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2009. 6. 19., 토마스 벌핀치, 이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