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권순일 대법관의 퇴임

道雨 2020. 9. 2. 10:35

권순일 대법관의 퇴임

 

 

대법관 전원이 참여해 사건의 결론을 내는 전원합의체의 ‘표결’ 방식은 독특하다. 심리를 마친 뒤 ‘전입 막내’부터 순서대로 의견을 내기 시작한다.

대법관 12명이 참여한 이재명 경기지사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에서는, 권순일 선임대법관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의견 표명만 남겨놓고 유무죄가 5 대 5로 맞섰다. 승부를 결정지은 건 6번째 무죄 의견을 밝힌 권 대법관이었다. 대법원장은 다수 의견에 서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권순일이 이재명을 살렸다’는 얘기가 나온 이유다.

 

“권순일 대법관이 왜 그랬을까?”

누군가 내게 물었다. 보수적인 정통 엘리트 법관이 ‘의외의 선택’을 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답으로는 으레 권 대법관의 진보적 판결이 소환된다. 지난 6월 그는 미혼부가 낸 출생신고 신청을 받아들여 ‘인간으로 인정받을 아동의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다움을 요구했던 그동안의 관행에 경종을 울린 성인지 감수성 개념을 대법원 판결문에 처음 적시한 이도 권 대법관이었다. 법조계 안팎에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권순일의 재발견’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지만, 한 고위법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아동·여성·장애인 이슈에서는 진보적인 듯한 결정을 하기도 했다. 권 대법관이 엘리트이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겠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시키는 대로 잘해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 대법관을 향한 내부의 싸늘한 시선은 사법농단 이력 때문이다. 그는 2012년 8월부터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일했다. “하나같이 다 챙겨서 행정처 판사들이 다 힘들어했다”(한 판사)고 한다. 위로는 박병대 처장, 아래로는 임종헌 기획조정실장이 있었다.

양 전 대법원장 공소장에는 권 대법관의 이름이 14차례 등장한다. 사법농단 문건의 보고·결재라인으로만 거론된 게 아니다.“피고인 양승태는 차한성·권순일 등과 공모하여, 그 직권을 남용하여 인사심의관들에게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 및 대법원의 입장과 배치되는 ‘튀는 판결’을 하여 사법행정에 부담을 준 판사들에 대한 변칙적인 징계…”

이른바 ‘물의 야기 법관’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준 직권남용 사건에서 권 대법관과 양 전 대법원장은 공범이다.

 

검찰은 또 그가 행정처 차장으로서 강제징용 대법원 재판 지연을 청와대와 협의했다고 봤다. 박근혜 대통령의 관심 사건이었던 지엠(GM)의 통상임금 소송 대법원 판결 전날엔 청와대를 방문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범행이 구체화하고 본격화해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 전에 보직 이동으로 범행에서 이탈한 점을 고려했다”며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보직 이동’이란 대법관 영전이다. 행정처 차장으로 2년 동안 일한 그를 양 대법원장이 대법관으로 제청했고, 2014년 9월 박 대통령이 임명했다.

 

형사처벌 직전까지 몰릴 정도로 사법농단에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지만, 권 대법관은 아무런 불이익을 겪지 않았다. 대법원이 추리고 추려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사법농단 판사 10명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동원·노정희 대법관은 부장판사 시절, 대법원의 재판 개입 ‘객체’ 격으로 사법농단 재판의 증인으로 소환됐지만, 권 대법관에게는 이럴 일도 없었다.

 

헌법·법률을 위반한 판사의 자격을 박탈하는 탄핵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국회 재적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가결되는 게 판사 탄핵소추안이지만, 20대 국회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의석수 부족을 핑계로 미적대더니, 슈퍼여당이 된 뒤에는 ‘탄핵의 탄’ 자도 꺼내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흘러 권 대법관은 이달 8일, 6년 임기를 꽉 채워 퇴임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재판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사법농단 판사의 안온한 은퇴가 판사들에게, 시민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의 퇴임사가 궁금해진다.

 

 

김태규 ㅣ 법조팀장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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