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조선전기 최대 왜란, 을묘왜변의 영웅들

道雨 2020. 9. 3. 15:14

조선전기 최대 왜란, 을묘왜변의 영웅들

 

1. 조선전기 최대의 왜란, 을묘왜변

 

* 이준경 선생 영정. 윤원형이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후 영의정이 되었으며, 자신의 아들이 홍문관 관리 후보로 올라오자 이를 삭제할 정도로 청렴 공정한 인물이었다. 사진출처 경기일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인 1555년 5월 11일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조선은 1392년 개국 후 국력이 확장되고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루며 세종대왕 때는 쓰시마섬을 공격하는 등 국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난 16세기 들어 왜구들은 일본 본토가 전국시대의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식량을 구하기가 힘들어 명나라나 조선의 해변을 습격하였다. 조선에서는 경상도 지방을 침략하여 사량진왜변, 삼포왜란 등을 일으켰다. 조선은 왜구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이에 대한 조치로 중종 명종 때에 세견선(무역선)의 허락을 대폭으로 줄여 왜구들에 대응하였으며, 명종 때는 25척만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에 대한 항의로 왜구들이 70여척의 배로 출몰하여 장흥 강진 진도 영암일대를 공격한 것이 을묘왜변이다.

왜구들은 다량포와 이포(두 고을은 옛날에는 영암에 속했으나 현재는 해남군에 속함)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다량포에는 고작 20여명의 상주병력이 있었다. 왜구들은 70여척의 배를 타고 왔으나 11척만 먼저 오고 나머지 병력은 나중에 뒤따라옴으로써 병력을 속이는 전술로 조선군을 교란하였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이 장흥, 영암의 병력을 이끌고 다량포로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였으나 원적이 피살당하고 장흥부사 한온도 전사하였으며, 영암군수 이덕견은 항복해 포로가 되는 등 정규군이 붕괴되었다. 이에 왜구들은 장흥, 강진, 진도를 짓밟아 병기와 군량을 털었으며 지금의 영암지역에도 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문인이었지만 지휘능력이 뛰어났던 이준경을 전라도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김경석과 남치근 등의 무인을 파견하여 총지휘를 하도록 하였다. 영암으로 내려온 이준경은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고 왜구가 상륙한 주변에 주둔하면서 왜군의 진로를 막고 왜구가 후퇴하면 따라가는 등 왜구를 몰아내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그러자 왜구들은 강진과 영암지역의 조선군을 공격하였는데, 영암지역에서는 민심을 수습하고 군민들을 단결시켜 대응하여 왜구들을 물리쳤다. 100명이 사살을 당하자 피해를 입은 왜구들은 철수를 하게 되었으며 돌아가는 길에도 조선군의 습격을 당하였다.

이후 쓰시마 영주가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며 사죄하자 왜구의 침입을 통제할 것을 조건으로 5척의 세견선을 허락하게 되었으며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게 되었다.

이준경이 을묘왜변의 전공자로 알려진 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을묘왜변 관련 인물로 양달사, 정걸, 변협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을묘왜변의 영상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2. 을묘왜변의 영웅1> 조선 최초의 의병, 양달사 장군

 

* 을묘왜변의 가장 큰 전승지 영암읍성. 양달사 장군은 동생 양달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이준경을 도병마사에 임명하여 왜적을 물리치도록 하였다.

양달사 장군은 영암출신의 무신으로 무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진해현감 및 남해현감으로 활동하던 도중 어머니가 별세하자 삼년상을 지내기 위해 영암도포면으로 돌아와 기거하였다. 어머니 삼년상을 지내던 중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있어 삼년상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기에 양달사는 충과 효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동생 양달수와 함께 힘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싸우기에 이른다.

당시 상황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다량포와 이포가 함락되었고 왜구들은 평지에 위치해 있는 영암향교에 진을 치고 들어와 지내며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 회장에 따르면 계속 왜구에게 패한 조선군은 왜구들을 두려워 하며 전쟁하기를 기피하였다. 도방어사 김경식은 이런 상황에서 성안에서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하였으며, 겁이 나 밖으로 나가 싸우지 못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이 재촉하자 겨우 싸우러 나가는 것을 허락하기만 하고 자신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안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영암에 양달사와 관련된 유적지로 양달사 어머니 묘소가 전해져 내려오고, 장독샘이라는 샘이 있는데 이것은 영암성 안에 있던 우물로 의병들이 물이 없어 사기가 저하되던 중 양달사가 장독기로 친 곳에 땅을 파자 샘물이 나와서 물을 마시고 싸워 전쟁에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온다.

임진왜란 후 선조 때부터 줄곧 영암군민들이 양달사가 의병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영암군민들이 주축이 되고, 호조판서에서 도순찰사로 임명된 이준경(이준경과 이윤경은 형제지간이다.)이 이들을 이끌어 왜구를 토벌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나가서 전쟁에 앞장 선 것은 무인출신이었던 양달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양달사는 광대와 패랭이들로 농악대의 일종인 창우대를 조직하고 향교의 왜구들이 보이는 곳에서 온갖 굿을 하여 여기에 정신이 팔린 왜구들을 역고개 넘어온 병사들과 성에서 나온 군사들이 협공하고, 뒤에서 성안의 노소 백성들도 징과 꽹가리를 치며 의병의 뒤를 따라 왜구를 공격하여 적의 예봉을 꺾고 적군을 크게 이겨 110여명의 왜구들의 목을 베자 왜구들은 물러났으며, 조선군은 물러나는 왜적을 공격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조복전 회장에 의하면 패한 적군이 다시 군사를 모아 영암성을 공격하였는데 한편에서는 싸우고 한편에서는 퇴각하던 중 양달사 장군이 적군에게 쫓기다 말이 진흙구덩이에 빠졌고, 왜장이 창을 던졌는데 양달사 장군은 이를 피하였고, 말은 칼을 맞고 거꾸러졌다고 한다. 양달사는 이에 성안으로 도주하여 만호 박천추의 말을 빌려타고 왜군들을 이 금교의 진흙벌로 유인하였고, 적들이 진흙구덩이에 빠지자 말을 돌려 적군들을 칼로 쳐 죽였다고 한다.

양달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묘소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내느라 자신의 공을 챙기지 못하였고, 모든 공적은 이준경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전쟁 때 입은 창상 때문에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에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 선조임금 때 영암군민들의 건의로 양달사의 공적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3. 을묘왜변의 영웅2> 정걸장군

 

* 전남 고흥군 포두면에 있는 정걸 장군 사당.  안동사(安洞祠). 을묘왜변에서 왜적들의 선박을 소탕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의 부탁으로 노구를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여 정신적 멘토역할을 하였다.

정걸 장군은 전남 고흥 포두면 출신으로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의 6세손이다. 정극인은 단종이 폐위되자 아들에게 해가 끼칠까 두려워 큰 아들은 고향인 태인으로 보내고 작은 아들 정칠현을 흥양현 지금의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로 이사를 보냈다.

정걸은 을묘왜변에서 외적을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78세 노령의 나이로 이순신을 도와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이순신 장군의 중요한 참모장수로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를 역임한 경험을 살려 이순신 장군의 멘토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판옥선의 건조와 화포의 정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행주산성에서 왜적과 싸움에서 화살이 떨어질 무렵 한강 배 세척 가득 화살을 싣고 와서 화살을 공급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에 큰 역할을 했으며 수군의 등장은 행주산성의 왜군들을 교란시키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걸은 1544년 30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서북면 등에서 근무하고 을묘왜변이 발발하자 해남 강진 등지에 출몰한 왜구를 무찌르고 공을 세워 남도포만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료가 충분치 않아 정걸이 을묘왜변에 어떻게 가담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영남이순신장군연구소, 백두대간 의병답사회, 의병정신 선양회에서 남긴 글에는 이준경과 함께 녹도와 제주도에서 왜적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준경이 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정걸을 데려올 때 수군을 함께 이끌고 왔을 때 함께 내려와서 녹도(지금의 전남 고흥 녹동)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의 왜구들과 싸워 육지의 전투에 협력했을 가능성이 있다. 녹도에서 왜적을 물리쳤다면 녹도쪽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았거나 육지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왜적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왜적을 물리쳤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1차 침략에 실패한 왜구들이 그 해 6월 27일에 왜구들의 근거지로 삼고자 제주읍성을 침략한 일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2차 침략에서 1000여명의 왜구들이 3일간 제주읍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이때 김성조를 비롯한 돌격대의 공으로 왜구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향토문화전자대전)

3. 을묘왜변의 영웅3> 변협 장군

 

왜구들의 침입에 모두가 무너졌지만 변협만은 무너지지 않고 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여 심은 소나무이다. 지금은 해남군청 청사 앞에 위치해 있다.

변협은 을묘왜변에서 공을 세운 또 다른 인물이다. 변협은 묘소도 남양주에 위치하여 남양주가 고향으로 보이며 무과에 급제하고 해남현감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을 받았다. 다량성과 이포를 습격하며 승승장구하던 왜구들도 변협이 있던 해남은 정벌하지 못했으며 변협은 소수의 군사로 왜적들을 물리쳤다. 해남에는 변협이 성을 방어한 것을 기리는 수성송이 남아 있다고 한다. 변협은 해남현을 지킨 공로로 장흥부사로 승격되었다.

변협은 왜구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왜구들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명나라 사람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과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이후 변협은 제주도에 목사로 부임하여, 문정왕후 사후 제주로 귀양을 간 승려 보우를 조정 유신들의 비답에 따라 처형한 것으로 유명하다. 변협은 그 뒤로도 공을 많이 세워 선조임금의 신임을 받았는데, 임진왜란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에 사망하였다. 선조임금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신립장군을 파견하였는데, 신립이 왜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보고 변협이 없음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변협은 을묘왜변 이후로 정해왜변 때는 전라우방어사가 되어 녹도와 가리포의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파주목사로 재직할 때 이이로부터 주역계몽을 강론받고 천문, 지리, 산수에도 정통하였던 인물이다.

[출처] 조선전기 최대 왜란, 을묘왜변의 영웅들|작성자 사랑하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