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을묘왜변, 임진왜란의 영웅 : 정걸 장군에 대하여

道雨 2020. 9. 3. 15:32

을묘왜변, 임진왜란의 영웅 : 정걸 장군에 대하여 

 

정걸(丁傑, 1514년 ~ 1597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수군절도사 선배로서 나이도 31살이나 연상인 고령임에도 많은 활약을 했다.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이다. 본관은 영광.

 

생애

1514년 전라도 흥양현(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태어났다. 1544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선전관, 서북면 병마만호를 역임했다.

을묘왜변 때 해남·강진 등지에 출몰한 왜구를 무찌른 공을 세워 남도포 만호가 되었다. 이후 부안현감, 온성부사, 종성부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 장흥부사, 전라병사, 창원부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78살의 노장으로 전라좌수군의 조방장이 되어,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을 도왔다. 행주대첩과 서울 탈환전에도 충청수사로서 수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1593년 전라도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7년 8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영광군수를 지냈던 아들 정연(丁淵)과 손자 정홍록(丁弘祿)도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고 한다.

 

사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861-1) 안동사(雁洞祠)에 배향되었다.

2015년 전남 고흥에 주둔하고 있는 31사단 예하 향토부대가 정걸의 업적을 기리고자 부대명칭을 정걸대대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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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임진왜란의 영웅 정걸 장군

 

정걸 장군은 전남 고흥 포두면 출신으로,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의 6세손이다. 정극인은 단종이 폐위되자, 아들에게 해가 끼칠까 두려워, 큰 아들은 고향인 태인으로 보내고, 작은 아들 정칠현을 흥양현 지금의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로 이사를 보냈다.

 

정걸은 을묘왜변에서 외적을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78세 노령의 나이로 이순신을 도와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이순신 장군의 중요한 참모장수로,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를 역임한 경험을 살려, 이순신 장군의 멘토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판옥선의 건조와 화포의 정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적과 싸움에서 화살이 떨어질 무렵, 한강 배 세척 가득 화살을 싣고 와서 화살을 공급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에 큰 역할을 했으며, 수군의 등장은 행주산성의 왜군들을 교란시키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걸은 1544년 30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서북면 등에서 근무하고, 을묘왜변이 발발하자, 해남 강진 등지에 출몰한 왜구를 무찌르고 공을 세워 남도포만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료가 충분치 않아 정걸이 을묘왜변에 어떻게 가담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영남이순신장군연구소, 백두대간 의병답사회, 의병정신 선양회에서 남긴 글에는, 이준경과 함께 녹도와 제주도에서 왜적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준경이 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정걸을 데려올 때, 수군을 함께 이끌고 왔을 때, 함께 내려와서 녹도(지금의 전남 고흥 녹동)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의 왜구들과 싸워 육지의 전투에 협력했을 가능성이 있다. 녹도에서 왜적을 물리쳤다면, 녹도쪽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았거나, 육지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왜적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왜적을 물리쳤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1차 침략에 실패한 왜구들이 그 해 6월 27일에 왜구들의 근거지로 삼고자 제주읍성을 침략한 일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2차 침략에서 1000여명의 왜구들이 3일간 제주읍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이때 김성조를 비롯한 돌격대의 공으로 왜구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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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영웅' 정걸 장군을 아십니까?

 

고흥은 옛 지명이 흥양으로, 사면이 거의 바다를 끼고 있어, 전라도좌수영 5관 5포 중에 1관(흥양)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를 차지하고 있는 군사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1591)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주로 고흥지역에 있는 1관 4포를 순회하며, 군비확충 및 판옥선을 개조해서 거북선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1관 4포의 전력은 판옥선 11척과 발포진에 거북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수군 병력은 1100∼1400여 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왜선 330여 척을 격파한 공훈이 이순신 장군에게 모두 돌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아군 사상자 211명 중 131명이 고흥출신 수군들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도운 70대 노장

 

한편 이순신 장군과 함께 활약했던 정걸(丁傑) 장군은, 그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사가(史家)들은 철저히 외면하거나 은폐 축소시켜 왔고, 더 나아가 중학교 국정 국어교과서나 '해군군사연구실'에 발간한 <임란수군활동연구론>에 정걸 장군 이름을 정걸(鄭傑)로 잘못 기재하는 등, 임진전란사를 왜곡시킨 부분들이 발견되고 있다.

 

정걸 장군은 1514년에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30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현감, 전라좌·우수사와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아, 이순신,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다.

 

1592년 4월 14일 왜군에 의해 부산진이 맥없이 무너지면서, 경상도우수사였던 원균이 이순신 장군에게 전라도수군을 급히 경상도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쉽게 결정을 내릴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녹도만호 정운(鄭運) 장군과 지도만호 송희립 장군이 나서서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야 이곳도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전라좌수영을 텅 비워두고 출전하게 된다.

 

5월 7일 정오부터 시작된 옥포해전은 흥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발포만호 황정록 장군 등 1관 4포 장수들과 수군들이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모두 참전하게 되는데, 이 때 정걸 장군은 경장(조방장, 조전장)의 임무를 부여받고, 이순신 장군에게 많이 협력한 사실들이 '호남절의록'에 보면 "새벽 전투에서 정걸 장군이 또 와서 협력하고 싸워서 적을 막고 호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걸 장군이 사천포해전은 참전하지 않고 본영(전라좌수영)을 지켰다는 내용이 '이충무공전서'에 보면 "이순신의 군관 전만호와 윤사공을 유진장으로 정해두고, 조방장 정걸은 좌도(전라)의 각 진과 포구를 지휘할 사람이 없으므로 흥양현(고흥군)에 머물러서 사변에 대비하여 호응하도록 하고서, 5월 29일 홀로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우후 이몽귀와 함께 한 걸음 앞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 머물러 있는 왜선 73척을 한산도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을 써서 왜선 59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둔다. 이 때 정걸 장군에 대해 '충무공전서'는 "정걸은 왜적과 싸우다가 포탄을 맞아 전상을 당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9월 2일 부산포해전은 왜선 500여 척과 맞서 싸워 100여 척을 격파하여, 해상을 완전장악하고 왜군 보급로를 차단시켜, 왜군들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정걸 장군에 대해 '이충무공전서'에는 "남쪽 해안의 세 수군절도사(이순신, 이억기, 원균), 조방장 정걸 등은 연합작전을 펴서, 왜적을 모두 물리치고 적의 북진을 완전히 차단한 전과를 올렸으나, 이 작전에서 정걸 장군의 말을 듣지 않은 정운(鄭運)이 전사한 손실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녹도만호였던 정운 장군 전사에 대해 "우리 함대가 부산으로 진군했는데, 특히 녹도만호 정운과 조방장 정걸의 군사가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자 정걸은 정운에게 날도 저물고 적의 기세가 등등하니 후퇴했다가 내일 다시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도, 정운은 크게 노하며 적과 더불어 같이 살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그대로 적진 속으로 뛰쳐 들어가 싸우다가 왜적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죽었다"고 기록했다.

 

배로 화살 날라 행주대첩 승리 공헌

 

정걸 장군은 옥포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등에서 대승을 거둔 견인차 역할을 하고도 일체의 공훈을 탐하지 않고, 또다시 충청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 때(1593년 2월경) 행주산성에서는 평양에서 퇴각한 왜군 3만여 명의 병력과 권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 병력이 서로 밀고 밀리면서 대혈전을 벌인다.

 

행주대첩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 낸 정걸 장군에 대해 '선조실록'에는 "그 날 묘시에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고 했고, '연려실기술'에는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되어 진중이 위기인데, 정걸이 배 두 척에다가 화살을 실어와서 같이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정걸 장군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권율 장군, 김천일 장군과 함께 왜적을 섬멸하러 나섰지만, 오히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방해가 된 사실들이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관군이 기내(서울, 경기도)에 나누어 웅거하면서, 권율의 군사를 위시하여 수시로 적을 공격하니, 왜적이 멀리 나가 땔감을 구할 수 없었다. 창의사 김천일, 전라수사 이빈, 충청수사 정걸이 수군을 이끌고 한강어구에 진격하여, 하삼도의 관군과 의병이 왜적의 진로를 차단함으로서 적의 기세가 점점 꺾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사가 이미 멀리 물러가서 대대적으로 진공할 수 없었음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한스럽게 여겼다."

 

이렇게 힘겨운 싸움 끝에 1593년 4월 20일 서울을 탈환한 정걸 장군은, 한강으로 도망가는 왜적을 끝까지 쫓아가 섬멸하자, 이에 겁먹은 왜적은 화의편지를 보낸다.

 

'임진전라사'에는 "왜장 소서행장은 화의를 위해서 현소를 시켜 김지귀, 김선경 등을 용산에서 만나보도록 하였다. 그래서 한강에서 만나 본 이들은 아무런 책임이 있는 인물이 아니므로 소서행장의 뜻만 전달하고, 2통의 서신 중에서 1통은 조선예조인 윤근수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1통은 충청수사인 정걸이 거느리고 있던 조선수군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이 때 도체찰사 유성룡은 동파에 있었는데, 정걸로부터 이 서신을 받아보고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것을 곧 부총병 사대수에게 보내고 말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소서행장이 정걸 장군에게 보낸 화의 편지가 유성룡에 의해 조정에 전달하지 않고, 오히려 명나라 군대에게 정보를 유출함으로서 조정이 명나라 군대의 수중에 들어가게 만들고, 왜적들은 쉽게 도망가도록 퇴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충청수군 이끌어 한산도에서 이순신 도와

 

5월 초순 서울에서 퇴각하는 왜적들이 남해안쪽으로 집결하자, 이순신 장군은 정걸 장군의 도움을 요청하는 긴급한 장계를 두 차례 올린다.

5월 10일에 보낸 장계 내용은 "삼가 아뢰옵니다. 도망가는 적을 섬멸해야 하는 이 때, 병력이 극히 외롭고 약함은 참으로 딱하고 걱정되는 바이기도 하며, 또한 적의 도망해 돌아감이 더딜지 빠를지 예측하기도 어렵사오니, 엎디어 청하건데 충청도 해군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뒤따라와서, 힘을 합해 적을 무찔러 하늘에 닿는 치욕을 씻게 하소서"라고 쓰여 있다.

 

6월 1일 한산도에 도착한 정걸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합세하여 한산도를 지키자, 왜적들은 이에 놀라 창원에서 함안을 거쳐 성영으로 퇴각을 한다.

이를 지켜본 이순신 장군은 장계를 올리기를 "전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의 진중에 머물렀다고 들었다. 이 분에게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할 것이다"라고 높이 치하했다.

 

12월경 전라방어사로 부임한 정걸 장군은 남서해안을 오가며 왜적토벌에 나섰는데, '호남절의록'에 보면 "정걸 장군은 전선의 갑판을 弓자형으로 만들고, 철로 만든 불화살과 큰대포 등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고 쳐부수니, 적들은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서로 놀래 도망갔다. 선무원종공신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정걸 장군은 1595년에 모든 관직에서 퇴임하자, 선조 임금은 정걸 장군과 말년까지 함께 지낼 선비 6명을 하사하고, 7인정을 세운다.

 

83세로 순절... 기념비조차 남아 있지 않아

 

포두면 길두리에 세워진 7인정은 조선 말까지 있다가 없어졌으며, 정걸 장군은 귀향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 향년 83세 일기로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정연은 영광군수를 지내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흥에서 의병을 모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전투에서 1598년에 순절하였고, 그의 손자 정홍록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흥덕전투에 참전했다가, 1599년에 순절하여, 3년 동안 3대가 순절하고, 마지막 남은 증손자 정엽이 성장하여, 독자 집안 손을 400여 년간 이어내려 오고 있다.

 

정걸 장군의 13대 자손인 정종욱(74)옹은 많은 유품과 유물이 사라진 것에 대해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이 우리 집안을 보복할까 두려워 그 많은 유품들을 모두 불태웠다"며 "우리 후손들이 못났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정걸 장군이 누워 있는 묘소는 기념비조차 없이 초라하고, 그 주변은 석산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면, 400여년 전의 역사는 이대로 묻히는 걸까?

 

오마이뉴스 / 김성철 기자

 

 

정걸 장군의 약력

1514년(중종5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출생

1544년(중종39년) 무과급제

1553년(명종8년) 서북병마만호(평안북도 의주)

1555년(명종10년) 남도포 수군만호(전남진도)

1556년(명종11년) 부안현감

1561년(명종13년)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1년) 종성부사

1572년(선조5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577년(선조10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578년(선조12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581년(선조14년) 절충장군

1582년(선조15년) 장흥부사

1583년(선조16년) 전라도병마절도사

1584년(선조17년) 창원부사

1587년(선조20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

1592년(선조25년) 전라좌수영 경장(임진전란 발발)

1592년(선조25년) 충청도수군절도사

1593년(선조26년) 전라도방어사

1597년(선조30년) 83세 일기로 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