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무엇’과 ‘왜’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

道雨 2021. 6. 7. 10:01

‘무엇’과 ‘왜’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

 

 

‘무엇’, ‘왜’, ‘어떻게’ 가운데 어떤 게 가장 중요한가를 놓고 많은 이들이 많은 말을 남겼다. 물론 정답은 없다. 각 분야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왜’가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글쓰기와 관련된 조언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1970년대 이후 사회과학에서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어떻게’라는 물음만 남았다”고 개탄했는데, 진보적 사상가들은 대체적으로 ‘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임상심리학자 에른스트 푀펠은 “항상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하는 이성에 대한 중독증은, 그 자체로 질병이 아니라면 편협함의 신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회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조언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렇듯 분야나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과유불급의 원리다. ‘무엇’, ‘왜’, ‘어떻게’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게 좋다는 뜻이다. ‘무엇’이나 ‘왜’를 앞세우더라도 ‘어떻게’에 실패하면 ‘무엇’이나 ‘왜’의 의미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학문 세계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과 씨름을 해야 하는 정치·행정의 세계에선 더욱 그렇다. 물론 정치·행정도 가치와 비전을 필요로 하므로 ‘무엇’과 ‘왜’를 중시해야 하지만, ‘어떻게’에 실패하면 ‘무엇’과 ‘왜’는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이 직원들에게 보고서를 작성할 때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어떻게’를 보고서에 담으라는 주문을 했다는 뉴스에 접하면서 해본 생각이다. 이 수석의 주문에 적극 동의하며 지지를 보낸다. 나는 평소 문재인 정권이 ‘무엇’과 ‘왜’엔 강하거나 능하지만 ‘어떻게’엔 소홀하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문 정권을 가리켜 ‘작은 정부’와 ‘시장 만능주의’를 추구한 정권이라고 하면 동의할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게다. 그러나 의도는 정반대였을망정 결과적으론 그런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 애쓴 정권이라고 하면 다시 생각해볼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지난 3월2일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이 제기된 이후, 최근의 ‘세종시 공무원 특별공급 아파트 사태’에 이르기까지, 약 100일간 우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질리도록 감상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행정은 ‘사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에 불과하다는 속설을 확인하면서, 분노와 개탄을 쏟아내지 않았을까?

 

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무엇’과 ‘왜’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의롭고 아름다웠다. 누가 감히 문 정권의 선의를 의심할 수 있으랴. 그러나 선의만 흘러넘쳤을 뿐 ‘어떻게’에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했고 무능했다.

부동산 정책은 일단 ‘욕망에 불타는 시민’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물론 공기업 직원과 공무원도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전제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역효과’를 예방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이건 대단한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식 중의 상식이 아닌가. 그러나 ‘선의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문 정권엔 그런 상식이 없었다.

 

문 정권이 협치를 거부하는 이유도 ‘무엇’과 ‘왜’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과 ‘왜’는 가치와 비전의 영역이므로 협치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협치는 사실상 ‘어떻게’의 영역에서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부동산이나 일자리 등과 같은 민생 문제는 대부분 ‘어떻게’와 관련된 것이다. ‘어떻게’에도 이념과 가치가 끼어들 순 있지만,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한 것들에 숨어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디테일의 완성’을 위해선 귀를 활짝 열어야 하며, 특히 반대편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큰 정부’를 지향하면서 공무원 수를 대폭 늘린 것도 그렇다. 어떻게 기존 공무원 조직문화를 민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게끔 개혁할 것인지 이에 대해서도 적극 논의해야 하건만, 그런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이 또한 ‘어떻게’를 무시하는 버릇 탓이다.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큰 정부’와 ‘공공부문 강화’가 ‘어떻게’에서 실패하면, ‘작은 정부’와 ‘시장 만능주의’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꼴이 되고 만다. 문 정권이 ‘무엇’과 ‘왜’에 경도된 만큼, 의도적으로 ‘무엇’과 ‘왜’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를 중시하는 발상의 전환이, 청와대 정무수석실을 기점으로 문 정권 전반에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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