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부족주의 진영논리가 반정치 키운다

道雨 2021. 11. 29. 09:52

부족주의 진영논리가 반정치 키운다

 

 

최근 ‘반정치’나 ‘반정치주의’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그런데 각자 입맛에 맞게 쓰는지라, 글의 맥락을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정의를 내리면서 쓴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한겨레> 지면에서 만난 다음 두개의 정의가 반가웠다.

 
 
 
 

“반정치주의란 ‘정치를 혐오하고 경멸하며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냉소주의를 강화하는 태도나 경향’을 의미한다. 정치적 토론과 논쟁을 회피하며, 정치적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 반정치주의의 속성이다.”(김종구)

“반정치주의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만들고, 자본 기득권 세력, 분단 기득권 세력이 유포시킨 이데올로기입니다. 반정치주의에 감염된 사람들은 ‘정치에 기대를 걸 필요가 없다’거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합니다.”(성한용)

 

진보적 언론인들이 내린 반정치주의에 대한 정의인데, 너무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순수한 한국산 개념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서양인들이 쓰는 ‘anti-politics’의 의미로 쓰는 사람들도 많은지라, 반정치의 여러 용법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반정치는 주로 세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 의견의 차이와 토론을 용납하지 않거나 혐오하는 현상으로, 주로 애국주의, 독재주의, 군국주의의 형태로 표현된다.

둘째,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인해 축소지향적인 정치를 선호하거나 정치를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으로 간주하는 현상이다.

셋째, 기성 정치의 문제와 한계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를 모색하는 현상이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취임연설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기에서 정부가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정부 자체가 문제이다”라고 했는데, 모든 걸 시장에 내맡긴 이른바 ‘레이건 혁명’은 반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런 반정치는 두번째 의미의 것이지만, 국내에선 주로 이 정의를 택하면서도 첫번째 의미도 조금 담고 있는 강한 부정의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다.

 

세번째 의미의 반정치는 체코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이 긍정적 의미로 사용한 ‘반정치적 정치’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반정치적 정치는 권력의 기술을 조작하는 정치가 아니고, 인간을 인공두뇌적으로 지배하는 정치가 아니고, 공리와 실천과 책략의 기술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고 지키고, 인생의 의미에 봉사하는 정치를 말한다.”

 

우리의 관심사는 두번째 의미의 반정치다. 이 유형의 반정치를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득권 세력에 도전하는 진보좌파의 반정치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진보냐 보수냐 하는 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대적 상황이다.

 

1976년 미국 대선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는 노골적인 반정치 전략으로 승리했다. 유권자들은 단지 ‘감정상의 느낌’으로 투표했다는 게 밝혀졌다. 그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환멸감이었다.

“정치를 몰라도 좋으니 정직한 사람을 뽑고 싶다!” 유권자들의 이런 열망이 카터를 당선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런 반정치가 무능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도 가능하겠지만, 정치란 시대적 상황의 졸(卒)에 불과할 뿐이다.

 

영국 총리를 지낸 토니 블레어 역시 “내가 진정으로 정치에 몸담은 적은 없다. 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나는 스스로 정치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몸담은 노동당에서 ‘제3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한 말이었을망정, 이런 반정치는 진보좌파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8년간의 보수당 장기 집권을 끝내고 이후 13년간 노동당 집권 시대를 여는 데에 기여한 건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방적인 반정치 비판은 본의 아니게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유권자들의 정치불신과 혐오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형성된 것이다. 예컨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광풍 속에서 정부·여당을 믿었다가 날벼락을 맞은 무주택자가 정치를 혐오하면서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외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반정치를 옹호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반정치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게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그건 바로 부족주의 진영논리다.

이성을 억누르고 감성의 폭풍을 일으키면서, 온 사회를 진영 간 전쟁터로 몰아가는 건 부족주의 진영논리이지 반정치가 아니다.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부족주의 진영논리가 오히려 반정치를 키우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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