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끔찍한 패륜, 푸틴식 '하이브리드 전쟁'의 처참함

道雨 2021. 12. 7. 10:09

끔찍한 패륜, 푸틴식 '하이브리드 전쟁'의 처참함

 

동유럽 국경 인근에서 벌어지는 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본래 같은 민족이었다. 동슬라브어족에 기원을 둔 두 나라는, 13세기 키예프 공국의 붕괴 후 갈라져, 주변의 다양한 문화권과 교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왔다.

20세기 초 소비에트 체제의 주요 구성국으로 함께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1991년에 다시 갈라서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은 곧 소비에트 붕괴의 단초로 작용했다.

물론 소비에트 체제로의 합류 과정도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주적 결정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중의 자주적 결정을 말하기에 앞서, 우크라이나 국민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기에는, 구성원들의 역사 속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국토를 반으로 가르는 드네프르 강은 동서 지역 간의 미묘한 정서적 차이를 만들었다.


서안 지역은 폴란드 등 서 슬라브족의 영향권에 확연히 노출된 반면, 동쪽 지역은 러시아의 직접적인 간섭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2차 대전 중 독일과 러시아의 치열한 공방 과정에서도 드네프르 강은 중요한 전략적 변수로 작용했다.

이처럼 동서의 자연적, 역사적 격리는 21세기 들어서도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우크라이나가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에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정학적 배경을 누구보다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다.

우크라이나 쿠데타 준비하는 러시아? 

러시아는 최근 몇 달 전부터 1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으로 집결시켜 놓고 있다. 이달 들어서는 그들 가운데 1만여 명의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이 훈련은 돈바스 지역 등 접경지역과 남부 흑해, 크림반도 등 최소 6개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주권 지역에서 실시되는 통상적 군사 훈련이라고 강변하지만, 유럽과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사실 어느 지역에서나 평소보다 많은 군사를 국경지역에 집결시키는 것을 통상적이라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달 26일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현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폭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대로라면, 쿠데타 날짜가 이달 1~2일이었으나 실제로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는지, 혹은 계획된 거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가 전복 모의에 대해 날짜뿐 아니라, 관련 모의자들과 러시아 관계자의 통화 내용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러시아 측은 이에 대해 공식 부인하고 있다.

어떻든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이 현재 동유럽 러시아 국경 지역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푸틴의 승부수

2000년 5월 7일 48세 나이에 대통령직에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간에 총리를 지낸 4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17년이 넘게 대통령직을 연임 중이다. 그리고 현행 러시아 헌법은 그의 임기가 2030년까지 가능하도록 보장한다.

막강한 권력과 정보력을 쥐고 충분한 임기까지 보장된 푸틴 대통령은, 팬데믹으로 어수선한 서유럽을 향해 큰 승부수를 준비중이다. 그와 러시아를 향한 서방 세계의 제재와 압박을 제거할 수 있는 대응 수단으로 푸틴 대통령이 선택한 것은 바로 동유럽이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유럽 국가는 핀란드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여섯 개 나라다. 이 가운데 핀란드와 발트 3국은 유럽연합 회원국이니, 러시아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인 셈이다.
 

                               ▲ 루카셴카 벨라루스 대통령. 1994년부터 대통령이다. ⓒ wiki commons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사이에 위치한 벨라루스는, 소비에트 해체 이후 러시아와 멀고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해왔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재임 기간으로 따지면 푸틴 대통령보다 한 수 위. 94년 7월 20일 첫 임기를 시작한 그는 현재 대통령직을 연이어 6선째 수행 중이다.

지난해 9월 치러진 대선에서의 부정선거 의혹으로 루카셴코 대통령 역시 유럽연합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다. 동병상련일까? 루카셴코 대통령은 한때 적대적이던 푸틴 대통령에 대해 지금은 강한 연대감을 표명한다.

유럽연합의 압박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두 나라는 소비에트 해체 이후 어느 때보다 밀월관계다. 최근 폴란드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난민사태는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사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전에 없던 새로운 러시아의 전략이 포문을 열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의 맥락

2000년대 이후 유럽으로 향하는 아프리카와 서아시아 난민들의 주요 루트는 지중해였다. 그 길이 여의치 않자 터키를 넘어 그리스를 통한 길이 떠올랐으나 현재는 그나마도 여의치 않게 됐다. 유럽으로 가는 주요 길목마다 대규모 장벽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올해 시리아와 이라크 등 서아시아 국가들의 사회망에는 유럽을 향한 꿈을 접지 않은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정보들이 계속 올라왔다. 벨라루스를 향한 여행 조건이 대폭 완화됐다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실제 벨라루스 당국은 서아시아인들이 편도 항공편만 끊어도 여행비자를 손쉽게 발급해줬다.

물론 벨라루스가 그렇게 도착한 이들을 자국에 수용할 의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심지어 손쉽게 폴란드 국경으로 이들을 인도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기까지 했다. 벨라루스로 향하는 서아시아인들의 목적도 어차피 벨라루스에 머무는 데 있지는 않았기에, 그런 상황이 그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벨라루스에 도착한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결코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숙박비와 운송비에서는 바가지요금이 난무했고, 그렇게 향한 폴란드 국경지역에서도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도적 처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
 

 폴란드와 접경한 벨라루스 그로드노에서 16일(현지시간) 중동 출신 난민들이 폴란드 국경경비대와 충돌하는 가운데 한 난민 남성이 돌을 던지고 있다. 전쟁과 빈곤을 피해 중동에서 동유럽 국가 벨라루스로 건너온 이들 난민은 새 삶을 찾아 폴란드를 통해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가길 원하고 있다. 2021.11.17. ⓒ 연합뉴스

 

국경선 너머 폴란드 땅에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국경 수비대들이 사나운 개를 데리고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무리하게 국경을 건너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대부분은 국경선 난민으로 전락했다. 또 일부는 모든 재산을 날린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조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이들을 보호할 공권력은 도무지 지구 상에 없는 듯 보였다. 유럽연합과 나토 회원국들은 이 사태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고 믿고 있다. 물론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벨라루스를 향한 유럽연합의 경고에, 러시아는 폭격기까지 띄우며 벨라루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유럽연합이 이번 난민 사태를 벨라루스의 단독 행동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이제 유럽연합은 난민 사태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한 권위주의의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 유럽연합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그리고 서아시아 난민들이 벨라루스-폴란드 국경선까지 일사천리로 수월하게 이동하는 데까지 나타난 신기할 정도로 신속한 과정들이 모두 관련이 있다면, 유럽연합이 말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이 본격화되는 셈이다.



어쩌면 하이브리드 전쟁

하이브리드 전쟁이란,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정규군이 동원돼 상대방을 공격하는 전면전의 형태를 갖춘 전통적 의미의 전쟁이 아니라, 민간인을 이용해 사회혼란을 일으키거나, 정보통신 체계를 전자 바이러스 공격 등으로 마비시키는 등, 국방력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분야에서의 공격을 통한 전쟁을 말한다.

미국과 서유럽은 하이브리드 전쟁의 첫 사례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꼽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에서는 상당 기간 정규군 개입 없이 내부 혼란과 극도의 불안정 속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내란에서 친 러시아 세력이 승리를 거두면서, 그들 스스로 반도 전체를 러시아로 편입시켜 버렸다.

러시아는 정규군 동원 한 번 없이 영토를 얻은 꼴이 됐다. 물론 내란의 과정에서 친 러시아 세력에 장비와 자금을 제공한 것은 러시아였다는 정황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됐다. 반면 주권 침해 논란을 우려한 나토 회원국과 유럽연합은 적절한 대응 한번 취해보지 못한 채 러시아의 강제 영토 합병을 지켜봐야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민통합의 날'인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에 있는 러시아 내전(1917~1922년)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크림반도 병합의 정당성을 재차 주장해 우크라이나 측의 반발을 샀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주민투표를 근거로 이곳을 자국에 병합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실시한 주민투표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2021.11.4 ⓒ 연합뉴스

 

올해 벨라루스 난민 사태는 러시아의 또 다른 하이브리드 전쟁 전략 사례라는 것이 유럽연합과 미국의 시각이다. 그 시각이 정당하다면 궁지에 몰린 난민들을 상대국에 '살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해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패륜적 행위를 국가가 자행하는 셈이 된다. 차마 문명국가가 행할 수 있는 행위라고 믿기 어려운 행태들이,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인근에서 행해지고 있는 러시아의 군사훈련을 국제사회가 우려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면전 우려라기보다 우크라이나 내부에 있는 친 러시아 세력에 보내는 모종의 신호로 보이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