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용공(조작) 사건

[바로잡습니다] 수지김 사건, 아내 살해하고 환영 받은 '반공 투사'

道雨 2021. 12. 14. 11:32

아내 살해하고 환영 받은 '반공 투사'

[기획 - 바로잡습니다] 수지김 사건

 

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1987년 1월 8일 한국 신문과 방송에 북한의 납치를 피해 극적으로 탈출한 한 남성의 기사가 대서 특필되었다. 홍콩에 거주하는 윤태식씨가 아내 김옥분(일명 수지 김)씨가 포함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될 뻔했다가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1면, 북한공작원의 납치를 피해 탈출했다는 윤씨 기사. 1987. 1. 8

 

 
윤씨를 면담한 당시 싱가포르 대사와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현지 주재관은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는 윤씨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한국의 안기부에 보고했으나 당시 안기부(부장 장세동)는 1987년 1월 8일 제3국인 태국에서 윤태식의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당시 한국 언론은 '미인계를 이용한 북한 여 간첩에게서 가까스로 탈출'한 영웅담이나 활극처럼 기사를 보도했다.
 

홍콩교민 납북 중 극적 탈출

비디오제작업 윤태식 씨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서 보호
동거 여인 등 북괴 공작원 3명이 유고 거쳐 평양행 기도

'홍콩'에 살고 있는 교민 윤태식 씨(28. 비디오제작업)가 동거 여인도 포함된 북괴 공작원 3명에 의해 지난 3일 밤 '싱가포르'까지 유인되어 평양으로 납치될 뻔 하다가 5일 극적으로 탈출, 주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중략)

윤 씨는 이 같은 협박지령을 받은 후 도피를 결심,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5일 오후 '샹그릴라'호텔에서 조금 작은 호텔인 '코크피트'호텔로 옮긴 후 '유고'행 항공편 예약을 위해 이창용(북한공작원)과 함께 시내 여행사에 가서 항공편을 알아보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탈출기회를 노리던 중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

- 동아일보 1987. 1. 8. 1면

 

                             ▲  사망한 김 씨의 사생활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1987년 1월 8일 10면

 

 

김옥분 호스티스 생활...마카오 자주 출입

76년 홍콩인과 위장결혼 일 야쿠자와 접촉도
윤 씨는 작년 상사 직원으로 홍콩가 개인사업

홍콩교민 납북 중 탈출= 김옥분(25세 본적 충주시 ○○○ 999 홍콩 구룡 뉴테라스너스츠포드가 913a)은 지난 76년 7월 20일 홍콩인 양청화와 위장결혼 방식으로 여권을 취득 홍콩에 갔다. 김은 '홍콩'에 도착한 후 84년 1월 양과의 사이에 ○○라는 딸을 낳았다. 김은 '홍콩' 생활 중 한국 술집인 '코리아가든' '리무진' '가림' 등에서 '수지 김'이라는 이름으로 호스티스생활을 했다. 김은 이 생활을 통해 일본인 고객들을 주로 상대하면서 일본어를 습득하고 비교적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동아일보 12면 1987. 1. 8

 


윤씨는 귀국 인터뷰에서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것처럼 이야기했다.
 

살아 돌아온 게 꿈만 같다

납북탈출 윤태식 씨 어제 귀국

납치 당시의 충격으로 심장에 통증을 느낀다며 30여 분간의 회견 도중 계속 가슴을 쓸어내린 윤 씨는 '싱가포르의 북한대사관에 끌려갔을 때는 물론 탈출이후에도 줄곧 공포에 시달렸는데 살아서 서울에 돌아온게 꿈만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 씨는 '탈출을 도와주시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보살펴 준 싱가포르와 방콕 대사관 직원들에게 충심으로 감사한다'며 '지금까지 반공, 반공해도 그 의미를 몰랐으나 우리가 왜 반공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 경향신문 1987. 1. 10 11면

 

      ▲  북한의 납치를 피해 한국으로 돌아온 윤 씨의 기자회견 내용을 실은 경향신문 11면 기사(1987. 1. 10)

 

 
이렇듯 윤씨는 '북괴 납치'라는 죽음의 시간을 넘어온 반공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윤씨가 입국한 며칠 뒤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바로 윤씨를 납치하려 했다는 북한공작원이라는 김옥분이 그녀의 아파트에서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  김 씨의 사망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1987년 1월 27일 자 보도

 

 

김옥분 여인 아파트서 변시로

홍콩 납북미수 사건 윤태식 씨 부인 김옥분 여인 아파트서 변시로
홍콩경찰 '지난 10일 이전 피살된 듯'

지난 2일 밤 '홍콩' 구룡 '침사추이'가 13a 약복아파트 9층에 있던 집에서 조총련 공작원 2명을 만난 후 행방불명 됐던 김옥분(34 일명 수지김)이 26일 밤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변시체로 발견됐다.

변시체로 발견된 김 부인의 남편 윤태식 씨(28. 서진통상해외사업부 홍콩본부장)는 지난 4일 '싱가포르'에 가서 '아내가 행방불명됐다'며 자신은 '북한의 납치기도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주장, 한국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했었다.

- 동아일보 1987. 1. 27 11면

 

 


그러나 이날 이후 더 이상 김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신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홍콩 수사당국은 김씨의 사망 시점이 1월 10일 이전이라며 한국 정부에 그녀와 동거했던 윤씨에 대한 조사 협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홍콩 수사당국의 이러한 요청에 한국대사관이나 외무부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결국 윤씨는 어떤 조사도 받지 않게 되었다.  

수지 김 사건을 공안사건으로 규정했던 안기부는 납치 주범 중 한 사람이었다는 김씨의 사망에 대해 당연히 수사해야 했다. 만약 실제 김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이었다면, 윤씨를 납치하려했던 경위, 과정,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망하게 되었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이때 조사했다면 뒤에 가서 말하겠지만 남편 윤씨의 살해 혐의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지 김 사건을 공안 정국으로 몰고 갔으며 사망한 김씨의 가족들을 불러 가혹 행위를 포함한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언론 역시 수지 김을 악마화 하는 것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도 정작 이 여인이 죽은 경위에 대해서는 취재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김씨의 시신은 행불자를 처리하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이름 모를 이들과 함께 묻히게 되었고 이후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수사당국의 비인권적 조사를 받고 전과자의 가족이 되어 버렸다.

이 사건의 전말은 2000년이 되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드러났다. 윤씨가 집에서 다툼 끝에 아내 김옥분씨를 살해했으며, 당시 안기부는 윤씨가 김씨를 살해했고 북에 납치될 뻔했다는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을 은폐하고, 오히려 윤씨를 반공투사로 미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는 살해당한 김씨가 북한 간첩이라며 단순 살인사건을 대공사건으로 조작했다.

결국 윤씨는 2001년 11월 13일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 재판에서 윤씨는 1987년 1월 2일 홍콩의 자택에서 사업자금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던 중 부인 김옥분을 살해한 사실이 인정되어 징역 15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윤씨의 살인을 알고도 방조했던 안기부장 장세동 등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직권남용죄와 직무유기죄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아 처벌을 면했다.

법원은 김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42억여 원의 배상 판결을 결정했다. 정부는 이에 대한 일부 금액을 당시 이 사실을 은폐했던 장세동 안기부장 등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환수 조치 했다(한국 정부가 구상권 행사한 첫 사례이며 이후로도 행사한 사례는 없다).

국가 배상 판결이 났지만 이들의 피해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지 김 사건'으로 알려진 후 가족들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언론 보도 이후 이들이 '여 간첩'의 가족으로 받아야 했던 피해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26일 충북 충주시 창룡사에서 열린 수지 김 천도제에서 동생 등 유가족들이 술잔을 올리고 있다. 2003.8.26 (충주=연합뉴스)

 

 

자기가 국회의원 그런 거 할 때, 그 문제가 도래가 될 거다. 이제 더 이상 나는 그 그냥 중앙당의 국장 정도로 끝날 사람이지, 국회의원은 우리나라 현실에서 못된다. 선거에 나서도 빨갱이로 몰 거고, 지역구로 국회의원 후보도 안 해줄 거다.

그래서 형님이 인제 결혼도 안 하시고 그냥, 아주 피곤한 그런 삶을 좀 사셨어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면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딱 막히면, 그런게 있잖습니까.

그래서 결국 94년도에 그 잠수교에서 차가 빠졌어요. 붕 날라갖고. 그 전날에도 내가 형님하고 통화를 했는데, 아 이 세상 뭐하러 사냐, 그런식의 농담, 웃으면서 그러드라구요···. 결국 형이 죽었는데, 죽을 이유가 없어요. 저희 형이, 그러고 형이 운전을 한 지가 십 몇년이 됐는데, 거기서 목격자 얘길 들어보니까, 아무 차도 없는 데서 차가 붕 날랐다는 거예요···. 그 밑에 낚시꾼이 봤을때 차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그냥 푹 빠졌다는 거예요.
- 1987년 수지김 간첩조작사건 동생 김○○ 당시 29세/전국 국가폭력고문피해실태조사(202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나는요 진짜 그 때요. 몇 번 죽을라 그랬어요. 불을 끄고 나면, 누울라고 그러면, 잘라고 그러면 심장 풀락거려서 잠을 못 잘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진짜 이 남의 눈총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건지. 더군다나 세상이 그 떠들썩했던 사건이기 때문에, 여길 가도 나를 손가락질 하는 것 같고, 저길 가도 나를 손가락질 하는 것 같고, 온 세상이 다 우리를 등지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우리를 벼랑에 내몰은 것 같더라구요. 벼랑에. 그냥 밀면 그대로 우리 쓰러질 것 같더라구.
- 1987년 수지김 간첩조작사건 동생 김○○, 당시 29세/전국 국가폭력고문피해실태조사(202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우리 시누들도요 나도 술집 나가고, 나도 간첩질 해서 그랬다고, 아니 오해 안 하겠어요. 글쎄? 언니랑 같이 그런데 다녀서 같이 살았는데, 아니 동생은 안 했겠냐고 안 그렇겠어요? 우리 시누들이 우리 애기 아빠한테 맨날 그래요. 창연이 엄마도 같이 술집 나갔지 뭘 안 그랬겠냐고.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한들 저 사람들이 믿겠냔 말이에요. 응?

매스컴에서 다 그렇게 이러구 저러구 다 얘기 까발려 놨지 그 원인이 누가 있겠어. 그 새끼들이 다 조작하고 (진실은) 은폐했기 때문에 그 여파가 아, 매스컴이라는 데야 뭐 뉴스 만들어 내는 데가 오히려 횡재하는 덴데 그거 가만 내비두겠어요? 그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고, 대문짝만하게 내 놓고, 이래가지고 우리를 더 못살게 하는 거 아니예요.

처음엔 간첩이라 그래서 못 살게 해 놓더니, 낭중에는 술집 나갔다고 해서 못 살게 해 놓고, 응? 우린 또 여형제들이 많잖아요. 뻔 할 거 아니냐, 이거야. 언니가 그랬으니까 동생들도 다 그랬을 거 아니냐는 거야.

얼마나 억울해요. 글쎄. 간첩도 억울해. 술집으로 나갔다는 것도 억울해. 언니야 우리 집을 먹여 살리느라고 나갔을 수 있어요. 아니 언니가 나간다고 동생들 다 따라 나가요? 홍콩이라는 데가 작은, 작기 때문에 교민들은 거의 다 아니까. 가서 확인하라 할 수도 없고. 진짜 진짜 나는 이중 삼중으로 고역을 당했어요. 정말.
- 1987년 수지김사건 여동생 김○○, 당시 29세/전국 국가폭력고문피해실태조사(202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틀째 되는 날 되니까 우리 시숙하고 시누들이 세 명인데 우리 집에서 시누들이 살았다고요. 갑자기 우리 시누들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지고 이튿날 아침, 한 11시쯤 된 것 같아요. 하얗게 질리더니 오더니만 우리 신랑보고 하는 얘기가, "야 이 자식아 니 뉴스봤나?" 이러더라구요. 우리 신랑 되는 사람이 "야 봤습니더" 이러더라구요. "우얄낀데?" 경상도말 짧잖아요. "아직 이 사람도 잘 모르고 하니까 일단 기다려 봐야 안되겠습니까?" 이러더라구요. "기다려? 너 혼인신고 아직 못 한다. 이 혼사 무효다." 이러면서 우리 시숙이 나가면서 뒤통수에다 딱 돌아서서 하는 말이 "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집안 망하고 내가 망하느냐 안 망하느냐는 니한테 달렸다." 이러면서 우리 신랑한테 쐐기를 박아주고 나가더라구요.

그리고 우리 시누들 둘이는 가만히 버티고 인제 앉아서, "ㅇㅇ 니, 알았나, 몰랐나?" "야들 언니가 간첩인 거 니는 봤다메! 야들 엄마 친정 환갑에 가서 니 얘들 언니 봤다메. 니 알았나, 몰랐나?" 이러더라구. 그러니까 우리 얘들 아빠가 "누야 우리도 아직 모른다. 아직 모르고 이 사람도 아직 친정하고 연락이 안되니까," "니 생각 단단히 해라." 이러면서 저녁에 다시 올라온다 이러더라구요.
- 1987년 수지김 간첩조작 사건 여동생 김○○, 당시 25세/전국 국가폭력고문피해실태조사(202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당시 장세동 안기부장 등에게는 구상권 청구 등을 통해 일부 책임을 물었다. 2000년대 들어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후 국정원은 '수지 김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당시 사건을 대서특필해 사망한 김씨를 악마화 했던 언론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변상철(knung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