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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발포 명령·명령권자 담긴 군 '보안사령부 문건' 첫 확인

道雨 2022. 5. 12. 08:38

5·18 발포 명령·명령권자 담긴 군 '보안사령부 문건' 첫 확인

 

21일 계엄사 ‘자위권 천명’ 이전
4차례 걸쳐 명령 시간·부대 확인
광주 ‘진돗개 하나’ 발령도 적시

 

* 5·18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소요사태진행상황’ 1980년 5월20일자에 기록된 3공수여단장의 실탄 장착 지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장성급 지휘관들이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에게 발포를 명령한 군 문건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는 계엄사령부가 5월21일 오후 7시30분, 공식 발포 명령인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기 전에 4차례에 걸쳐 발포 명령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발포 명령 시간과 명령권자가 누구인지도 명확하게 나온다.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자행하기 몇 시간 전, 광주에 군의 전투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던 사실이 여러 군 문건에 적시된 것도 처음 드러났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해당 지역 군부대 장병들에게는 탄약이 기본으로 지급되고 발포가 허용된다. 당시 계엄군 발포 과정에 대한 군 내부 문건이 확인되면서 발포 명령의 최고 책임자를 실체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11일 경향신문이 확보한 ‘광주소요사태진행상황’ 문건에는 계엄군이 공식적으로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5월21일 오후 7시30분 이전에 내려진 광주지역 계엄군의 발포 명령 4건이 기록돼 있다. 이 문건은 보안사령부가 1980년 5월 작성했다.

이 문건은 광주지역 505보안부대 등 각 예하 보안부대에서 파악해 작성한 상황보고를 시간대별로 기록하고 있다. 5월18일 오전 11시 전남대 앞 상황을 시작으로 5·18이 계엄군의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린 5월27일 오후까지, A4용지 90장 분량이다. 5·18과 관련된 군 문건에서 발포 명령이나 명령권자가 명확히 드러난 것은 이 문건이 처음이다.

첫 발포 명령은 5월20일 오후 9시50분이었다. 문건은 ‘3여단장은 각 대대에 엠16 실탄 배부 및 장착 지시 하달’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장은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최측근으로 12·12군사반란에도 가담한 최세창씨였다.

이날 오전 광주에 투입된 3공수는 당시 광주역 앞에서 광주시민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3공수는 여단장의 ‘실탄 배부 장착 지시’ 하달 이후 실제 광주시민들에게 집단발포했다. 1995년 5·18을 수사했던 검찰은 당시 3공수의 발포로 광주역 앞에서 최소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전남도청 앞 발포 전 ‘실탄 배부 및 장착’ ‘발포권한 개인에게’ 적시

5월20일 3공수여단장 첫 명령…다음날 31사단·2군사령부
“군 최고지휘부 교감 없이 불가능” “최고위급들 조사해야”

최세창씨는 당시의 지시가 ‘발포 명령’이라고 직접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1995년 4월 검찰의 2차 피의자 신문에서 “실탄을 전달한 것은 발포하여도 좋다는 것이지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실탄을 지급하는 것은 자위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할 경우라면 발포를 해도 좋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5월21일에는 당시 정웅 31사단장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31사단장은 광주·전남지역 계엄을 책임지는 전남계엄분소장이었다.

광주에 5월18일부터 차례로 계엄군으로 투입됐던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 3공수여단도 31사단에 배속돼 31사단장 지휘 아래 있었다. 문건의 5월21일 오전 9시5분 기록에는 ‘31사단장은 문을 부술 경우 발포 명령(전교사관 금지 지시)’이라고 적혀 있다. 광주교도소를 경계하고 있던 31사단 96연대에 사단장이 발포 명령을 내렸지만 상급부대장인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 다시 금지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31사단의 전투상보를 보면 전교사령관의 금지 지시에도 교도소 경계병력에게는 사단장 명령대로 실탄이 지급됐다. 31사단 96연대 기록에는 5월21일 오전 11시46분 ‘헬기로 교도소 경계병력에 탄약 수송’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교도소 경계병력은 457명이었다.

31사단장은 이날 오후에도 발포 명령을 내렸다. 오후 3시45분 ‘31사단장은 폭도 무장에 대비, 전 병력에게 완전무장 및 충분한 실탄 휴대를 지시하고 발포권한도 개인에게 부여’라고 기록돼 있다. 오후 6시 기록에는 ‘31사단장 발포 명령을 취소하고 여하한 경우라도 허가 없이 발포 금지(탄약 장전도 금지)’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오후 내내 도심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발포로 광주시민 수십명이 사망한 이후였다.

광주와 전남·전북 등 호남지역 군부대를 지휘하는 2군사령부도 발포 지시를 했다.

문건에는 이날 오후 7시 ‘35사단에 사남터널 병력 100명 추가 배치하고 전남에서 오는 폭도는 발포토록 2군(2군사령부)에서 지시’라고 적혀 있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인 ‘사남터널’을 지키고 있던 전북지역 35사단에까지 발포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5·18 당시 계엄사령부가 발포 명령인 ‘자위권 보유’를 공식 천명한 것은 5월21일 오후 7시30분이었다.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고 한 시간 뒤인 오후 8시30분 광주·전남·전북지역 계엄사령관인 전교사령관에게 ‘계엄훈령 제11호’를 통해 자위권 발동을 지시하고 각 부대에 실탄을 분배하고 장착하도록 했다.

자위권 발동 전 내려진 4차례의 발포 명령은 “광주에서의 발포는 상부의 명령 없이 현장 지휘관의 판단으로 이뤄졌다”는 전두환씨를 비롯한 신군부의 주장과 완전히 배치된다.

전씨는 2017년 발간한 <전두환 회고록>에서 “계엄사령관 지시 이전에 3공수 등이 발포한 것은 정당방위권 행사였으며 상부나 어느 누구의 발포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 전남지역 향토사단으로 공수부대에 비해 시위 진압 등에서 온건한 태도를 보이던 31사단장이 발포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는 것은 상부의 압박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전씨는 1995년 검찰 조사에서 검사가 “31사단장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고 하자 “31사단장은 진압 과정에 잘못을 범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허위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자위권 발동 전 광주지역 계엄군 지휘부가 발포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는 것은 국군 최고지휘부와 교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2군사령부 이상의 지휘관들을 조사하면 어떤 경로로 이 같은 결정을 했는지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안사 문건에는 7공수와 11공수의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전 계엄군이 광주와 전남지역에 ‘국지적 위협’ 상황일 때 내려지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사실도 적혀 있다. 3등급(셋)에서 1등급(하나)까지 발령되는 진돗개는 하나가 가장 높은 단계다. 보안사 문건을 보면 1980년 5월21일 오전 8시 ‘전교사 진돗개 1 발령’이라고 기록돼 있다. 전투병과사령부가 책임지는 계엄지역인 광주와 전남·전북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는 뜻이다.

진돗개 하나 발령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도 ‘발포 명령 체계’를 밝힐 수 있는 핵심 단서로 판단하고 있다.

5·18조사위는 지난해 12월27일 진행한 ‘대국민 보고회’에서 “경찰 기록을 통해 ‘진돗개 하나’ 발령 조치가 공수부대에도 하달된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면서 “공수여단과 20사단 등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어떠한 자료에도 발령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아 누락 사유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5월21일 진돗개 하나 발령은 보안사 문건 외에 경향신문이 확인한 다른 부대 문건에서도 드러난다. 광주에 투입됐던 20사단의 ‘광주권충정작전분석’ 문건에는 “오전 8시, 전교사 지역 진돗개 하나 발령”이라고 기록돼 있다. 31사단 전투상보에서도 같은 시각 ‘진돗개 하나’ 발령 사실이 나온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해당 지역 군부대는 ‘전투태세’로 전환된다. 군은 장병들에게 기본 휴대량의 탄약을 지급하고 추가 보급 조치를 준비해야 한다. 5·18조사위도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실탄 분배와 발포가 허용된다”고 설명했다.

도청 앞에 있던 공수부대는 실제로 집단발포 전인 이날 오전 실탄을 분배받았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7월 발표한 ‘12·12 및 5·18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보면 “도청 앞 발포가 있기 전 11공수여단은 중대장 이상까지 실탄이 분배되었고, 일부 하사관들에도 분배된 상태였다”고 밝히고 있다.

1995년 검찰 조사에서 11공수 63대대 정보장교는 “오전에 전남도청 앞에 있던 63대대와 시위대를 막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교대했다. 교대한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이 분배됐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5·18 연구자인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공수부대의 발포는 ‘진돗개 하나’ 발령과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계엄사령부가 진돗개 발령으로 현장(광주)에 발포권한을 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모든 기록들이 ‘현장 지휘관 판단에 따른 발포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계엄군 최고위급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