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道雨 2022. 9. 28. 09:58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 19세기 프랑스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리바이어던의 파멸>. 홉스는 절대주권자를 <구약성서>의 바다 괴물에 빗대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서양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 토머스 홉스(1588~1679)는 조숙했던지 남들보다 두세살 이른 14살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다. 고리타분한 수업이 싫어 갈까마귀를 사냥하러 다니거나 서점에 들러 지도책을 보았다. 6년 뒤 졸업을 앞두고 구두시험을 치렀는데, 그 시절 문학사 교수들이 내는 문제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1. 여러 나라가 제각각 언어를 쓰는 것과 세계 전체가 동일한 언어를 쓰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가?

2. 지구상에 홍수가 일어나는 것과 물이 전부 어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큰 재앙인가?

 

요즘 말로 하면 ‘밸런스 게임’ 같은 문제들인데,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고 사고하도록 촉구하는 물음이라는 점에서는 그저 우습기만 한 질문은 아니다.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 답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홉스가 지도책을 보면서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나라에 흥미를 느꼈던 것을 보면, 나름대로 그럴듯한 답변을 했을 것이다.

 

홉스의 관심은 시간상으로도 넓어 과거의 먼 시대에 이르렀다. 인문학 수련을 마칠 무렵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하기도 했다. 홉스의 대표작 <리바이어던>은 근대 자연법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 사상의 연원은 투키디데스와 가까운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법(lex naturalis)에서 말하는 ‘자연’(natura)은 자연환경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원초적 질서를 뜻하며, 특히 인간의 타고난 성향, 곧 ‘본성’을 가리킨다. 이 인간 본성을 보는 관점은 고대 그리스 학파마다 달랐다.

 

이를테면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 본성의 핵심을 이기적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원자처럼 나뉜 개인이 이기심을 품고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에피쿠로스주의를 흔히 쾌락주의라고 하는데, 이때의 쾌락은 감각적·관능적 쾌락이 아니라, 끝없는 경쟁과 갈등의 정글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곳에서 맛보는 단사표음의 즐거움이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스토아학파가 인간 본성에서 주목한 것은 욕망이 아니라 이성이었다. 세상사가 근심거리로 가득 차 있다고 본 점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와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스토아학파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결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토아학파에 인간 본성의 핵심은 이성이었다. 이성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세상사의 질서, 곧 법이 존재한다. 이 이성의 법이 바로 자연법이다. 자연법은 모든 인간의 현실적 삶을 규제하는 시민법의 바탕을 이룬다.

 

스토아학파의 이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법 사상을 확립한 사람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철학자 키케로다. 키케로는 <국가> 3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이성이 진정한 법이다. 이 법은 자연(본성)과 일치하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며, 변함이 없고 영원하다. 이 법은 인간에게 그 의무를 수행할 것을 명하며, 인간이 그릇된 짓을 행하는 것을 금한다. (…) 인간의 입법으로 이 법의 효력을 약화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이 법을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케로가 생각한 자연법은 보편법이고 영원법이다. 자연의 법칙이 언제 어디서나 관철되듯이, 자연법은 모든 상황에서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로마라고 해서 아테네와는 다른 규칙을 부여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늘은 이런 규칙을 부여하다 내일은 저런 규칙을 부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실정법은 이 자연법을 따라야 한다.

 

키케로는 <국가>의 그 대목에서 자연법을 신, 곧 절대자와 연결하기도 한다.

“이 법은 유일하고도 보편적이어서 만인의 스승이요 지배자인 신과 같다. 신이야말로 이 법의 창조자이고 고안자이며 제안자다. 이 법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소멸하게 될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경멸하는 자는 그 대가를 가장 참혹한 벌로 치르게 될 것이다.”

 

키케로의 생각은 서양 중세로 이어져 기독교 신학에 통합됐다. 자연법은 중세의 신법과 사실상 하나가 된다. 다만 이때 자연법, 곧 이성법의 이성이 뜻하는 것은 인간 이성이 아니라 신의 이성이다. 인간이 이성으로써 알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세상 질서는 실은 신이 이성으로써 세운 질서인 것이다.

 

이 자연법은 종교개혁과 함께 근대의 문이 열린 뒤 새로운 해석의 빛 아래 선다. 신이 이성으로써 세운 것이 자연법이지만 그 법은 신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다는 관념이 등장한 것이다. 자연법칙이나 수학법칙을 인간 이성이 파악할 수는 있어도 변경할 수는 없듯이, 영원한 법칙에 따라 구축된 자연법은 신의 뜻으로도 바꿀 수 없다. 그리하여 자연법은 신의 품을 떠나 인간에게로 돌아왔다. 근대 정치사상가들이 자연법을 신의 손에서 빼앗아 인간의 본성 안으로 되돌려놓은 주인공이다.

 

이 프로메테우스적인 작업을 한 이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 17세기 영국인 홉스다.

 

눈길을 끄는 것은 홉스가 생각한 ‘자연’, 곧 인간 본성이 ‘이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홉스는 고대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닮은 눈으로 인간 본성을 해석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킨다면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는 자가 자연 상태의 인간이다. 그리하여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가 된다. 홉스의 자연 상태는 영원한 전쟁 상태다. 만인이 만인을 불신하는 가운데 제약 없는 이기심이 어디서나 충돌하기에,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끝없는 파멸의 불안이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또 다른 본성, 곧 이성이 개입한다. 인간은 이성을 활용해 만인의 전쟁 상태를 끝내고 죽음의 위협이 없는 사회를 계약을 통해 결성한다. 모든 개인이 합의하여 유일한 주권자를 세워 그 주권자에게 각자의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전쟁 상태를 끝내는 것이다.

홉스의 인간관은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는 고전적 인간 규정을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늑대와 같은 동물의 상태로 살 수 없어, 이성을 발동해 사회를, 다시 말해 정치체제를 세우는 것이다.

 

홉스는 사회계약을 통해 창출한 주권자를 지상의 절대자로 상정했다. 개인들은 신과 같은 주권자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주며, 주권자는 이 넘겨받은 권리를 하나로 모아 행사한다. 홉스는 그렇게 등장한 절대주권자를 <구약성서>의 바다 괴물에 빗대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다.

이 리바이어던으로 홉스가 가리킨 것이 국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의 체현자인 군주다. 홉스는 젊은 시절부터 뼛속까지 왕당파였고,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를 추앙했다. 왕권신수설을 주창한 제임스 1세는 신민에게 자신을 절대군주로 떠받들도록 강요했다.

 

홉스는 왕당파에 대한 의회파의 공격이 시작되던 1640년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제임스 1세의 후계자 찰스 1세가 청교도혁명으로 1649년 처형당한 뒤, 망명지에서 <리바이어던>을 썼다. <리바이어던>은 완고한 왕당파 지식인이 죽은 왕에게 바치는 학문적 추념사라고도 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리바이어던>의 운명이다. 왕당파의 신념을 담은 이 저작은 저자의 뜻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절대군주제가 유지되려면 홉스가 제시한 자연법의 삭막한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나 혈통에 대한 경외심이 백성들 마음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홉스의 이론에서 왕은 개인들이 전쟁 상태를 견딜 수 없어 각자의 권리를 포기하고 주권자로 내세운 대리자일 뿐이다. 이런 차가운 계산에 따른 선택에는 왕정을 떠받치는 전통적 충성심 같은 뜨거운 정서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이 논리로만 보면, 왕은 단순히 왕이라는 직위를 지닌 채 인민 개개인의 행복에 봉사해야 할 일종의 공적 종복(civil servant)이 된다. 그러므로 홉스가 아무리 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더라도, 왕이 왕으로서 제구실을 못하면, 다시 말해 인민의 생명과 복리를 지켜주지 못하면 왕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홉스의 절대군주는 한 세대 뒤 ‘명예혁명’을 거쳐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떨어진다. 절대군주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인민 개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지키는 국가 혹은 정부뿐이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낳은 것은 정부가 정부다울 때에만 정부로서 인정받는다는 상식이다.

국민의 삶을 돌보지 못하는 정부는 이권 집단일 수는 있어도 참된 정부는 아니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