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챗GPT로 신년사 써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

道雨 2023. 2. 8. 09:03

챗GPT로 신년사 써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인 챗지피티(GPT)는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발견한 ‘신세계’인 것 같다. 그는 지난달 27일 챗지피티로 쓴 신년사가 “몇자 고치면 그냥 대통령 신년사로 나가도 (될 정도)”라고 극찬했고, 언론간담회 준비로 공무원들이 밤늦게까지 근무했다는 부처 사례를 들며 “챗지피티가 있으면 2주일 동안 밤을 안 새우고 하루만 해도 되지 않겠나 싶다”라고 했다. “불필요한 데 시간 안 쓰고 정말 국민을 위해서 필요한 서비스”에 매진하라는 당부도 이어졌다.

연설은 인공지능으로 해결해도 될 만큼 ‘사소’하거나, 질의응답 준비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일방적 ‘훈시’로 치닫고 있는 윤 대통령의 소통 방식과도 겹쳐 보인다.

 

대국민 보고를 표방한 부처 신년 업무보고는 윤 대통령의 ‘독무대’로 마무리됐다. 한달여간 11차례 열린 업무보고는 윤 대통령의 즉석연설로 마무리됐는데,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34분까지 이어졌다.

대부분 20분 넘게 발언하다 보니 ‘말이 말을 낳는’ 사건도 적지 않았다. 교육부 업무보고에선 난데없이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재미가 없었다”는 자기 고백이 나오고,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선 연금개혁을 얘기하다가 대법원 표결 방식을 소환했다. 북한을 향한 “100배, 1000배 보복”부터 흡수통일을 시사하는 발언까지 참모들의 진땀을 뺀 사고도 적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이 장황한 발언을 “즉석에서 대통령의 소신, 철학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요 발언이 아닌 연설 전문을 공개하는 것도 ‘회의 내용을 가감 없이 전달하라’는 윤 대통령의 지시라고 한다. 국정철학을 국민·공직사회와 공유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말에 대한 자신감’도 유난하다. 한 참모는 “보통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면 기가 빨리는데, 윤 대통령은 말하면서 기를 받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검찰 시절 좌중을 휘어잡는 말솜씨로 유명했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감히’ 내용을 교정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 장광설 습관이 굳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윤 대통령의 소통 의지가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낼 뿐,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참모들만 앉혀놓고 읽어 내린 신년사, 최대 1만여자에 이르는 업무보고 즉석연설, 전국 146개 전광판에서 빛나고 있는 치적 홍보 영상까지, 윤 대통령의 소통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반면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곤란한 사안에는 침묵하거나 분노한다. 대통령실은 김건희 여사 관련 숱한 의혹을 뭉갰고, 최근 불거진 천공 관저 방문 의혹에는 해명 대신 ‘입막음’ 고발로 답했다.

 

이는 대통령실 소통 창구인 홍보수석실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홍보수석실의 책무는 대통령과 국정을 홍보하는 동시에, 언론의 프리즘을 통한 국민의 목소리를 대통령에게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실 내부에선 홍보수석실이 기자들 편만 든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힘이 실리기는커녕 잦은 문책 인사로 정부 출범 이후 내내 어수선하다. 윤 대통령이 언론을 ‘처음 만나는 국민’이 아닌, 정권의 홍보 수단쯤으로 치부한 결과다.

 

소통의 중요성을 설파하던 윤 대통령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며 대통령실 이전까지 감행했다. 그런데 지금의 ‘용산시대’는 구중궁궐 청와대에 상명하복 검찰청의 모습이 더해졌다. 국민들은 윤 대통령의 권위적인 ‘훈화 말씀’과 자랑을 속수무책으로 듣는 수밖에 없다. 한국갤럽의 대통령 직무수행 부정평가 이유로 ‘독단적·일방적’ ‘소통 미흡’이 늘 수위를 다투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독재자는 힘으로 통치하고 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써 통치한다”고 했다.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일방적 지시가 아닌 대화와 토론으로 국정을 이끌어 갈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국민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고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의 말은 무성하지만 여기엔 결정적으로 듣는 사람, 즉 국민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빠져 있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으니 ‘통치 수단’인 연설을 인공지능이 대신해도 무방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다만 대통령의 ‘독백’이 길어질수록 국민의 마음 역시 멀어진다는 것을 윤 대통령이 깨달았으면 한다.

 

 

 

최혜정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