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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살 고려 불상, 언제쯤 ‘극락’으로 돌아올까

道雨 2023. 2. 13. 09:05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693살 고려 불상, 언제쯤 ‘극락’으로 돌아올까

 

 

한-일 반환 논란의 금동관음보살상

 

* 고려시대 말기인 14세기 초 충청도 서산 부석사에서 만들어진 금동관음보살좌상. 2012년 일본 쓰시마섬(대마도) 간논사(관음사)에서 절도범들이 훔쳐 국내로 돌아온 이래, 10년 넘게 반환 논란에 휩싸인 채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 정은우 부산박물관장 제공

 

 

새해 693살이 된 이 불상은 참으로 험궂었던 시절에 태어났다.

왜구의 노략질과 권세가들의 착취 행각이 기승을 부리던 때다. 백성들은 삶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농사짓던 땅을 버리고 너도나도 유랑민이 되었다. 후대 사가들이 여말로 부르는 14세기 중후반 고려왕조 말기 한반도 해안 지역은 왜구들의 준동으로 무법천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동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부처님 은덕으로 평화 평등 충만한 세상을 간구하며 공동체 신앙에 기대어 난세를 견디어냈다.

 

* 1951년 일본 쓰시마섬(대마도) 간논사(관음사) 쪽이 불상의 몸체 속 복장유물을 조사할 당시 발견했다는 불상 조성을 위한 발원문. 천력 3년(1330년) 2월에 고려국 서주에 사는 인연 있는 사람들이 현세에서 재앙을 소멸하고 복을 받고 후세에는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바람으로 불상을 주조하고 영충공양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취지를 적고 있다. 정은우 부산박물관장 제공

 

 

1330년 고려국 충청도서주(서산) 땅의 고찰 부석사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금동관음보살상은, 이런 소망이 담긴 민중의 대역사였다. 승려와 신도들은 물론 하층민들까지 한마음으로 전란 없는 세상과 내세의 극락왕생을 함께하자며 만들었다.

 

아득한 시간이 흘러 1951년 불상 몸체 속(복장)에서 발견된 부석사 관음상 제작 결연문의 발원자 명단을 보면, 심혜, 혜청 등 승려들과 김용, 김동, ‘똘이’ 같은 그 시대 장삼이사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적었다.

“중생을 세상의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인연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발원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영원히 충만한 공양으로 현세의 복을 빌고, 내세에는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역사의 간계라고 해야 할까.

고결한 인간애를 담은 고려인들의 불상은, 지금 한국과 일본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키는 판도라의 상자로 돌변해버렸다.

 

2012년 10월 국내 절도단이 일본 쓰시마섬(대마도)의 고찰 간논사(관음사)에 16세기부터 봉안되어 있던 불상을 훔쳐낸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불상을 국내 밀반입한 뒤 팔려다, 이듬해 1월 적발돼 압수당했다.

14~16세기 일본으로 흘러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은 상투를 틀어, 원래 보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평안한 미소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포함해 세부 조각까지 그 만듦새가 돋보이는 고려 후기 불상의 걸작으로, 진작부터 국내 불교미술사학계에서 주목받았던 수작이다. 불탄 흔적이 있고 보관도 사라져, 일본 반입 과정에서 상당한 곡절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옛 서산 부석사 불상이 봉안됐던 쓰시마섬 간논사(관음사). 단출한 시골 절집의 모습이다. 정은우 부산박물관장 제공

 

 

불상이 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인데다, 장물인 만큼 적발 당시엔 반환이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주한 일본대사관이 문화재청에 반환을 요청했고, 문화재청도 불법 유출 문화재의 반환을 규정한 국제협약 등에 따라 반환 입장을 내비쳤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 승려·신도들과 불교계 등에서 ‘환수위’를 결성해, 이 불상이 14세기 왜구에게 약탈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2013년 2월 말 대전지법은 부석사 쪽이 국가를 상대로 낸 점유이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3년간 반환을 유예하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유예기간이 끝난 직후인 2016년엔 부석사 쪽이 다시 불상 인도 청구 소송을 내면서 논란은 소유권 공방으로 집중됐고, 2017년 부석사 쪽에 소유권이 있다는 대전지법의 1심 판결에 이어, 이달 1일엔 소유권이 일본 간논사에 있다는 대전고법의 2심 판결이 나왔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이 빚어지자, 한국·일본 정부와 양국 절 사이의 신경전도 더욱 달아오르고 있다.

 

                    * 도난 사건 전 고려불상이 간논사(관음사) 불당에 봉안됐을 때 모습이다. 정은우 부산박물관장 제공

 

 

역사적으로 부석사에 불상이 봉안됐던 14세기 초·중반은, 서해안 일대에 왜구의 약탈이 기승을 부려, 수도 개경의 사찰들도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논란의 된 불상의 강탈 여부를 입증할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600여년 전 유출 경위를 보여주는 기록물이나 근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간논사의 <연혁약사>에 1526년 불상이 절에 있었다는 기록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러니까, 이 불상은 14~15세기 모종의 경위로 일본으로 유출돼 오랫동안 떠돌다 간논사 수중에 들어갔거나, 16세기에 바로 들어갔을 수 있다. 왜구의 침탈 역사로 미뤄 보아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문가들의 조사보고서도 이미 나왔다. 물론 고려 말 조선 초에 일본에 불경과 불구들을 선물하는 관행도 있었으므로, 선의로 건네거나 팔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약탈 정황이 짙지만 결정적 물증이 부재하는 만큼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게 학계 전문가들의 주된 견해다.

 

* 옛 서산 부석사 불상의 몸체 속에서 발원문과 함께 나온 복장유물들. 1950년대 쓰시마섬 간논사(관음사)가 불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은우 부산박물관장 제공

 

 

분명히 장물이기에 돌려주는 게 사리에 맞을 듯하지만, 일본에 무지막지한 문화재 약탈을 당해온 한국인들 입장에선 약탈 심증이 가는 명품을 내주는 것이 정서상 용납하기 어려운 측면이 분명히 있다.

고법도 이번 판결에서 부석사 쪽 인도 청구를 기각하면서, 이와 별개로 “정부가 문화재 보호를 위한 국제법적 이념과 문화재 환수에 관한 협약 등의 취지를 고려해 불상의 반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결국 양국 정부와 문화재 전문가, 종교인들이 사심 없는 대화를 통해 불상을 발원한 고려인들의 인연과 상생의 마음을 살릴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