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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 외상 장부가 빨갱이 명단으로... 그 이름 변치 말라고 돌에 새겼다

道雨 2023. 5. 31. 09:57

이발사 외상 장부가 빨갱이 명단으로... 그 이름 변치 말라고 돌에 새겼다

함양양민희생자 유족의 기억을 기록하다 ① 함양군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 차용현 회장

 
 

 

 

 

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들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참히 희생됐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지리적 여건으로 빨치산이 활동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공비토벌작전 중 빨치산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함양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함양군 읍면 민간인 80여명을 포함해 보도연맹, 연고지가 밝혀지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무고한 희생자가 3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함양민간인 희생사건 86명, 강정금 상해사건 1명, 부산형무소 사건 16명, 국민보도연맹사건 29명, 적대세력사건 29명, 전주형무소사건 2명,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명, 서부경남민간인 희생사건 15명, 전북지역민간인 희생사건 1명 총 181명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으로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70여년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 온 유족들의 설움은 아직도 깊기만 하다. 희생자 유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그날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는 날까지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붙잡아 둘 의무를 갖게 됐다.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이르다하기엔 너무 늦었고, 늦었다고 하기 보단 다행이었다.

 

아픈 기억을 들추어내야 했던 힘든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언해 준 유족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함을 전한다.

 

 

 

                              ▲  함양군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 차용현 회장
 

 

 

 

 

함양군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 차용현 회장

"그 일을 겪은 것이 열 두 살 때인데... 내가 산 세월을 어찌 다 말할꼬, 참말로 힘들었지"

경남 함양군 함양군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 차용현 회장은 12살 때부터 86세가 된 지금까지 양민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1949년 음력7월28일 수동면 도북마을 주민 32명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함양읍 인당 당그래산으로 끌려가 집단 학살을 당했다.

"경찰이 회관 앞에 징을 치면서 동네사람들 다 나오라 카는데 우리 아버지는 저 아래 연자방아 있는데서 보리를 찧고 있었어. 나는 또 모이라 할 때 안 모이고 하면 뚜들겨 맞고 총살당할까 싶어서 얼른 뛰어가서 소식을 전한기라. 그래서 방아 찧다말고 올라가셔서 그 길로 못 오셨지."

아버지를 비롯해 백부, 당숙도 끌려갔다. 차용현씨는 고모부에게 부탁해 소 한 마리를 팔아 군인에게 돈을 안겨줬지만 세 사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며 백부만 빼내 주었다. 돈이 적어서였을까 하여 함양경찰서에서 도북 집까지 걸어와 다시 소 한 마리를 잡혀 읍으로 갔으나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 잡아다 주었더니 이것이 화근이었어. 함양군에서 도북이 젤 못살았어. 못 사는 동네에서는 공평하게 잘 살게 해준다캉께 그런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기라. 야튼 군에서 알고 그 빨갱이들 집에 불을 질렀으니 산으로 올라갔는데 저녁이면 양식 얻으러 내려오는 거라. 총을 들이밀고 달라 하는데 안줄 사람 어디 있냔 말이야. 또 그러면 아침에는 지서에서 빨갱이 밥 줬다고 뚜디리 패고. 마을사람들은 그래도 정부에 협조할라꼬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는데 산으로 올라갈라하는 이발사를 잡아 경찰에 넘긴기라."

그때는 이발값을 외상으로 하고 장부에 이름을 적어놓고 가을내기를 했다. 잡혀간 이발사는 마을 사람들 이름이 적힌 외상 장부를 빨갱이 명단이라며 내놓았던 것이다.
   
"빨갱이를 잡아다 줬더니 그 사람 말만 듣고 마을주민들 고문한 것이 너무 억울하지. 이발사 정주상의 외상장부에 적힌 마을 사람들은 끌려 가 거꾸로 매달리고 고춧물을 코에 넣고 전기고문을 당하고. 그때 정주상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지."

아버지를 놓치고 마을로 들어서니 청년단, 경찰이 주민들을 하교 마을로 쫓아내고 있었다. 한 시간 내로 집을 비우지 않으면 불을 지른다 했다. 정신없이 짐을 싸서 쫓겨나던 주민들의 눈앞에 인당산이 보였다. 시커멓게 올라오는 연기, 잡혀간 사람들을 총살시켜 불 질렀다는 소문이 한순간에 퍼졌다. 아이를 업고 이불보따리 내려놓고 길바닥에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차용현 회장은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하교마을 제일 갓집 소마구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까대기에서 밤을 새웠다. 그 집 소마구에 솥을 걸어 밥을 해먹고 다음날 마을로 올라가 일을 하며 그 해 심은 곡식을 겨우 수확했다.

일이 있은 뒤 한 달 만에 시체를 찾기 위해 인당 당그래산을 찾았지만 경찰 민방위대의 매질에 쫓겨 왔다. 차용현씨는 장소가 변했나 염려돼 1년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았다. 세월이 흘러 당그래산이 점차 개발되자 차용현 회장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1991년 12월20일 유골을 발굴해 12월21일 낮12시 도북초등학교 뒤 장자골 합동묘소를 만들었다.

"아이고. 나는 이 얘기만 하면 얼굴에 소름이 확 돋아. 흙이 많이 덮여 있으니 아무리 파도 유골이 안 나오는 거라. 그래서 아래쪽 옆을 파고 들어가 보니까 유골이 나오는 거야. 유골 파는 전문가도 아닌데 희한하게 잘 파냈어. 우리는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유림에 가서 뼈 만지는 기술자를 불러 무조건하고 위에 뼈랑 밑에 뼈랑 쫙 놓고 합동묘를 썼지."

70여년 세월동안 차용현 회장의 삶은 누구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당그래산에 아버지를 묻어둔 채 어머니와 동생 둘, 식구들과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했다.

"나는 이때 12살 13살 이 나이에 아버지 죽은 사람은 나 혼자였어. 죽은 사람 자식들이 거의 다 49년도에 태어났고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 모자 쓰고 배지 달고 학교 가는데 나는 지게 지고 매 끼니 동생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산에 올라야 했어. 나도 공부를 하고 싶어서 절로 갔지. 거기 가서 명심보감을 배우고 그 뒤에 봉이골 산골 서당에 가서 소학 대학을 배우고 농사지을 때는 집에 와서 일 하고."

그리고 그가 놓지 못한 일은 도북양민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유족 중에 내 나이가 제일 많아. 나이가 많아도 상세히 기억에 담고 있는 사람은 없지. 나는 이 일에 12살 때부터 가담했어. 유골 파서 옮기고 여기에 관심을 쓰며 70여년을 계속해왔지"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을 받아 낼 때까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고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진실규명을 통해 도북양민학살 희생자의 원혼을 위로할 수 있었던 차용현 회장은 함양양민희생자 추모공원을 준공하게 되면서 마지막 소원을 이뤘다.

추모공원에는 희생자 181명의 이름이 새겨진 양민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돌에 이름을 꼭 새기고 싶었지. 변하지 않으니까. 백년, 이백년 변하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차용현 유족   

■ 이름 : 차용현
■ 희생자와의 관계 : 희생자의 아들
■ 생년월일 : 1937년 11월20일 / 만 86세
■ 성별 : 남
■ 주소 : 경남 함양군 수동면 도북안길30
■ 직업 / 경력 : 농업
   
함양양민희생자 도북사건
희생자 정보

■ 이름 : 차재규
■ 생년월일 : 1915년 4월9일
■ 사망일시 : 1949년 9월20일(당시 34세)
■ 성별 : 남
■ 결혼여부 : 기혼
■ 주소 : 경남 함양군 수동면 도북리 252
■ 직업 / 경력 : 농업

 

 

 

 

주간함양 하회영(h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