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5월 마지막 날의 국가 공황 사태

道雨 2023. 6. 2. 10:01

5월 마지막 날의 국가 공황 사태

 

 

 

 

       * 지난 5월31일 오전 6시41분께 서울시에서 보낸 위급재난문자와 22분 뒤 이를 바로잡는 행정안전부 위급재난문자.

 

 

 

특수부대 정예 요원 수준의 담력을 체질화한 우리나라 국민은 웬만한 북한의 위협에는 놀라지 않는다. 가까운 곳의 적대세력이 핵과 미사일로 위협해 오면, 외국 같으면 거의 졸도할 일이지만 우리 국민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정도의 불편함만 느낀다. 아마도 서울의 시민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보다 대형마트 휴무가 더 불편하다고 느낄 듯하다.

 

국민은 너무나 차분한데, 정작 우리나라의 국가 엘리트들은 혼란과 두려움에 포획돼 있다. 그들은 북한 위협에 국민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고, 그 이후 닥칠 책임 추궁을 두려워하면서 먼저 혼란에 빠진다.

이들은 국가가 처한 중대한 위협을 직시하고 신중하고 정확하게 행동해 혼란을 막을 수 있는 역량이 없다. 불필요한 대책을 남발하거나, 시민의 행동과 표현을 통제하려 하고, 누가 사태를 통제하는지를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일 뿐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시민운동가 리베카 솔닛은 재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엘리트 공황’ 현상이라고 했다.

 

5월의 마지막 날 아침 서울에 내려진 경계경보 발령은 전형적인 엘리트 공황 사례였다.

북한이 서해 먼바다로 정찰위성을 발사하는데 육군 수도방위사령부는 대응 주체가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북한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닐 때, 전방 1군단으로부터 무인기 출몰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던 이 부대는 서울을 방어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실패의 아픔을 갖고 있다.

그에 따른 오버였을까. 서울시는 재난문자 발송 뒤 시민 혼란이 거듭되자 언론에 “경계경보 발령은 수방사가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행정안전부는 “경보 미수신 지역은 자체적으로 경계경보를 발령”하라는 애매한 지령을 전송했다. 이 애매함은 정보 공해를 초래하는 또 다른 재난의 시작이었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 당시 대응 실패의 책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서울시는, 이 메시지에 놀라서 서울시민에게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경계경보를 발령했다.

북한 로켓 발사가 서울시에는 비상사태가 아니었는데도, 이 메시지로 인해 비상사태로 돌변했다.

 

아침잠을 설친 940만 시민에게 혼란을 초래한 서울시의 돌출 조치에 놀란 행정안전부가 황급히 서울시민에게 “경계경보 발령은 오발령”이라는 안전안내 문자를 전파했다.

국가 엘리트들의 재난 대응이 다시 재난을 만들어내는 엘리트 공황의 전형이다.

 

지상파 방송들이 특보 방송을 하지 않아 궁금증이 증폭된 시민들은 일제히 인터넷 접속에 나섰고, 포털 네이버가 다운됐다. 지난해 10월 카카오톡 먹통 사태가 벌어지자,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안보 사태”라며 범정부 사이버안보티에프(TF) 구성을 지시한 바 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손쉽게 네이버가 다운되는 사태를 보면, 당시 사이버안보 대책이라는 것 역시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점이 쉽게 확인된다.

 

용산 국가안전보장회의도 이런 정부기관의 혼란을 수습할 컨트롤타워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북한 무인기가 용산을 침범할 당시에 집무실에서 반려견과 사진을 찍고 있었고, 강릉에서 현무 미사일의 오발 사태 당일에는 사태 파악도 하지 못했으며, 여름의 폭우에는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이태원 참사 당시 국가 엘리트의 무능과 무책임에 면죄부를 주고, 일선 소방서와 경찰 지구대를 털었다.

 

재난의 책임은 엘리트가 아니라 시민에게 있다는 관점으로, 희생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를 통제하고, 시민들의 연대를 파괴하며, 정부의 위신을 세우는 데 골몰한 결과, 정부는 약자에게 깊은 수치심을 강요했다.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윽박지르는 대통령이 두려워, 경직된 관료조직은 대책을 남발하여 대통령 심기를 경호하지만, 실제로 개선되는 건 없다.

그들은 국가의 위협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쏟아질 책임 추궁과 싸운다.

 

만일 국가의 위기가 현실이 되는 실제 상황이라면, 이런 국가 엘리트들은 시민의 안전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5월의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난 돌발 사건과, 그 이후에 책임 떠넘기기 경쟁에 돌입한 그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수치심은, 언젠가 올 진짜 위기에서의 비극적 결말을 예감하게 한다.

 

정작 두려운 것은 북한의 핵무기가 아니라, 무능하고 무책임한 이 나라 엘리트들이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