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한강’의 기적

道雨 2024. 10. 21. 09:05

‘한강’의 기적

 

 

 

소설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온 나라가 기쁨과 축하로 들썩인다.

한씨의 출신 학교인 연세대도 예외가 아니다. 백양로를 비롯한 캠퍼스 곳곳에 축하 펼침막이 걸렸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한편으론 앞서 영화감독 봉준호의 아카데미 수상까지 생각하면, 연세대 내에서 찬밥 신세로 전락한 문과대의 위상이 뭔가 더 처연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 같은 공간에서 작가로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그저 우연일까.

 

대학 시절 그들의 미래에 아마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이벤트는, 당시엔 본인들조차 몰랐겠지만, 1989년에 전격 단행되었던 해외여행 자유화가 아닐까 싶다. 이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가장 먼저 ‘물 건너’ 세계를 탐방하러 몰려 나간 이들은 대학생 배낭여행족이었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지속된 이 풀뿌리 신사유람 행렬은, 대학 문화를 통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있다고는 들었지만 본 적은 없는 ‘국제적 감각’이란 것이 생겨난 것은 물론이고, 외국 대중문화의 전방위적인 유입이 본격화됐다. 대기업들이 나서서 신사업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대학생 해외 탐방단을 꾸려 내보내기도 했다. 여기서 채택된 멀티플렉스 같은 아이템들이 실제 사업화되기도 했고, 그렇게 외국을 유람한 이들이 문화 산업화 역군이 되었다.

 

 

 

외환위기로 외유 행렬이 뜸해졌을 무렵인 98년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통해 일본 대중문화가 전면 개방됐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방송사 등 소수 문화 권력의 게이트키핑을 거쳐야 접할 수 있었던 외국 대중문화가 ‘직거래 체제’로 ‘민주화’됐지만, 일본 대중문화만은 예외였다.

부산이나 서울 압구정동의 몇몇 상점을 통해 은밀히 유통되던 제이팝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되던 해적판 영화, 만화 등이 쏟아져 들어왔다.

 

문화 수용자인 대중의 눈높이는 급속도로 높아졌다. 잘 베끼는 것에서 살길을 찾던 게으르고 얄팍하기만 했던 생산자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일본에 의해 급속도로 잠식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높아진 대중의 취향에 맞추며 문화 산업은 성장했고, 그 중심에 해외여행 자유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가 있었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88년까지의 성과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이문열의 말처럼 “(한강의 수상이) 문화 고급화를 상징하는 봉우리 같은 것”이라면, 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케이팝의 부상과 봉준호의 아카데미상 수상,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까지 이어진 지난 30여년의 드라마틱한 성장 역시 ‘기적’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첫 문단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모든 사태는 보기보다 복잡다단한 법이지만 답을 하기 위해 좀 단순화해보자면, 이 기적 같은 여정의 시작은 개방의 물결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대학가였고, 그 대학 문화의 중심이 당시엔 연세대가 자리한 신촌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많은 평론가들이 얘기하듯 한국 내에서 비주류에 가까웠던 한강의 작품들이 서구의 식자층에 발견된 것은, 그가 작가로 성장했던 동시대 문화의 기적과도 같은 세계화에 기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한강의 기적 역시, 국민의 삶을 바꾼 굵직한 정책들이 기반이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식 세계화, 한류 세계화 같은 잘디잔 정책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

긴 안목으로 보면, 결국은 삶을 바꾸는 굵직한 정책이 모든 변화와 기적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한강’의 기적을 통해서도 확인한다.

 

또 다른 기적을 바란다면, 근시안적인 정책이나 숟가락 얹는 제스처 말고, 우리 사회가 처한 조건을 바꿀 만한 굵직한 정책을 고민하고 또 고민할 일이다.

 

 

 

김진화 | 연쇄창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