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280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 조선의 관포지교, 오성과 한음 # 백사(白沙) : 이름 없는 강 나루터 노인의 호(號)를 탐하다 조선의 관포지교라 할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 이항복과 이덕형이 처음 만난 시기는 1578년(선조 11)으로, 이항복의 나이 23세, 이덕형의 나이 18세 때였다고 한다.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인 안동 권씨와 이미 혼인했고, 이덕형 역시 17세에 이산해의 딸인 한산 이씨와 혼인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성년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 역시 감시(監試)를 치르는 과거 시험장이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런데 정승(政丞)..

매월당 김시습과 서계 박세당

매월당 김시습과 서계 박세당 - 수락산이 맺어준 200년의 인연 # 매월당(梅月堂) : 매화와 달을 사랑했던 광사(狂士) 김시습은 천재였다. 수많은 천재 중에서도 천재가 인정하는 유일한 천재였다. 아홉 번이나 과거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천재 율곡 이이가 천재라는 기록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 김시습이다. 율곡은 ‘시습(時習)’이라는 이름 역시 김시습의 타고난 천재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적었다. ··· (김시습은) 태어날 때부터 천품(天稟)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세상에 나온 지 불과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최치운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주었다. 시습은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놀라워서, 글을 보면 입으로 읽지는 못했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

일두 정여창 · 사옹 김굉필 · 정암 조광조 · 회재 이언적

일두 정여창 · 사옹 김굉필 · 정암 조광조 · 회재 이언적 - 선비 정신의 사표(師表), 동방 사현(四賢) # 동방 사현(四賢)이란? 성종 시대에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士林)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정미사화의 참화(慘禍)와 재앙을 겪었다. 하지만 명종 말기 훈구파와 외척 세력의 마지막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 권간(權奸) 윤원형 일파를 단죄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후 사림은 선조 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집단으로 자리 잡아, ‘사림전성시대’가 열린다. 중앙 정치를 장악한 사림은 성리학을 국가 통치의 이념과 원리로 삼았으며,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적통(嫡統)과 도통(道通)의 계보를 세..

퇴계 이황

퇴계 이황 - 평생 ‘물러날 퇴(退)’ 한 글자를 마음에 품고 살다! # 퇴계(退溪) : ‘물러날 퇴(退)자를 호로 삼은 까닭은? 이황은 1570년 12월 8일, 나이 70세로 죽음을 맞았는데, 죽기 나흘 전에 조카 이영을 불러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내가 죽고 난 후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려고 청하면 사양해라. 또한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마한 빗돌에다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세계(世系)·지행(志行)·출처(出處)를 간략하게 서술하여 『가례(家禮)』에서 말한 대로 하라. ···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적어서 미리 명문(銘文)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꾸 미루어 오다가 미처 끝내지 못한 채, 어지러이 흩어놓은 난고(亂..

삼봉 정도전

삼봉 정도전 - 도담 삼봉인가? 삼각산 삼봉인가? # “이성계가 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성계를 이용해 조선을 세웠다.” 조선은 군사적 기반을 갖춘 이성계 세력과 유교적 이념으로 무장한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나라다. 이성계가 힘을 쓰는 ‘몸체’였다면, 정도전은 머리를 쓰는 ‘두뇌’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은 정도전의 정치 철학과 머릿속 설계도에 따라 건설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하나가 ‘신권 정치(臣權政治)’라면, 다른 하나는 ‘한양 도성(漢陽都城)’이다. 臣權政治란 재상(宰相)이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어 통치하는 것이다. 유교 국가가 이상으로 삼은 ‘민본(民本)과 왕도(王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임금의 권력 행사를 제한..

남명 조식

남명 조식 - 대붕의 기상을 품은 산림처사 # 남명(南冥) :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大鵬) 조식은 성리학자이지만, 동갑내기(1501년생)이자 학문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같은 전형적인 성리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요서(妖書)라고 배척했던 책인 『장자(莊子)』에서 자신의 호를 취했다. 이 책의 첫 장에 ‘남명(南冥)’이라는 말이 나온다. ··· 북녘의 아득한 바다[北溟]에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 이름은 곤(鯤)이고,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곤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변신하는데,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이 붕의 등 넓이 또한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 ··· 이 새는 바다에 큰 바람이 일어나면 남녘의 아득한 바다[南冥]..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 조선의 대표 화가, 3원(三園) # 단원(檀園) : ‘선비[士]’가 되기를 바랐던 화가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이다.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인물화, 불화, 동물화, 초충화(草蟲畵) 등, 그림에 관한 한 모든 방면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준 독보적인 인물이다. 김홍도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의 증조부인 김진창이 만호(萬戶)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와, 집안이 원래 무반이었으나 중인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어릴 적 그가 스승으로 모신 문인화가 표암(豹菴) 강세황의 『표암유고(豹菴遺稿)』 「단원기(檀園記)」의 기록으로 보아, 김홍도는 7~8세 어린나이부터 20세 때까지 경기도 안산에 살던 강세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그림..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 - 가사 문학의 산실(産室), ‘면앙정’과 ‘성산’ # 가사 문학과 호남가단(湖南歌壇) 무등산은 광주, 화순, 담양에 걸쳐 있는 웅장하고 수려한 산인데, 북서쪽 자락에 있는 성산(星山) 아래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한국가사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반경 10여 킬로미터 안에 세워진 면앙정(俛仰亭)·식영정(息影亭)·소쇄원(瀟灑園)·환벽당(環壁堂)·송강정(松江亭) 등을 무대삼아 호남의 문사(文士)들이 수많은 국문 시가(가사 문학)의 걸작들을 남겼다. 영남사림과 기호사림이 ‘도학(道學, 성리학)’ 연구와 그 실천에 힘을 쏟은 반면, 호남사림은 ‘시가(詩歌)’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문학 활동은 당시 조선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한시(漢詩)보다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율곡(栗谷) 이이(李珥) - 기호 사림의 본향 # 율곡(栗谷) : 기호사림(畿湖士林)의 본향(本鄕), 경기도 파주 율곡 이이라면 신사임당과 강릉 오죽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이이의 삶과 철학의 주요 무대는 경기도 파주의 율곡(栗谷)과 황해도 해주의 석담(石潭)이었다. 스스로 자호로 삼았을 만큼, 이 두 곳은 이이의 얼과 혼이 서려있는 장소다. 조선의 16세기는 ‘사림(士林)의 시대’였다. 사림의 역사는 멀리 포은(圃隱)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야은(冶隱) 길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길재는 경북 구미에 은둔했다. 이곳에서 길재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당시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숙자였다. 김숙자는 다..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 남인(南人)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 여유당(與猶堂) :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여유당(與猶堂)은 다산(茶山)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대표적인 호. 그가 생전에 저술한 500여 권의 서적을 모두 모아 간행한 전서(全書)의 제목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그의 고향 마을 생가에 오늘날에도 걸려 있는 당호(堂號) 역시 여유당(與猶堂)이다. 여유당이란 호는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남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정약용은 친가와 외가 모두 남인의 명문가였다. 그의 친가 직계 조상들은 8대가 연이어 문신의 꽃이라 하는 옥당(玉堂, 홍문관)에 오를 정도로 대학자를 다수 배출했고..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 # 윤상도 옥사 사건 윤상도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하여 종6품 부사과(副司果)에 승진했다. 윤상도와 윤한모 부자는 효명세자의 무능과 정2품 호조판서 박종훈, 종2품 어영대장 유상량, 종2품 유수를 역임한 신위 등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상도와 윤한모 부자는 반란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전라도 추자도로 유배됐다. 김노경은 윤상도 상소의 배후조종 혐의로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됐다. 윤상도는 유배지에서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아들 윤한모와 함께 능지처참 되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생부이며, 고종의 양부이다. 3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18세에 생부 순조를 대리청정하며 안동김씨 세도정치와 맞서 싸우다가 4년 만에 요절했고, 아들 ..

대동법과 김육

대동법과 김육 @ 대동법 개요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에 완성되었다. 호역(戶役)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과 잡역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 농민이나 영세 농민들은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포나 전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진왜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 또한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했으며,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

민중의 시대, 통일의 시대를 노래하던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며

민중의 시대, 통일의 시대를 노래하던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민중가이며, 만일 우리가 새로 국가를 만든다면 이걸로 하면 좋겠다 싶은 노래, ‘산 자여 따르라’라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을 만든 백기완 선생이 타계하셨습니다. 재수하고 있던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군부정권이 표면적으로나마 항복하고 직선제 대통령제가 부활됐을 때, 그는 대선 후보로 나왔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민중후보의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 자리를 내려놓았지요.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었어도 가끔 거리에 나가면 대학생들이 소리를 높여 외치는 소리를 듣곤 했었습니다. “가자,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

작호론(作號論) : 명(名), 자(字), 호(號)

* 이 글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한정주 지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작호론(作號論) : 명(名), 자(字), 호(號) - 이름[명(名)]과 자(字)와 호(號)는 어떻게 짓는가 @ 머리말 : 호(號)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최소한 셋 이상의 호칭을 지니고 있었다. 명(名)과 자(字)와 호(號) 명(名)이란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과 같다. 자(字)는 관례(冠禮, 성인식)를 치르고 짓는데, 그 까닭은 ‘이름을 귀하게 여겨서 공경하기 때문’이다. 관례를 치르고 나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를 지어 부르도록 했다. 다, 자를 지을 때는 반드시 이름(名)과 연관 지어 짓도록 했다. 관례는 대개 15~20세 때 행해진다. 명(名)과 자(字)는 부모나 어른..

근·현대사 인물들의 호(號) 소사전

* 이 글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한정주 지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근·현대사 인물들의 호(號) 소사전 * 김구 : 백범(白凡) : ‘백정(白丁)과 범인(凡人)’에서 각 한 글자씩 취함.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지도자로 대한민구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다.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을 막고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에 앞장서다, 반공 우익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백범(白凡)이라는 그의 호는 감옥에 갇혀있던 1913년에 지어진 것으로, ‘가장 미천한 신분인 백정(白丁)에서부터 평범한 보통 사람인 범인(凡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과 함께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원을 표시한 것. * 김대중 : 후광(後廣) : 그가 태어난 고향마을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後廣里)’ 지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