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없는 세계 경제 질서, 장기전에 대비하라
미국 없는 세계 경제 질서, 장기전에 대비하라
어느 유명한 시구처럼 세계 경제의 4월은 잔인했다.
지난 2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보편·상호관세 부과 계획을 밝힌 직후, 주가지수가 폭락하고 채권 금리가 요동쳤다.
1주일 만에 미국이 상호관세 90일 유예를 발표하면서 시장은 안정을 찾았으나, 계획대로 부과된 10%의 보편관세와 도합 145%의 대중국 관세, 그리고 중국이 미국에 부과한 125%의 보복관세로 인해 국제무역의 타격은 불가피해졌다.
상호관세가 언제 부활할지 모르고,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반도체, 의약품 대상 관세 부과 역시 코앞으로 다가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이 관세 부과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단기적 목표는 대략 세가지로 좁혀진다.
첫째로 수입 축소를 통한 무역적자 해소, 둘째로 세수 증대를 통한 재정적자 해소, 셋째로 자국 내 제조업 부흥이다.
문제는 세가지 목표가 상충할 뿐 아니라, 주먹구구식 관세 부과로 이 중 어떤 목적도 달성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컨대 관세로 인해 국외로부터 수입량이 감소한다면 세수 증대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며, 수입량이 감소하지 않아 세수가 는다면 무역적자 해소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관세를 통한 자국 제조업 부흥도 현재 미국 경제구조상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처럼 관세를 중간재와 원자재에까지 일괄적으로 부과하면, 생산비용이 증가하여 공급이 제한된다.
또한 무역상대국의 보복관세로 수출길이 막히면, 수요가 충분히 증가하지 않는다.
게다가 강화된 이민 통제로 제조업에 종사할 노동자를 찾기도 어려워졌다.
단기적 목표 이면에 있는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트럼프 2기 정책 구상자들에 따르면, 관세는 기존의 세계 경제 질서를 뒤집어엎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모습을 바꾸며 진화해 온 달러 중심 국제분업 체계는, 중국의 경제력 급부상, 미국의 산업 기반 붕괴, 전략 산업에서의 대외 의존도 심화로 귀결했다.
트럼프의 표현대로, 미국은 더 이상 “친구와 적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갈취당하는” 현실을 좌시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미국 시장에 접근하거나, 미국의 군사적 보호 또는 원조를 받거나, 달러 자산을 보유하거나 하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상호관세 수용, 대미 관세·비관세 장벽 축소, 미국산 물품 구매, 환율 조정 등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주장에도 구멍은 있다.
미국은 그들이 구축한 경제체제 아래서 “약탈당하고 갈취당한”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 미국은 달러를 공급하면서 세계의 공장들로부터 싼값에 물건을 살 수 있었고, 신흥국이 저가 경쟁에 집중하는 동안 고부가가치 첨단제조업과 서비스업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미국의 일부 제조업이 쇠퇴하고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은 건 사실이지만, 전체 경제는 세계화에 기대어 지속 성장했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생긴 부의 편중은 재분배 정책으로 해소해야 하는데, 트럼프는 정부의 역할을 외면한 채 애꿎은 자유무역만 탓한다.
미국이 도모하고 있는 세계 경제 질서의 전복은, 결국 자기 발등을 찍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국의 목표가 무엇이든, 그것이 정당하든 아니든, 그들이 내세우는 수단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든 없든, 트럼프의 등장으로 세계는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세계 경제 질서는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이미 변화해 오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산업을 일으키려 한 것은, 전임 바이든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팬데믹과 전쟁을 거치며, 일본, 유럽연합(EU), 중국, 인도 모두 자국 내 첨단산업 육성을 통해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려 했으며, 이는 가격효율성에 기반한 자유무역 체제의 균열을 의미했다.
트럼프의 정책이 투박하고 변덕스러운 면은 있지만, 지난 몇년간 진행된 세계 경제 질서 변화 추세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볼 순 없다.
수출 주도 산업화로 고도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에, 기존 질서의 변화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다음 대통령의 취임만 기다리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대행 체제에서 제시할 수 있는 카드로 협상에 임하되, 구체적인 관세율에 합의하지 말고 유예를 최대한 연장해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당시 시민사회의 반대가 우리 협상력을 높였던 것처럼, 대행 체제의 제한된 권한을 유예 연장의 지렛대로 사용해 볼 수 있다.
또한 협상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방미단에 국회 쪽 인원을 포함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관세 부과를 최대한 유예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 트럼프가 적대국뿐 아니라 동맹국까지 관세로 위협하면서, 미국 없는 국제 질서에 대한 구상이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달 취임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첫 순방지로 미국을 택하던 전통을 깨고, 프랑스와 영국을 먼저 방문했다.
유럽연합은 남미공동시장(MERCOSUR), 포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미국이 빠진 거대경제 블록과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베트남은 발 빠르게 중국과 접촉하여 공급망 협력을 약속했다.
우리나라도 이 흐름에 발맞춰 전략적으로 협력 상대국을 찾아야 한다. 가치를 공유하는 ‘유사입장국’을 넘어, 트럼프 관세에 함께 영향을 받는 ‘유사상황국’들과 적극적 연대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미국 없는 경제 질서’를 위한 논의는, 미국 역시 그 체제에 참여하도록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4월, 겨우내 묵은 땅에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는 잔인한 투쟁이 세계 경제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투쟁은 단기간에 끝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긴 안목으로 한국이 처한 현실을 읽어내고, 그에 맞는 대비책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느라 낭비할 시간은 없다.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