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출당’ 없는 사과는 아무 의미 없다
‘윤석열 출당’ 없는 사과는 아무 의미 없다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이 지난 24일 당 정강·정책 방송 연설에서 ‘계엄’에 대해 “국민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윤 원장은 ‘권력에 줄 선’ 국민의힘을 스스로 비판했다. 그리고 윤석열 전 대통령을 향해 “파면당하고 사저로 돌아간 대통령은 ‘이기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무엇을 이겼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에 남겨진 것은 깊은 좌절과 국민의 외면뿐”이라고 지적했다.
윤 원장은 이날 방송에서 사과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윤 원장의 ‘사과’에 대해 국민의힘 안에서도 응원과 박수가 나왔다. 조선일보는 이를 1면 톱기사(‘“계엄 뉘우칩니다” 윤희숙 연설 파문’)로 보도했고, 사설(‘국힘 정책연 “국민께 진심으로 계엄 사죄드린다”’)도 썼다. 잘했다는 것이다.
당 지도부가 자신들은 하지 않고, ‘대리 사과’를 칭찬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서 이 정도 목소리도 찾아볼 수 없었음을 고려하면, 윤 원장의 ‘대국민 사과’는 그 자체로 귀하다. ‘친윤’ 후보가 경선에서 1~2위를 다투는 국민의힘 분위기에서 이 정도 연설을 하려 해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윤 원장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노리고 이런 연설을 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윤 원장의 진정성을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연설문 전문을 보면,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계엄’을 사과했는데, 그 원인은 ‘우리 정치의 고름이 터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윤석열 아닌 국민의힘 누구라도 그 자리(대통령)에 있었다면, 계엄을 했을 것이라는 말인가.
윤 원장은 ‘다수당(더불어민주당)의 탄핵’을 언급하며 “잘못을 회피하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윤 원장 연설의 한계다.
사과는 구체적인 동시에 주체적이어야 한다.
계엄을 한 건 국민의힘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이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은 윤석열을 대신해 ‘계엄’을 사과할 게 아니라, 계엄 이후 대통령 탄핵을 한사코 막았던 점 등, 지금까지 국민의힘이 보인 여러 잘못된 행태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또 사과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윤 원장은 세가지를 당부했다. △차기 대통령 취임 첫날 당적 포기 △차기 대통령 임기 3년 △거국내각 구성 등이다.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고려할 때, 국민의힘 아닌 다른 정당 후보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이 잘못했다면서,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사과인가.
윤 원장의 ‘사과’에 대해 ‘탄핵 찬성’ 쪽인 안철수·한동훈 후보는 물론, ‘탄핵 반대’ 쪽인 김문수 후보도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러나 ‘사과’ 의향에 대해선 “사과할 때 돼서 하겠다”고 했다. 언제를 말하는가. 6월4일인가. 홍준표 후보는 26일 경선 토론회에서 “최종 후보가 되면 (사과를)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때도 그랬는데, 이젠 국민의힘 대선 후보들에게도 국민들이 사과를 간청해야 하나.
윤 원장은 연설에서 “환부를 깨끗이 도려내야만 새살이 돋고 새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며 “우리 정치도 이제 썩은 것을 도려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정치’가 아니다. ‘국민의힘’이다. 그리고 그 ‘썩은 것’은 윤석열이다. 윤석열을 도려내지 않고 무슨 ‘새살’과 ‘새 피’를 논하는가. 윤 원장은 다음 대통령은 취임 첫날 당적을 버리라고 했는데, 불법 계엄으로 탄핵 파면당한 전 대통령이 여전히 국민의힘 당원인 것은 아무렇지 않은가.
윤 원장은 “국민의힘은 지금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했지만, 윤석열이 여전히 당원인 정당이 뭘 뉘우친다는 말인가. 윤 원장은 “(만일) 계엄 계획을 당이 알았더라면 당내 많은 이가 용산으로 달려가 결사코 저지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로 들어가는 장면을, 말없이 가만히, 텔레비전만 보며, 국회 아닌 당사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던, 사람들이다. ‘용산’은 고사하고 바로 앞 ‘국회’ 길도 건너지 않았다.
앞으로 또 어떤 ‘미친’ 독재자가 이 땅에 나오더라도, 지금 국민의힘 의원들은 국민들을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덩달아 독재자의 편에 설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려면, ‘윤석열 출당’부터 하고서 논해야 한다.
한줌 윤석열 지지층 표를 긁어모아 대선 후보가 되겠다는 ‘소탐’이 계속되는 한, 국민의힘에 기대할 건 없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여전히 극우가 아닌 보수 정당을 자처하고 대표한다. 한국 보수의 비극이자, 한국 정치의 걸림돌이다.
국민의힘이 진정으로 보수 정당으로 탈바꿈하길 원한다면, 그에 맞게 행동하길 바란다.
보수 정당이 지금처럼 계속 제 궤도를 이탈하는 한, 한국 정치가 제대로 나아갈 수가 없다.
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