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김대중, 그리고 루스벨트
이재명, 김대중, 그리고 루스벨트
출발이 순조로워 보인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단기적으로 무엇을 우선 해결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국제 통상 질서의 변화와 12·3 내란으로 무너진 민생경제를 회복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이에 대한 기대감은 시장에 반영되어, 주가가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도 작은 감동을 준다. 김밥을 먹으며 몇시간씩 비상경제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안전치안점검회의에선 노란색 점퍼를 입고 “괜히 지자체에서 옷을 바꾸려고 돈 들이지 말아라”라고 말한 것도 그렇다.
실용적인 대통령이 정말 제대로 일해보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게으르고 무능한데다 도덕성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윤석열 전 대통령의 집권 3년 동안 국민이 한번도 느낄 수 없었던 기대감이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거의 모든 정부가, 정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국민의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때 지지율이 97%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인기 절정의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을 제치고, 10대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임기 말에는 지지율이 6%까지 떨어지며, 역대 대통령 중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다른 대통령들도 높은 기대와 지지 속에 출발했지만, 임기 말에는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대통령이 과연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첫번째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대내외 여건을 고려하면,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아 보인다. 냉정히 말해, 성공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비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인 성향마저 보이는 제1야당, 국민의힘과 협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대통령 선거 결과만 보더라도 국민 여론이 얼마나 극심하게 양분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재명 후보의 득표율(49.42%)과 두 보수 후보를 합한 득표율(49.49%)의 차이는 거의 없었고, 그 균열은 여전히 깊다. 지난 12일 공개된 엠브레인퍼블릭·한국리서치 등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율은 53%에 그쳤다.
경제는 말할 것도 없다. 불과 몇개월 만에 성장률 전망치는 0.8%로 반 토막이 났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도널드 트럼프의 관세 파동으로 수출 길이 좁아졌다. 한국은행은 올해 순수출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기여도가 0%에 그치고, 내년에는 -0.3%포인트로 낮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산업 경쟁력 역시 일부 예외적인 품목을 제외하면 이미 중국에 추월당한 상황이다. 일자리는 늘지 않고, 민생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윤석열 정부의 전례 없는 감세는 정부의 재정 여력을 축소해, 정부가 민생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여지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니 이 대통령이 후보 토론회에서 복지를 확대하자는 다른 후보의 질문을 받으면, ‘좋은 이야기이다. 다만 지금은 성장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답했던 것일 거다.
그러나 복지·분배 확대와 경제 살리기는 선택의 문제도, 선후의 문제도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라. 김 전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던 1998년 2월, 한국은 소위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에 직면했다. 김 전 대통령도 이 대통령처럼 경제 살리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는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권과 경제부처의 반대를 뚫고, 시민권에 기반한 공공부조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하고, 사회보험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면서, 한국 복지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대공황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뉴딜’을 통해 미국과 서구가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 대통령은 경제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김대중과 루스벨트가 왜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과감하게 복지와 분배를 확대했는지 숙고해야 한다.
지난 30년간 세계를 지배했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당분간 수출을 통한 성장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수출을 포기할 수도 없다. 인공지능 같은 첨단산업의 제조 역량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지금이야말로 김대중과 루스벨트처럼, 복지와 분배 확대를 통해 내수를 또 하나의 성장 엔진으로 삼는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모색할 때다.
이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해본다.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