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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해전 총괄

道雨 2019. 2. 28. 15:19




충무공 이순신 해전 총괄



충무공 이순신 해전 일람표


1592. 5. 7 : 옥포 : 왜선 26척 격침
        5. 7 : 합포 : 5척 격침
        5. 8 : 적진포 : 11척 격침
        5. 29 : 사천 : 13척 격침
        6. 2 : 당포 : 21척 격침
        6. 5 : 1차 당항포 : 26척 격침
        6. 7 : 율포 : 3척 격침, 4척 포획
        7. 8 : 한산대첩 : 59척 격침, 14척 나포
        7. 10 : 안골포 : 42척 격침
        8. 29 : 장림포 : 6척 격침
        8. 29 : 화준구미 : 5척 격침
        8. 29 : 다대포 : 5척 격침
        8. 29 : 서평포 : 8척 격침
        9. 1 : 절영도 : 9척 격침
        9. 1 : 초량목 : 4척 격침
        9. 1 : 1차 부산포 : 128척 격침


1593. 3. 6 : 웅포 : 51척 격침
     
1594. 3. 4 : 2차 당항포 : 31척 격침
        9. 29 : 장문포 : 2척 격침
     
1597. 2. 10 : 2차 부산포(무력시위) 
(1597. 7. 16) : 원균 칠천량 해전 대패 
1597. 8. 27 : 어란포 
        9. 16 : 벽파진 
        9. 16 : 명량대첩 : 31척 격침


1598. 7. 19 : 절이도 : 50여척 격침
        9. 20~10. 7  : 장도(해전)/ 왜교성 전투(명군 합동) : 30여척 격침, 11척 나포
        11. 19 : 노량해전 : 200여척 격침, 100여척 나포, 150여척 반파



기타 참고 연표


1591. 2. 13 : 전라좌수사 임명
1592. 4. 13 : 임진왜란 발발
1593. 8. 15 :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1597. 2. 25 : 삼도수군통제사 해임
1597. 7. 16 : 원균 칠천량 해전 대패
1597. 7. 23 :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1598 11. 19 : 노량해전 중 전사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주요 전투(해상, 육상) 목록


* 임진왜란


1592년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 ~ 4월 28일 
 상주 전투 : 4월 25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한강 전투 : 5월 2일
 옥포 해전 : 5월 7일
 합포 해전 : 5월 7일 
 적진포 해전 : 5월 8일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기강 전투 : 5월 18일 
 사천 해전 : 5월 29일 
 당포 해전 : 6월 2일 
 당항포 해전 : 6월 5일 
 용인 전투 : 6월 5일
 무계 전투 : 6월 6일 
 율포 해전 : 6월 6일 
 정암진 전투 : 6월 8일
 여주 전투 : 6월 10일
 제1차 평양성 전투 : 6월 15일 
 웅치 전투 : 7월 7일 
 이치 전투 : 7월 8일 
 한산도 대첩 : 7월 8일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제2차 평양성 전투, 해정창 전투 : 7월 17일 
 영천성 전투 : 7월 24일 ~ 7월 27일 
 지례 전투 : 7월 29일 
 제3차 평양성 전투 : 8월 1일 
 청주 전투 : 8월 1일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다대포 해전 : 9월 1일 
 서평도 해전 : 9월 1일 
 절영도 해전 : 9월 1일 
 초량목 해전 : 9월 1일
 부산포 해전 : 9월 1일 
 연안 전투 : 9월 2일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 ~ 1593년 1월 28일 
 창원 전투 : 9월 27일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제4차 평양성 전투 : 1월 9일 
 성주 전투 : 1월 15일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웅포 해전 : 2월 10일 ~ 3월 6일 
 행주대첩 : 2월 12일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송유진의 난 : 1월 11일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휴전기

1595년

1596년
 이몽학의 난 : 7월 6일


* 정유재란


1597년
 기문포 해전 : 3월 9일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고령 전투 : 8월 15일 
 남원 전투 :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직산 전투 : 9월 7일 
 벽파진 해전 : 9월 7일 
 명량 해전 : 9월 16일 
 석주관 전투 9월 22일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왜교성 전투 : 9월 20일 ~ 10월 7일 
 노량 해전 : 11월 19일 
 남해왜성 소탕전 : 11월 21일
 
 


1. 이순신의 1차 출동(1592. 5. 4 -5. 8 : 옥포, 합포, 적진포)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당시의 남부 쪽의 수군의 관할지는 경상좌도(부산에서 울진까지의 동해안)는 동래에 본영을 두고 있는 경상좌수영(수사 박홍)의 관할지였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휘하에 있는 경상우수영은 거제에 본영을 두고 경상우도(낙동강 하구에서 하동 앞바다의 남해안 일대)의 해안과 도서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여수에 본영을 두고 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은 여수에서 해남까지를, 해남에 본영이 있던 전라우수영(전라좌수사 이억기)는 해남에서 부안까지의 서해안 일대를 관할하에 두고 있었다.

개전 초기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휘하 함대를 자침시키고, 각각 언양과 남해도로 물러났다.경상좌수영의 경우 종전 때까지 일본군의 점령지 안에 있었고, 박홍 역시 육지에서 육군을 지휘하였기 때문에 이후 다시 재건되지 못하였다.
한편, 남해도 근처에서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던 원균은 일본 수군이 거제도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 육지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옥포 만호 이운룡이 전라도 수군에 구원을 요청하여 남해 앞바다를 지키고자 만류함에 따라, 그의 건의대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이순신은 휘하 장수를 소집하여 이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각 수영의 수군은 조정의 명령 없이 타 지역으로 출동이 불가능하였고, 더욱이 타 수영의 관할지역 안으로 진출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전을 반대하는 의견이 대다수였다.그렇지만, 경상도 해역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하면 전라도 해역도 위험하게 된다는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의 의견을 좇아 이순신장군은 출동을 결정하였다.

l차 출동 시 총 전함 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실제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위에서 보듯 포작선(어선)을 다수 징발, 동원한 것은 적에게 세력을 과시할 목적인 것으로 추정) (나중에 합류한 원균 휘하의 전함들을 합치면, 총 판옥선 27척, 협선 11척, 병력은 약 4700여 명으로 늘어남)


1차 출동시 전투편성표


주장(主將) 전라좌수사 이순신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

중부장 광양혐감 어영담
전부장 흥양현감 배홍립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우척부장 여도권관 김인영
좌척부장 사도첨사 김완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 유섭
우부기전통장 진군관 보인 이춘
한후장 군관 최대성
참퇴장 군관 배응록
돌격장 군관 이언량
유격장 발포가장 나대용
유수장 이몽귀




1. 옥포해전(5월 7일)


1592년 5월 4일 새벽 2시. 여수를 출발한 함대는 남해도 남쪽으로 미조항 끝에 이르러 함대를 둘로 나누어 우척부 김인영, 우부장 김득광,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정운 등의 함대는 계속 동진하여 개이도, 사량도 등을 수색하면서 진격하였고, 본진은 평산포, 곡포, 상주포등 남해도 일대를 수색한 뒤 소비포 앞 바다에서 합류하여 첫날밤을 숙영하였다.


5일 원균과의 약속 장소인 당포에 이르러 주위에 정찰선을 띄워 원균의 함대를 찾았으나, 원균의 함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원균은 다음날 1척의 판옥선을 타고 도착하였다.(원균이 도착한 다음 휘하의 기효근 등도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을 이끌고 개별 합류함)

원균에게 그 동안의 전황과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얻은 다음, 5월 6일 아침에 당포를 출발하여 거제 송미포에서 숙영하였다. 이 날 밤 거제도 동북쪽 가덕도에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5월 7일 새벽 4시 경 송미포를 출발하여, 적선들이 머물고 있다는 천성 가덕을 향하여 거제도 동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점심때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앞서 항해하던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 등으로부터 적 발견 신호인 신기전이 하늘로 올랐다.


옥포 포구 안에 일본선이 있음을 알게 된 조선 수군 함대는 장사진을 펴고 포구 안으로 일제히 공격했다. 일본전함은 30 여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일본군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 일부는 배로 돌아와 응전하였으나, 조선 수군이 일본 배를 에워싸고 옥포만호 이운룡을 선봉장으로 돌격하여, 천,지,현,황의 총통과 각종 완구를 이용하여 총공격을 가하니, 일본군들은 견디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조선수군에게 격침되었다.


전과는 적 대선 16척, 중선 8척, 소선 2척, 모두 26척을 격침시켰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아군의 손실은 전사자 없이 부상자 1명이다.



2. 합포해전(5월 7일)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영등포 앞 바다까지 진출하여 밤을 지낼 계획으로 군사들을 휴식시키려는데, 오후 4시경에 일본군의 대선 4척과 소선 1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일본선은 조선 수군이 뒤쫓아오자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합포 앞바다에 이르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추격하던 김완, 이순신, 어영담 등의 함대가 전함 4척과 소선 1척을 격침시켰고, 조선 수군은 밤을 타고 이동하여 남포 앞바다에서 숙영하였다. (이날 밤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찾아와, 조정이 서울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천도했음을 알려준다)



3. 적진포해전(5월 8일)


이른 아침에 진해 고리량에 일본군이 머물러 있다는 기별이 척후선으로부터 왔다. 즉각 출동하여 여러 섬과 포구를 수색하였으나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함대가 항로를 변경하여 저도를 지나 고성쪽으로 서남진하던 중, 척후선이 적진포에 일본 수군이 13척이 정박 중인 것을 발견했다. 함대가 적진포에 이르니 적선 13척이 포구 안에 정박해 있고, 일본군들은 육지에 올라 노략질하고 있었다.
좌부장 신호, 우부장 김득광, 중위장 이순신 등이 일제히 공격하여, 적선 11척(대선 9척, 중선 2척. 나머지 두 척은 도주함)을 격침시켰다.


이 전투가 끝난 후 함대의 수리와 보급을 위해 전라좌수영 함대는 여수로 돌아가고, 원균의 함대는 고성으로 귀항하였다.

1차 출동(5월 4일 ~ 9일까지) 3번의 해전에서 일본 수군 전함 42척을 격파하면서도, 조선수군의 피해는 전함의 손실 없이 부상자 1명 뿐이다(이 기록은 전라좌수영만의 기록임)
1차 출동 때의 일본 수군은 토도타카도라 휘하의 수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옥포 
  - 효충사, 옥포대첩 기념탑
  - 경남 거제시 팔랑포2길 87


[ 블로거 산책]


옥포해전의 자취를 찾아 417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만난 거제의 첫 인상은 낯설다. 열대식물 가로수 등 이국적인 정취와 함께 이곳에서 느껴지는 햇살도 눈이 부실만큼이나 맑다. 1999년 총 940m의 왕복 4차선 신거제대교가 개통되면서 더욱 가깝게 오갈 수 있는 거제도는, 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내륙의 해안지방으로 느껴진다.


거제라는 지명은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부터 거제군이라는 지명으로 표기되었으니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깊을뿐더러, 10개의 유인도와 52개의 무인도가 속해 있는 리아시스식 해안 곳곳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답고 빼어난 경관으로 찾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지역 내 산재해 있는 여러 문화재나 역사적 유적들은 휴양과 함께 둘러 볼 수 있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순신제독의 영정을 모셔놓은 효충사와 기념관 앞에서 바라보는 옥포 앞바다는 압권이다. 탁 트인 시야와 넓은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옥빛 바다를 가르며 떠가는 화물선과 각각 제 방향을 잡고 바쁘게 오가는 크고 작은 배들. 널따란 오목형 해안으로 이루어져 마치 넉넉한 어머니의 품을 연상케 하는 만의 건너편에서는, 수 마일이 떨어져 있음에도 쾅쾅거리는 해머소리와 기계음이 들려올 정도로 거대한 옥포조선소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이곳은 경상우수영 관할 해역이었다.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기세에 밀려 많은 군사를 잃은 뒤 전세가 걷잡을 수 없이 위급해지자, 이 곳 옥포가 전라도와 충청 지방에까지 이르는 해로의 목줄임을 깨닫고,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4월 15일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약 150여 척의 왜적 수군이 침공했다는 통보를 접한 이순신은 즉시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고, 전라병마절도사 최원, 전라도 관찰사 이광,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인 이억기에게 상황을 통보하는 한편, 연해안의 고을과 포구에 출전준비를 지시하였다 .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8관 16포의 수군 1만 2천여 명과 76척이나 되는 전선의 대함대를 거느렸음에도, 왜군의 기세에 눌려 4척만 이끌고 사천 쪽으로 도망쳐와 이순신에게 구원 출정을 요구했던 것이다.


4월 26일,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즉시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경상도 해역에 이르는 가장 신속하고 안전한 수로와 만날 장소 등을 문의함과 동시에, 예하 지휘관에게 4월 29일까지 여수 앞 바다에 집결토록 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4월 30일 판옥선 24척을 비롯한 협선 15척 그리고 포작선 46척을 여수 앞 바다에 집결시켜 함대 편성을 하고 최종점검을 마친 이순신제독은, 드디어 5월 4일 새벽 2시에 해상 결전장으로 출항하였다.
포작선이란 당시 어선으로서 왜군 함선에 비해 숫적으로 불리함을 감추고자 함대의 후방에서 기동하도록 한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


출정당일까지 입수된 정보로는 적이 낙동강 하구에서 여수방면으로 서진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나, 어디까지 접근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당포까지의 직선 항로를 택하지 않고, 남해도와 창선도 그리고 사량도의 서부 경상도 다도해 연안을 무려 380여 킬로미터나 2일간 밤낮으로 샅샅이 수색하면서, 5월 5일 원균과의 약속장소인 당포에 닿았다.


원균과 만남으로써 비로소 적 주력이 옥포(현 거제도 동북연안)에 있음을 알게 된 이순신은, 원균의 전선 4척과 협선 2척을 합류시켜 새로운 진영을 짠 다음, 5월 7일 옥포로 기습 진격하였다. 이때 일본 수군은 옥포만에 대, 소선 50여 척을 정박시켜 놓고, 상륙하여 포구의 민가를 약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발견한 왜군들이 배에 모두 탑승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포사격을 명하였다. 이는 바로 눈앞의 적 함선을 파괴해 버리면, 배를 잃은 왜군들은 육상에서 민가로 숨어 들어가 또 다른 2차, 3차 약탈을 벌일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순신의 함대는 배를 양익 형태의 일자진을 취한 채 함포사격을 실시해,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 26척을 일거에 격침시킨다.
이로써 전의를 상실한 나머지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부산 쪽으로 도망쳤다. 옥포해전의 승리는 임진왜란이 벌어진 이래 조선이 이룬 첫 승리이자 쾌거였다.


이순신 제독의 함대는 척후장으로부터 적 패잔선 5척이 웅천(마산)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이를 추격, 합포(진해) 앞 바다에서 5척 모두를 잡아 불태운 다음, 남포(창원)에서 밤을 지새고, 5월 8일 아침 일찍 진해만을 통해 한산도 쪽으로 항진 중, 적진포(통영군) 앞 바다에서 다시 적선 13척을 만나자 단숨에 격침시키는 추가 전과를 올렸다.
 
따라서 5박 6일간의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단 한척의 피해도 없이 적선 44척을 격파함으로써, 남해 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수립했다.


옥포해전은 임란발발 후 조선이 이긴 첫 승리였다. 그리고 이는 연전연승하며 무주공산식의 진격을 거듭하여 사기가 올라있던 왜군들에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왜군들은 수백 척의 군단을 이끌고, 부산포 방면에서 남해 바다를 거쳐 여수, 목포를 지나 서해 바다로 올라 올 작정이었다. 바로 수륙병진작전이다.


만일 인천이나 지금의 평택 지역에 수만의 왜군들이 상륙했다면, 부산 방면에서 육상으로 올라오고 있는 왜군과 합세되어, 조정의 안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였을 것이다. 이순신의 첫 승리는 그야말로 전세를 결정짓는 중요한 해전이었다.

실제로 서해바다를 통한 군수품과 후속 지원을 기대하였던 왜군들은 보급의 차질이 생겨, 경상도 방면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중부지역으로 진격하려던 육상부대의 진출이 더디어졌고 고립되게 되었다.



* 합포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공원 아래, 또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 마을 앞 바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끈 판옥선 24척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4척이 합동으로 전투를 벌여 옥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영등포 앞 바다에서 머물러 있던 중, 하오 4시쯤 왜선 5척을 발견했다는 척후장의 보고에 따라, 이를 쫓아가 웅천 땅 합포[현재의 진해 풍호동 학개, 또는 마산 합포 산호공원 아래]에 이르러 왜선 5척을 모두 분멸시킨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는 전라좌수군만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 적진포


적진포의 위치는 종래에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 일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춘원포(春元浦: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황리 사이 안정만), 당항포(唐項浦: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당동만(塘洞灣: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구당마을), 남촌진(南村鎭: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신용리(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신용리 상원·하원 부근), 적포(赤浦: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전도마을 적포만)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으며, 대체적으로 경상남도 고성군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5월 4일 본영인 여수를 출항한 이순신은, 당포(唐浦 : 현재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옥포·합포 등지에서 모두 31척의 일본 수군을 분파(焚破)하고, 8일 남포(藍浦: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귀산면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휴식하던 중, 고리량(古里梁)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순신은 즉시 모든 전선을 둘로 나누어 여러 섬과 섬 사이를 수색하면서, 돼지섬[猪島]을 지나 적진포 앞바다에서 왜선 13척을 발견하였다. 그때 왜적은 병선들을 포구에 한 줄로 매어두고, 대부분 상륙하여 재물을 탈취하던 중, 아군의 위용 앞에 당황하여 산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순신의 명령으로 낙안군수 신호(申浩),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 여러 장령(將領)과 군사들이 포구로 돌진하여, 대선 9척, 중선 2척 등 모두 11척을 분파하자, 왜적의 일부는 육지로 도망쳤다.


임진왜란 발발 후 수군의 1차 출동으로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하자, 왜적과의 싸움에 자신을 가지게 되어, 이 후의 작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2. 이순신의 2차 출동(1592. 5. 29 - 6. 7 :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 사천 해전(5월 29일)


  - 사천왜성(선진리성),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전기념비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육지에서 임진강까지 진격한 왜군은, 남쪽 바다를 경유해서 서쪽 바다를 통해 군수품을 보급할 계획이었다. 이에 왜군은 사천, 곤양까지 침범했고, 여기에 위협을 느낀 경상우수사 원균은 자신의 잔여 함대를 당포에서 노량으로 이동시켰다.


이순신은 이미 거제로의 2차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고, 6월 3일에 본영인 여수에서 전라 우수사와 합치기로 했다. 그러나 5월 27일 왜가 사천과 곤양까지 침입했다는 원균의 공문을 받고, 좌수영 단독으로 먼저 출발하기로 결정한다. 더 지체했다가는 이미 사천과 곤양까지 침범한 왜의 세력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


5월 29일 새벽,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전선 23척만을 이끌고 본진을 출발한다. 이때 처음으로 거북선 2척을 출동시킨다.
노량 앞바다에서 원균의 전선 3척과 만나 사천 앞바다에 이르러 작전 회의를 하던 중, 곤양에서 사천으로 향하던 왜선 1 척을 발견한다. 조선 수군은 이를 추격해 분파시킨 후, 사천 선창에 왜선 12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확인한다.


사천 선창 주변에 약 3km 가량의 산이 뻗어 있었는데, 그 위에 4백여 명의 왜군들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진을 치고 있었고, 붉은 깃발과 흰 깃발들이 어지럽게 꽂혀있어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왜인들은 조선 수군들을 내려다보며 칼을 휘두르고 발로 짓밟는 행동을 보였다.


왜군들의 교만함을 파악한 이순신은, 물러나는 척한다면 틀림없이 왜군들이 진 아래로 내려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게다가 썰물 때라 큰 배가 해변 가까이로 진입하는 것이 어려웠고, 왜군이 언덕 위에 배치하고 있어 지세로도 조선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해, 유인작전을 펴기로 한다.
조선 수군은 배를 돌려 후퇴하는 척한다. 그리고 1리도 못 갔을 때, 왜군 2백여 명이 진에서 내려와 총을 쏘기 시작했다.


때마침 밀물이 시작되자, 조선군이 반격을 시작한다. 먼저 거북선이 왜군들의 전선 사이로 돌격해 천. 지. 현. 황 포를 쏘아대자, 산 위, 언덕 아래에 있던 왜적들이 일제히 어지럽게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조선인들도 보였다.
거북선이 왜적의 진영을 흐트러뜨리는 동안 이순신의 배가 먼저 적진으로 향해 활과 대포들을 쏘며 공격한다. 나머지 함대도 따라 번갈아가며 공격을 퍼부으니 왜군들은 모두 언덕 위로 달아나 숨었다.


6월 1일 오전까지 치러진 이 전투에서, 왜군 400여 명 중 100여 명을 사살했고, 조선 소녀 1 명을 구출해 내기도 했다.
이순신이 어깨에 총탄을, 전선 제작 담당이었던 나대용과 이설, 많은 격군과 황 군들이 탄환에 부상을 입었다.
원균은 군사 없는 장수로써 지휘 통솔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가 끝난 곳을 찾아가 이미 죽은 왜적들의 목을 베는 일만 했다.



* 당포 해전(6월 2일)


  -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
  - 당포성지 : 경남 통영시 산양읍 당포길 12-18.  경남 기념물 제63호


조선 수군은 사천해전을 치른 후 사량도로 이동해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 날인 6월 2일 오전 8 시쯤 척후병으로부터 당포(지금의 통영 당포항)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0시경 당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포구에는 왜군의 대선 9척, 중. 소선 12척이 정박해 있었고, 300여 명의 왜인들이 있었는데, 그 반은 성 안에서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성 밖의 험한 지대에 의지해 총을 쏘아댔다.


조선군은 왜장 카메이 코레 노리[龜井玆矩]가 있는 왜 정선을 집중 공격한다. 거북선이 왜장이 탄 층루선 밑을 들이받은 후, 각종 포로 선제 공격을 한 후, 뒤에 있던 나머지 전선들이 화살과 화포를 일제히 왜 정선에 퍼붓는다. 이때 중의장 권준이 카메이를 화살로 맞혀 쓰러뜨리고, 첨사 김완과 군관 진부성이 적선에 뛰어올라 목을 베었다.


왜장이 죽자, 왜군은 전의를 잃고 육지로 도망갔고, 21척의 적선 모두 격침되었다. 잠시 후 왜선 20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당포로 들어오다가 조선 함대를 보고는 개도(현재 통영시 산양읍의 어딘가로 추정)로 도망쳤다.이 전투에서도 왜장선에 붙잡혀 있던 조선인들을 구출했다.



* 당항포 해전(6월 5일)


  -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조선 연합 수군은 당포에서 하루를 더 지낸 후, 다음날 왜선이 도망친 개도로 가보았으나 이미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고성으로도 가보고 싶었으나 조선군의 형세가 불리해 일단 참았다.
6월 4일 오전 10시경에 난리를 피해 산으로 숨어 있다가, 조선군을 보고 반가워하며 달려 나온 당포의 한 지방 병사가 보고하기를, 개도로 달아났던 20여 척의 왜선들은 거제로 향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수가 적어 작전을 펼치는 데 지장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오 즈음, 고대하던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에 돛을 달고 나타났다. 전투에 지쳐있던 장병들이 후원 부대를 보자 모두 기뻐하며 날뛰었다.
전선 총 51척이 된 조선 수군은 착포량(현재 통영대교 부근)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6월 5일, 왜선이 향했다는 거제로 가기 위해 바다로 나왔다.
이때 거제에 사는 향화인(왜적에 잡혔다가 도망쳐 온 사람) 등 7, 8 명이 배를 타고 나와, 당포에서 쫓겨 간 왜적들은 거제를 거쳐 고성 땅 당항포로 갔다는 정보를 전한다.


조선 수군은 배를 바로 돌려 당항포에 도착했다. 그곳에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있었다.조선군은 당항만 어귀에 전선 4 척을 숨겨둔 채 당항만 사이로 나란히 진입했다. 먼저 거북선으로 돌격하게 한 후, 그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이 번갈아 드나들며 화살과 대포를 퍼부었다. 여기서 만약 한 번에 공격을 완료한다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는 왜군들을 모두 섬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순신은 일부러 진을 거두는 것처럼 물러난다.


역시 예상대로 터놓은 길을 따라 큰 왜선이 나오더니 다른 배들도 호위하듯 따라 나왔다. 이때 여러 전선들이 포위해 한꺼번에 공격을 퍼부었다. 거북선은 층각선을 들이받으며 총통을 쏘아 깨뜨리고, 여러 배들이 불화살로 왜선의 비단 장막과 돛을 쏘아 맞혔다. 배를 버리고 산으로, 언덕으로 도망간 왜군들은 칼과 활을 들고 쫓아가 처치했다.
대부분의 왜선들이 격침됐는데, 이순신은 일부러 왜선 한 척을 부수지 않고 남겨둔다. 다음날 새벽, 육지로 달아났던 왜의 잔병들은 이 배를 타고 도망가려다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에 의해 전멸당한다.



* 율포 해전(6월 7일)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 대금리


당항포해전을 마친 조선 수군은 6월 6일까지 전선의 동정을 살피며 그대로 당항포에 머문다.
6월 7일 아침에 당항포를 떠나 영등(거제 장목면 구영리)에 이르렀는데, 왜선 7척이 율포(거제 장목면 율천리, 대금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때 후 척후장 김완(사도 첨사)과 우후 이몽구, 좌척후장 정운(녹도 만호), 광양 현감 어영담, 가리포 첨사 구사직, 여도 군관 김인영, 소비로 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나누어 추격해, 바다 위에서, 혹은 육지로 몰아 모두 격파시켰다.


6월 8일에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의논하면서 하루를 더 보내고, 9일에는 천성, 가덕을 샅샅이 수색한 후, 왜선이 없자 당포로 와 밤을 지내고, 10일 이억기, 원균과 진을 파한 후 새벽이 되기도 전에 출발해 본영으로 되돌아온다.
조선 수군의 임진왜란 2차 출동이었다.


왜적을 토벌하며 다니던 중, 조선 수군을 보고 반가워 숨어 있다 나온 피난민들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해, 이순신은 이들에게 왜선에서 얻은 쌀과 포목들을 나누어 주었다. 전라좌수영에는 생환 포로들과 보자기(주거가 일정치 않은 어민으로서 수군에 징용된 사람)들이 식구들이나 이웃들, 친척들과 함께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본영에서 가깝고 땅이 넓고 기름진 마을에 나누어 들여보내어 살게 했고, 군사들에게 전투에서 왜선을 불태울 때에는 특별히 살펴보고 공격하여 조선인이 피해 보는 일이 없도록 주의시켰다.


또한 그동안 조선에서는 장수의 공로를 평가할 때 직접 베어 온 적군의 머리 수로 평가했는데, 원균과 같이 남이 잡은 배에 위협을 가하면서까지 이미 죽은 왜군의 머리를 베는 일이 있으므로 자칫 아군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었다.
이 같은 폐단을 파악한 이순신은, 적의 목을 베지 않더라고 열심히 싸운 자들에게 상을 주겠다고 공표하고, 자체적으로 전공자에게 표창을 했다.
조정의 명령에 따라 표창하는 것이 규율이었으나, 선조가 평양까지 피난 간 마당에 중앙과의 빠른 연락이 불가능한 상태에다가, 군의 사기를 위해 시기적절한 표창이 이루어져야 했기에 내린 이순신의 과감한 정책이었다.



3. 이순신의 3차 출동(1592. 7. 5 ~ 7. 13 : 한산도, 안골포)


1592년 7월 8일 이순신 연합 함대는 미륵도의 당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견내량 북단에 나타났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적선은 73척, 원래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공을 탐내어 자신의 함대만을 먼저 출동시켰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으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이 견내량에 나타났다면 곧 공격해 올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대접전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어디서 싸울 것인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였다.​
​​
이순신은 한산 앞바다를 선택했다.
견내량은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은 바다로, 120 여 척이 넘는 양측 전선이 엉켜 싸운다면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패주한 적이 거제와 통영 고성 방면으로 상륙한다면 백성들이 입을 피해도 생각해야했다.
그렇다면 일거에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
조선 판옥선은 56척, 전선 숫자만 봐서는 적보다 적은 상황, 적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선제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순신 함대가 일본 전선을 찾아다니며 전투를 벌였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모든 채비를 갖춘 일본 정예 수군 대부대가 공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그동안의 패전을 일거에 만회하려는 적을 무찌를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이순신은 진중회의를 열고 원균과 이억기 두 수군절도사와 장수들에게 전황을 설명한다.
이순신은 학익진을 펼칠 것을 주장하고 장수들은 놀란다.


​이순신이 구상하는 작전에는 여러 걸림돌이 있었다.
어떻게 적을 유인할 것인가, 과연 적이 아군의 유인 전술에 넘어올 것인가,
아군의 유인책에 걸려든다 하더라도 적의 함대를 에워싸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학익진을 펼치려면 함대가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반월형의 일정한 진형을 유지해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아군 판옥선끼리 충돌하는 불상사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 학익진이다.​
​​
이순신은 즉각 5, 6척의 판옥선을 띄워 견내량 북쪽 덕호리 포구에 주둔하고 있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부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선 판옥선을 본 와키자카 함대는 곧 응전해 왔다. 이순신의 예상대로였다.
적장은 한시 바삐 전공을 세우고 자신의 진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자랑하고 싶은 조급증이 있었다.

​포구를 향해 쳐들어가던 조선 판옥선이 일본군의 응전에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일본군 전 함대가 조선 판옥선을 쫓아 나왔다. 개전 이래 단 한 척의 조선 판옥선도 격침시키지 못한 일본군들이었다. 일본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조선 판옥선을 뒤쫓았다. 일본 기록에 보면 약 3리를 뒤쫓았다고 쓰여 있다. 당시 일본의 1 리는 우리 식으로 환산하면 약 10리이다. 조선 선봉대와 일본 함대는 약 12킬로미터에 걸친 추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수군의 유인책이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산 위의 조선군 탐망군들에 의해 그대로 이순신에게 보고되었다.
탐망군들은 깃발로 이순신에게 조선군과 일본군의 현재 위치를 알렸을 것이다.
이순신은 주력 함대를 두 개로 나누어 한산도와 미륵도 섬 그늘에 매복하도록 했다.
드디어 저 멀리 조선 함대가 견내량을 빠져나와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일본 함대가 새까맣게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조선 함대를 향해 조총과 활을 쏘아댔다.

​이순신은 조선 함대가 시야에 크게 들어오자, 한산도와 미륵도 양안에 매복해 있던 조선 주력함대에게 명령을 내려 전 속력으로 신속히 움직이도록 하였다. 양쪽 섬에서 일렬종대로 나온 함대는 자연스럽게 한산도와 미륵도 사이의 바다를 일자로 막아섰다.
양 진영 함대의 맨 끝에는 거북선이 각각 배치되어 있어 거북선이 학의 날개 끝이 되었다.


조선의 주력 함대가 섬 그늘을 빠져나와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쫓겨 오던 판옥선들도 방향을 90도로 틀어 다가오는 일본 함대를 향해 포격태세를 갖추었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함대의 가운데 부분은 물살에 약간 밀리면서 조선함대는 자연스럽게 폭이 깊은 반월형 진형을 갖추었다.​


조선 판옥선을 쫓아오던 왜장 와키자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너댓 척의 조선 배를 추격해 왔는데, 어느 순간 조선 주력군이 눈앞을 막아선 것이다.
​​와키자카는 함정인 걸 알고 멈추어 섰지만 때는 늦었다.
일본 배의 선두가 조선 함대를 보고 놀라 멈추자, 영문도 모르고 따라오던 후미의 전선이 앞선 배를 들이받기 시작했고,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일본 함대는 진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조선 함대는 넓게 펼친 날개를 조금씩 조여오기 시작했다. 날개의 양끝은 거북선이 맡았다.

드디어 외곽부터 조여오던 조선 함대에서 포격이 시작되었다.
일본 함대의 후진은 불가능한 상태로 정면과 측면은 조선 함대에 완전히 둘러싸였다.
일본 장수들의 독려로 조총 사격을 가해 왔으나 조선 함대는 노련했다. 마치 먹이를 가둔 맹수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차근차근 정밀 포격을 하면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일부 일본 전선이 포위망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포위망 바깥에는 무시무시한 거북선이 있었다.
거북선은 빠져나가려는 일본 전선들을 차례로 당파했다.​

​학의 날개에 갇힌 일본 전선, 그들에게 학의 품은 지옥이었다. 회전 반경이 큰 일본 함대는 좁은 공간에서의 활동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평저선의 조선 함대는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며 포격을 가했다. 적이 가운데 몰려 있어 대략만 조준해도 명중률이 높았다.
와키자카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강력한 조선 수군의 포격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바다에 빠진 와키자카는 간신히 거제도로 헤엄쳐 갔다.
한나절 만에 73척의 대함대 중에서 59척을 잃었고, 9000명의 군사를 잃었다.​

​이순신은 잔적 소탕에 여념이 없는 군사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어렵다던 학익진을 훌륭하게 펼쳐 보인 자신의 부하들은 기적 같은 승리의 주역이었다.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전선도 손상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적의 대함대를 격멸시켰다.



전술가들이 보는 한산대첩



1.  일본군 수뇌부의 결단

일본군은 초조했다. 육군은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차지했으나 남해 바다가 문제였다.
생각지도 않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 출현으로 연전연패, 보급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군의 애초 계획은 남해와 서해를 통해 한강과 대동강으로 보급을 하는 것이었다.
군량과 무기, 지원병 등을 모두 해상으로 수송할 계획이었다.
그것이 조선 수군에 의해 막히면서 육로 수송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수송 수단이던 배를 이용하는 대신 말과 인력으로 보급품을 수송해야 했다.
하지만​ 조선 의병들이 일본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여 원활한 보급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일본 수뇌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해로를 뚫어야 했다. 일본 수군 전력을 총집결하여 이순신 함대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일본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수군 장수들을 모두 모았다. 육군을 따라 북상했던 일본 수군의 용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해군에 전격 투입했다.​


2.  특별한 전술 (학익진)

학익진이란 대형을 학의 날개처럼 넓게 펼쳐 그 안에 적이 들어오도록 하여 포위하는 진법이다.
주로 육전에서 사용되는 전술이다.
적의 예봉이나 본대를 아군의 품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방을 둘러싸는 진법.
유능한 장수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술로 학익진을 펼치려면 잘 훈련된 군사가 필요했다.
지휘관의 신호에 따라 모든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지휘 전달이 잘못되면 학의 날개가 찢겨 나가고 포위망이 뚫리고 적의 반격에 노출될 수 있다.​

3.  와키자카의 마음을 읽은 이순신


적장은 그동안 육지에서만 싸운 장수라 했다. 그는 지금 그동안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몸이 달아 있을 것이다.
견내량 북단에 정박하고 있는 적을 유인하여 한산 앞바다까지 오면 된다. 아직 조선 수군의 위력을 제대로 모른 채 의욕만 앞서 있을 것이다.​ 쉽게 유인책에 넘어올 가능성이 있다.

유인책은 조선함대로서는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일본 전선의 속도는 조선 판옥선을 능가했다.
장거리인데다 견내량 좁은 바닷길을 잘 아는 조선함대는 쉽사리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암초와 섬 사이를 넘나들며 적선을 유인했다.​

​​
4.  한산대첩이 해전사에 빛나는 까닭

이순신의 고뇌에 찬 결단이 있었기에 한산대첩이 가능했다.
이순신의 학익진이 주목받은 이유는, 누구도 학익진을 해전에 적용하리라 생각지 못했을 때 이순신은 학익진을 펼쳤고, 그리고 멋있게 성공해냈다.
​이순신 이전, 세계 해전은 그야말로 육박전에 백병전이었다. 그것을 총통을 이용한 포격전 개념으로 바꾸었다. 포격전에서 이순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본격적인 진법을 적용했던 것이다.
육지와 달리 바다는 날씨와 파도 등 미묘한 변수가 많아, 전 함대의 속도와 방향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학익진이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지휘를 한 치 오차 없이 수행해 학익진을 성공시켰다.


​5.  이순신의 가장 큰 약점

​이순신에게 가장 큰 약점은 자신을 대신할 만한 장수와 군대가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조선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이순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단 한 번 패배는 곧장 조선이라는 나라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불확실성에 함부로 도전할 수도 없었다.
과연 학익진을 펼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서 이순신이 택한 것은, 자신이 펼치려는 진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 블로거 산책 ]


이순신은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9일 간, 견내량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 및 안골포(安骨浦)로 3차 출전을 하였다.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선 49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6일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7척과 합세하여 모두 56척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순신은 협소한 견내량이 해전에 적합하지 않음을 파악하고, 일본의 대선단(大船團)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각종 총통을 쏘아 먼저 2~3척을 격파하였다.
일본 수군이 겁을 먹고 도망하려 하자, 왜적선을 유인하여 도망가는 척 하다가 일시에 역회전하여 학익진법(鶴翼陣法)을 폈다.

이로써 층각선(層閣船) 47척을 쳐서 깨뜨리고, 12척을 나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견내량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간신히 김해로 도주하였고, 나머지 적선 14척도 겨우 도망갔지만, 이틀 뒤 안골포에 있던 적선 28척까지 모두 42척을 격침시키고, 육지로 도망한 왜군 150급을 참획하는 등, 개전한 이래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왜적선 90% 이상을 무찌른 이 전투가 바로 한산해전(閑山海戰)이다. 이 때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산해전의 승리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왜의 호남 진출을 좌절시키고, 나아가 왜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산도에서 패전한 뒤로 전략을 바꿨는데, 그 전략은 조선 수군을 만나면 도망가라는 것이었고, 내륙에 올라가 방어 작전을 펴라는 것이었다. 방어 작전은 물론 성을 쌓고 조선 수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 해전으로 전쟁은 실질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순신의 해전 승리로 왜의 침략 전쟁은 활기를 잃었고, 더 이상의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산해전 요약>


◎ 1차 전과
일자 - 1592년 7월 8일

해전명 - 견내량해전(見乃粱海戰)

조선 수군 - 이순신 함대 : 24척(판옥선 21, 거북선 3), 원균 함대 : 7척, 이억기 함대 : 25척 등 총 56척

왜군 - 73척

전과 - 47척 격침, 12척 나포, 14척 도주피해 - 전사 19명, 부상 114명


◎ 2차 전과
일자 - 1592년 7월 10일

해전명 -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조선 수군 - 이순신 함대 : 24척(판옥선 21, 거북선 3), 원균 : 7척, 이억기 함대 : 25척 등 총 56척

왜군 - 42척

전과 - 42척 격침



* 한산대첩(7월 8일)
  - 한산대첩기념비 :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산 42-1
  - 충렬사 :  경상남도 통영시 여황로 251(명정동)


* 안골포해전(7월 10일)
  - 안골포굴강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517-9
  - 안골 왜성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


안골포는 조선수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안골포굴강이 있었다.
안골포굴강은 조선시대 군선의 정박처로서, 선박의 수리 및 보수, 군수물자의 수송, 선박의 계류와 정박을 목적으로 축조한,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로 안골포진성의 북서편 지척의 거리에 축조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굴강유적이 5-6개소에 이르고 있으나 대부분 흔적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안골포굴강은 상부의 서축이 일부 허물어지기는 하였으나, 하부는 매몰되어 온전히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드러나 있는 굴강의 유구가 협소하여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매립되어 육지로 변해버린 기존 도로에도 굴강이 연결되어 있거나 굴강과 관련된 유구가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천 안골왜성(熊川 安骨倭城)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외에 있는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1938년 5월 3일 사적 제53호 『안골리성』으로 지정되었지만, 그 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 재평가에 의해 1997년 1월 1일에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고,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축성을 지휘하였으며,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씩 교대로 수비를 담당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

성의 둘레는 594m,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며 성내의 전체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성곽이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혼마루를 이루고, 비탈을 깎아내면서 니노마루, 산노마루로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노보리이시가키)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이 성곽의 축조에는 5만 명 가량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출입은 육지 쪽을 막고 바닷길을 이용하기 위하여 바닷가에 이르도록 해자를 파서 교통로로 이용하였는데, 해안으로 드나들기 위한 통로가 만들어진 것도 왜성이 가지는 특징이다.


1593년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 이후 일본군은 충돌을 피하며 강화 분위기로 돌아섰으며, 동년 2월경에는 서울에 결집한 제 장수들 사이에 경상남도 연안지대의 성곽 축성이 계획되었다.


이후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으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수군을 해상에서 억제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 일대의 요충지에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안골왜성도 이때 축성되었으며, 축성을 담당한 장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이고,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을 주기로 수비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제포진의 첨절제사 진영을 안골왜성에 두었다가 1625년 인조 3년에 옮겨가고, 다시 가덕진 소속의 수군만호 진영을 두었다.
안골왜성은 조선 수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뒤에는 폐성이 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  - 안골포해전


한산(견내량)해전이 끝난 지 이틀째, 이순신은 척후선을 운용하여 일본군을 살폈다. 한산 해전에서 섬멸된 적은, 원래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했던 병력의 일부라는 것을 이순신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안골포에 40 여 척의 적선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고, 와키자카 함대와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했던 일본군으로, 조선 수군을 선제공격하려는 일본군 함대의 일부가 아직도 건재했다.​
​​
1592년 7월 10일 새벽 4시경 먼동이 희뿌옇게 밝아올 시각, 이순신 함대는 외즐포를 출발했다.
안골포 포구 앞에는 작은 섬이 두 개 있었다. 섬 이름은 송도와 연도. 이순신은 함대를 정지시켰다.​ 함대를 분리하여 전라우수사인 이억기 부대를 후미의 송도에 남겨두었다.


​​이억기 함대의 역할은 만약 있을지도 모를 적의 구원병을 견제하는 것이고, 이순신 함대가 안골포 깊숙이 들어가 있는 동안 부산의 일본군들이 배후를 치는 것을 막는 임무였다.
또 이순신 함대가 일본 함대를 유인해 나오면 그 때 합세하여 적을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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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일부러 천천히 접근하여, 적이 아군의 공격을 알고 충분히 대비한 후 역습해 나오기를 바랬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순신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가 가까이 접근해도 일본 함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산 앞바다에서 어떻게 70 여 척의 일본 함대가 참패를 당했는지 이미 들었던 것이다. 이순신 함대와 맞붙어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정면 대결을 피했다.
​​
기다리던 이순신이 먼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함대가 속도를 높여 접근하자, 일본군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주력함대는 그대로 포구에 묶어둔 채, 단 세 척의 전선만이 달려 나와 조선 함대를 막았다.
그들은 방패를 높이 세우고 조총과 화살을 날리며 격렬한 사격을 가해 왔다.

​조선수군은 완구를 준비하여 단석을 발포 세 척의 일본 전선에 명중시켰다.
단석의 충격으로 일본 전선의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일본 전선은 쉽사리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수심이 얕아 반쯤 기울어진 채 버티며 그 위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보통의 일본군과 달랐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면 그대로 바다로 뛰어내려 도망을 가던 일본군과 달리,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저항하는 일본군을 향해 불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드디어 세 척의 일본군 저항선이 무너졌다.
​​
그러자 또 다른 전선 세 척이 나와 조선 수군을 막아섰다. 또다시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자살 특공대를 운용하며 지구전을 계획하고 있는 듯했다.
세 척씩 나와 막아서는 일본군 결사대의 ​저항으로 전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일본군은 소규모 자살 특공대를 내보내 이순신 함대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순신은 이들의 속셈을 곧 알아차렸다. 시간을 벌면서 부산 주둔 일본군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라면 이억기 부대가 ​ 잘 막아줄 것이다.
일본군 지휘부는 이순신 함대를 지연시키면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만약 조선 판옥선이 갯벌에 얹히게 되면 ​전세는 조선군에게 크게 불리할 것이다.
이순신은 물때를 살피면서 썰물이 시작되면 즉각 퇴각할 것을 명령한다.


​​송도에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 부대는 부산에서 올 일본군의 구원병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럴 즈음 신기전이 올랐다. 신기전은 신호용으로 이억기 부대를 부르고 있었다.
이억기 부대가 나타나자, 세 척의 일본군 특공대는 순식간에 사기가 꺾였다.
지금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상대만도 벅찬데, 그만한 규모의 조선 함대가 또 나타난 것이다.
 
​일본군은 생각지도 못한 강적의 출현에 저항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순신은 적에게 새로운 이억기 부대를 합류시키면서 저항의지를 완전히 꺾어 버린 것이다.
이순신은 물의 깊이를 살피면서 총공격을 명령했다.​
조선 수군은 수심을 살피면서 안골포의 적선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40척의 적선 70 퍼센트 가량이 격침 소실되었다.


해가 질 무렵  물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자, 이순신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조선 함대는 안골포를 바라보며 천천히 배를 뒤로 물렸다.
완벽한 승전이었다. 그날 밤 일본군들은 배를 버려두고, 육로로 부산방면으로 모두 퇴각했다는 첩보가 입수 되었다.​


​한산해전과 안골포해전을 치른 이순신의 3차 출동도 끝나가고 있었다.

장수들과 군사들은 여수 본영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이순신도 귀환 필요성을 느꼈다.
큰 해전을 치르면서 전사자 20여 명에, 부상자도 10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가덕도 임시 주둔지에서 부상병들의 상태를 살핀 이순신은 귀환을 하루 늦추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휘하 장수들에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이순신은 전 함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휘하장수들은 깜짝 놀랐다. 동쪽은 적의 본거지가 있는 부산이었다.
이순신은 몰운대까지 진출을 명령하였고, 몰운대는 부산까지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적의 경계가 삼엄하고 적의 육군과 해군이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곳이었다.

​첨자진을 형성한 조선 연합 함대는 긴장 속에서 유유히 부산 쪽으로 접근했다.
조선 함대의 출현을 알리는 일본군의 봉화가 몇몇 산 정상에서 피어올랐다.
동쪽으로 항진하는 중 만난 일본 척후선은 조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부산 쪽으로 도주했다.

이순신은 각 함대에 공포탄을 발사하도록 명령했다.
수백 문의 총통에서 연신 폭음을 터뜨리고, 그 소리는 온 바다를 메우고도 남았다.​
장관이었다. 각종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유유히 적진 한가운데 바다를 항진하며 수백 발의 총통을 발사하는 조선 함대, 그것은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이자, 이순신의 기발한 함대 시위였다.
몰운대와 부산에 은거한 적에게 조선 함대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순신의 이 함대 시위에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 모두 숨을 죽이고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순신은 유유히 여수로 돌아왔다.
다시는 우리에게 대적할 생각조차 말라는 이순신의 강력한 경고이자, 조선 수군에게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를 올려준 항진이었다.​




[ 블로거 雪中梅 ]


일본 장수 와키자카가 기록한 한산 해전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크게 패한 와키자카가 묘사한 이순신의 기록을 통해서 학익진과 한산도대첩을 써 보려고 합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당시 한산도 이전에 용인에서 1천 명 정도의 군사로 조선의 5만 오합지졸을 격파한 장수입니다.
역시 인간의 자만심은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와키자카는 자신의 일기에서, 5척의 조선 수군이 선제공격을 해서, 단번에 박살내겠다는 마음으로, 73척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정예수군을 이끌고 견내량을 넘어선 추격을 합니다.
이전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2차 출전까지 격파한 왜군은 전문 수군이 아니라 단지 수송선에 탄 일본의 육군이나 수송대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산도에서의 와키자카 함대는 일본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전문적인 수군 병력이었습니다.
이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일본 전국시대의 시코쿠의 모리나 시마즈를 점령하기 위해 혼슈에서 배를 타고 넘어가서 오다와 그 휘하의 히데요시의 육군에게 보급을 하고 그리고 자체적으로 방어하는 전문수군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선봉장은 와키자카였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국시대에 육전에도 참가하는 장수이나, 원래 수군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 장수였습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특별히 와키자카를 용인에서 불러내려, 역시 조선의 전문수군집단인 이순신의 함대를 격파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와키자카가 밝히길 "나는 이순신에 대해서 몰랐다. 단지 몇 번의 해전에서 이긴 장수로만 생각했고, 승리를 자신했다"에서, 와키자카는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의 부장으로 활약하며 쌓은 경력만 믿고 한산도 앞까지 추격을 합니다.
 
그때 그의 일기는 이런 기록으로 바뀝니다

"30리쯤 추격했을 때 선봉의 조선수군이 갑자기 방향을 돌렸고, 한산도 후방의 양쪽에서 다른 조선 수군(이억기의 함대와 원균의 함대)이 나타났고, 그들은 반달 형태로 나의 전선을 포위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학익진입니다. 현대 해군에서조차 감탄을 금치 못 하는 점은, 바로 레이더나 측량기가 없던 시절에 정확히 측면에서의 포위거리가 정확했던 점입니다.
왜냐면 한 치의 오차가 있을 경우, 측면의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맞히지 못 했을 경우, 다른 측면 날개에서의 조선 수군이 아군의 포탄에 맞아 대형이 무너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군은 육군과는 달리 함대의 진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끝장입니다. 원균의 칠천량 해전도 어느 한쪽의 진형이 무너지니 일파만파로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점이 이를 증명합니다.
 
와키자카의 기록은 계속 되는데, 쌍학익진 그러니깐 쌍학익진은 두 겹으로 측면의 함대가 형성되어, 한쪽의 함포사격이 끝나면 재장전 시간동안 기존의 함선이 후방으로 물러나고, 뒷쪽의 함선이 전방으로 배치되어 쏘아 연발 형식으로 나아가는 구도입니다.
이것을 해군사관학교에서는 1591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어 1년 동안 얼마나 고된 훈련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산도 대첩인데, 이것으로 히데요시가 믿었던 일본의 전문 수군 즉, 육군이 배에 타서 총만 쏘는 그런 수군이 아니라, 아예 수군으로 훈련되어 그 역할에 충실했던 일본의 진짜 수군이, 1만 명 가까이 충무공에게 떼죽음을 당하고, 59척이 격파 당한 것입니다.
 
이후 드라마와 같이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그의 일기에서 몇 날 몇 일 동안 기록하기를 "이순신을 난 몰랐다. 허나 그들은 우리를 잘 알고 있었다" 하며, 패전의 아픔을 방구석에 쳐박혀 삭히고 있었다고 합니다.
 

학익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 드리면, 충무공의 학익진은 드라마와는 달리, 날개에서의 진은 두 겹이었다고 합니다. 날개 1진의 함대가 함포를 쏘고, 재장전 시간동안 2진의 함대가 전방으로 나서서 쏘고, 그리고 충무공의 최종명령!!!
바로 전 함대 돌격이었습니다.


거북선 지휘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과 이기남 2척이 선봉으로 적선을 깨뜨렸고, 그 후에 판옥선 전체가 돌격하여 바다에 빠진 왜군을 사살했고, 일부는 적선위에 올라서 정신없는 왜군을 죽이기도 했습니다(드라마에서는 무조건 함포만 쐈다는데 아닙니다)
 
왜구의 후예이자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전문 수군으로 양성되어, 나중에 히데요시가 시코쿠의 시마즈와 규수의 모리 가문을 복속 시킬 때 큰 일조를 한 와키자카의 수군은 이렇게 전멸했고...
 
당연히 전문 수군이라 이길 줄 알았던 히데요시는, 이후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피해라는 해전금지령을 내렸고, 기본적으로 평양에 진출한 고니시의 군대가 심근경색에 걸리는 결과를 초래하여 전세를 뒤짚었습니다.
 
한산도의 와키자카 함대는 일본 육군이 탄 수송선 역할이 아닌 전문적인 수군들인지라, 히데요시는 기대가 컸던 만큼 전략을 아예 변경 할 만큼 충격이 컸습니다.
그래서 한산도에서 분멸한 적선 59척은 일본 정예 수군 장병들인 만큼, 일본으로서는 수륙병진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이순신의 4차 출동(1592. 8. 24 ~ 9. 1 :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1차 부산포)

     

     

      8. 29 : 장림포 : 6척 격침
      8. 29 : 화준구미 : 5척 격침
      8. 29 : 다대포 : 5척 격침
      8. 29 : 서평포 : 8척 격침
      9. 1 : 절영도 : 9척 격침
      9. 1 : 초량목 : 4척 격침
      9. 1 : 1차 부산포 : 128척 격침



충무공의 한산해전이 있던 7월에, 금산(錦山)에서는 고경명의 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의병들이 모두 전사하고, 다시 화순(和順)의 최경회(崔慶會)로써 대장을 삼았으며, 임계영(任啓英)은 양성(陽城)사람으로 충청도에서 일어났고, 그러는 중에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서산(西山) 대사는 전국 사찰에 명령을 내려 승군을 일으키니, 관동서에서는 사명(四溟)대사, 호남에서는 처영(處英) 대사 들이었다.


한산해전이 있은 다음 달인 8월 18일에는 조헌(趙憲)의 부자와 영규(靈圭) 대사들 700명이 금산에서 전사하고, 다시 한편으로 우성전(禹性傳)은 경기에서, 이정암은 황해도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러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한 편, 공은 본영에 돌아와 있어, 장차 각처에 널려 있는 적의 육군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수군들과 합세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전라 좌-우도의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을 한결 더 엄격히 정비하며, 이억기와 조방장 정걸(丁傑)들과 함께 전략을 협의했다. 그래서 8월 24일에 다시 여수 본영을 떠나, 노량진으로 나갔다.
 
그날 밤 자정에 달빛을 타고 행선하여 사천 모지랑개(毛思郞浦)에 이르렀고, 25일은 당포에 이르러 자고, 26일에는 거제땅 각호사(角呼寺) 앞바다에서 잤다.
27일에 원균과 의논하고, 저물 녘에 창원 땅 서원포(西院浦)를 건널 무렵에는 서풍이 차게 불어, 공의 마음이 몹시 산란했다고, 공의 일기에 적혀 있음을 본다.
 
29일 밤, 공은 영남, 호남 우사들과 협의했다.
 "부산은 적의 근거지가 되어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굴을 없애버려야만 적의 간담을 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공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9월 초1일 새벽, 전 함대를 이끌고 부산포를 향했다. 아침 8시 쯤, 몰운대(沒雲臺)를 지나면서 왜의 큰 배 5척을 만나고,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서는 왜의 큰 배 8척을 만나고, 서평포(西平浦) 앞바다에서는 적의 큰 배 9척,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서는 왜의 큰 배 2척을 만났는데, 공은 3도 수군을 합력하여, 이들을 남김없이 깨뜨렸다.


그리고 그 길로 부산 앞바다에 이르니, 선창 동쪽 산기슭 언덕 아래 정박해 있는 왜적선들은 대, 중, 소 합하여 470여 척이나 되었다.
그들은 우리 함대를 보고 겁을 내어 감히 한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우리들의 포화를 맞고서는 모두 육지로 올라가, 굴을 파고 있는 군사들과 합세하여 우리에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때에 공이 취한 전쟁목표는 왜적을 살해함에 있지 않고 왜선의 격파에 있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왜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산 위에 있는 왜적들은 부상자를 굴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비명을 울리는 것이었다.
 
뒷사람들이 모두들 한산대첩을 제일로 일컫는데, 임진란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전쟁이었던 만큼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마는, 공 자신의 전쟁평에 의하면, " 이때까지의 4차에 걸친 해전 중에서도, 장수들의 공로를 가지고 논한다고 하면, 이번 부산해전은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
하여, 가장 통쾌한 것은 부산해전이라고 했다.

그 까닭을 헤아려보건대, 전일의 세 번 싸움은 언제나 불과 70여 척 정도였는데, 이 번 부산해전은 470여 척이나 되어 양적으로도 어려운 전쟁이었고, 또 적의 소굴이 되어 있으며 본토와의 연락의 근거지가 되어 있는 곳을 엎어버리는 싸움이라, 해상에서 적의 그림자를 쓸어버린 큰 의의를 가진 전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나 다만 이번 전쟁에 공으로 하여금 가장 통분하게 한 것은, 부하 명장중의 명장인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한 것이다.
정운은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던 의사요, 또 공의 가장 신뢰하는 부하로서, 지금까지의 싸움 마다에서 큰 공적을 세운 이였다. 이번 부산해전에서도 몸을 잊고 적의 소굴을 찔러, 적의 간담을 서늘케한  가장 용감한 장수였다.
공은 너무나 통분하여 친히 제문을 지어 그 영령을 위로하고, 또 조정에 장계하여, 녹도 이대원 사당에 같이 모시도록 해줍시사고 청했다.




이순신의 5차 출동(1593. 2. 6 ~ 4. 3 : 웅포)


-  웅포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와성 마을과 남문동 사도 마을 사이에 있는 웅포
- 웅천왜성(熊川倭城) :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경남 기념물 제79호.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는 웅천왜성의 동쪽 바닷가는 웅포해전이 있던 곳이다. 웅천왜성은 본래 ‘웅포성(熊浦城)’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던 성곽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점령한 후 일본식 성으로 고쳐 쌓았다.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 나중에 일본군의 장기 주둔을 위한 근거지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 웅포 해전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웅포를 점거하고 있던 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 사이에 접전을 벌인 해전을 일컫는다.



* 웅포해전(2월 10일 ~ 3월 6일)


1593년 1월, 이순신은 두 차례에 걸친 선조 임금의 유서(諭書)를 받았다. 명나라 군대가 평양, 황해도 그리고 한성(서울)을 차례로 수복을 하려고 진군하면 일본군이 도주할 것이므로,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귀로를 차단하고 전멸시키라는 내용과, 명나라군 장수 이여송이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 진군하니, 수군을 정비하여 해전으로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웅포해전은 조선 수군과 해안 요새에 포진하고 있는 일본군과의 전투이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바다로 유인하여 격파하려고 했지만, 조선 수군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바다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해상전투는 전개되지 않았다.

웅포는 부산진 해상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해안의 요새였고, 일본 수군은 함대를 선창에 정박한 채, 선창 안 동서쪽 산기슭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2월 6일 출전하여 다음날 견내량에서 경상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합류했다. 2월 8일 삼도의 수군을 연합함대로 편성한 이순신은 거제 온천량 송진포(장목면 송진포)에서 이틀을 정박하고, 10일 출항하여 바로 웅포로 향했다.

웅포 앞바다에 당도한 이순신은 먼저 경쾌선을 보내 일본 수군을 포구 밖의 바다로 유인하려 했으나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2월 12일 새벽에도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웅포에 이르러 공격하다가 물러나는 등 유인전술을 펼쳤으나, 그들은 이번에도 조총만 쏠 뿐 추격해 나오지 않았다.


2월 10일과 12일 이틀간의 유인작전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바다에서 육상의 웅천왜성을 향해 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전과가 있었다.

2월 18일 이순신은 다시 연합함대를 이끌고 웅천에 이르러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싸우려 하지 않았고, 이순신 함대의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조선 지상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수군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우선 유인작전부터 폈다.

이순신은 사도첨사 김완(金浣)을 복병장으로 삼아, 여도만호 · 녹도가장 · 좌별도장 · 우별도장 · 좌돌격장 · 우돌격장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을 시켰다. 나머지 여러 전선은 포구 안으로 드나들게 하며 일본 수군이 바다로 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 전함 10여 척이 조선 전함을 추격해 바다로 나왔다. 이에 유인하러 갔던 조선 전함이 물러 나오는 순간, 복병선이 10여 척의 일본 전함을 포위하고 여러 가지 총통으로 포격을 가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전함들은 재빨리 포구 안으로 되돌아갔고, 좌별도장 이설과 좌돌격장 이언량은 도망치는 전함 중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배에 타고 있던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했다.


웅포 상륙작전에서도 조선 지상군의 협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모두 바다로 끌어내지는 못했다. 일본군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안 이순신은 바다와 육상에서 동시 공격을 단행하기 위해, 다시금 경상우도 순찰사에게 조선 지상군이 웅천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순찰사로부터 곽재우로 하여금 먼저 창원지역의 일본군을 토벌한 다음, 차차 웅천지역으로 진격하게 할 것이라는 답신을 받고 낙담했다.


2월 19일 연합함대를 소진포로 옮긴 이순신은 다음 날인 20일까지 이곳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그의 계획은 웅포에 있는 일본군의 저항력을 약하게 하여, 포구 안에 깊숙이 감추어 둔 일본 전함을 공격하여 궤멸시킨다는 것이다.


2월 22일 두 승장(삼혜 · 의승)과 의병장 성응지는 서쪽의 제포로 상륙했고, 연합함대의 전함 가운데 일부가 동쪽의 안골포로 상륙했으며, 전함 15척이 주력부대를 형성하여 웅포로 돌진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 다수를 사살했으나 웅천왜성의 견고함 때문에 왜성 안으로 진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2월 28일에도 웅포를 공격했고, 3월 6일에도 다시 웅포를 공격했다. 웅포해전에서는 조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와 구와나 치카카쓰(桑名親勝)가 일본군을 지휘했는데 구와나는 이때 전사했다.


명나라 지원군은 소식이 없고, 장기간 계속된 전투로 병사들은 지쳐 있는 데다가, 식량 · 화약 등의 병참물자 보급이 급했기 때문에, 이순신은 4월 3일을 기해 삼도 연합함대를 해산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했다.




[ 블로그 산책 ]


조선 수군이 부산에 진을 친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웅포를 점거한 왜군을 소탕하여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그러나 왜군은 임진년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자, 조선 수군에게 대응하지 말고 수성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해상 전투를 피하고 포구의 산기슭에 은거하여, 지형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웅포에 함선들을 정박시킨 상태였다.


1593년 1월 조정으로부터 적의 귀로를 차단하여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2월 6일에 함대를 거느리고 전라 좌수영[여수 소재]을 출발하여, 경상남도 통영시와 거제도 사이의 좁은 수로인 견내량에 이르러 경상 우수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합류하였다.


이순신의 주도 아래 조선 수군은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모두 7회에 걸쳐 웅포의 왜군을 공격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포구에 깊숙이 정박한 왜선을 모두 섬멸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이순신은 온갖 방책을 동원하여 왜선을 큰 바다로 유인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그가 모집하여 거느리고 있는 의병과 각 함대에서 차출한 용감한 군사들을 나누어 웅포 동쪽의 안골포, 서쪽의 제포에 각각 상륙시켜 왜군을 육지의 배후에서 위협하며, 산기슭의 왜군 진지에 우리 함선이 탑재한 중완구(中碗口)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고, 위장 행동으로 왜선을 바다로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여전히 포구에 은거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순신은 최후 수단으로 화공으로 왜선들을 불태워버리고자 화선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함선을 상실하여 궁지에 몰린 왜군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화풀이하면 그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하여 화공을 중단하였으며, 4월 3일에 연합 함대를 해산하고 전라 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웅포 해전은 거의 1개월 동안 계속된 해전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치렀던 어느 해전보다도 전투 기간이 길었다. 이것은 이순신이 반드시 웅포의 왜군들을 섬멸한 후 부산포로 진격하여 왜군들과 결전을 벌이고자 하였던 의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 수군은 포구 깊숙이 은거하여 육지와 함선을 기반으로 저항하는 왜군보다 전술적으로 매우 불리한 여건에서도 왜군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웅포의 왜선 모두를 섬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웅포 해전 후 조선 수군의 부산포 진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웅포 해전지는 포구의 바다와 육지를 포함한 넓은 장소이며, 기념 시설이 없어 일반인들이 유적지로 식별하기 어렵지만,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순신의 6차, 7차 출동과 그 후(1594. 3. 4 ~ 10. 4 : 2차 당항포, 장문포)


  - 2차 당항포해전(3월 4일) : 31척 격침.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만로 1116
  - 장문포해전(9월 29일 ~ 10월 4일) : 2척 격침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장문포왜성(長門逋倭城)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경남 문화재자료 제273호


* 2차 당항포해전(3월 4일)


1594년 음력 3월 4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아군 연합함대 124척을 출전시키고, 부하 어영담을 시켜 당항포의 왜군들을 치게 했다.

새벽에 이순신은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20척, 전라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선발했다.


어영담이 지휘한 함대는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진해 선창에 정박하던 왜선 10척을 협공하여,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 읍전포에서 6척을,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 어선포에서 2척을, 나머지 2척은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법동마을 아자음포에서 격침시켰다.


이순신과 전라우수영 이억기는 나머지 함대 73척을 이끌고 학익진을 펼쳐 시위를 하고 공격하여 왜군은 결국 무너져,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당항만 안으로 들어가, 남은 왜선 21척은 불태워지고 패잔병들은 모두 도망쳤다.
 


[ 2차 당항포해전 상세 ]


이순신의 해상 수색과 위력에 눌려 넓은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있던 왜선들이 1594년 2월경부터 차차 움직이기 시작하여 진해(현재의 마산시 진동면), 고성 등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민가를 불지르고 무고한 양민을 죽이는가 하면 온갖 노략질을 하고 다녔다.


1594년 3월 2일 새벽 동틀 무렵에 왜선 31척이 거제에서 출발하여 그 중 21척은 고성 당항포로 들어갔고, 7척은 오리량(마산시 구산면 구복리 인근)으로, 3척은 저도(마산시 구산면 돝섬)로 갔다는 첩보를 받고, 이순신 장군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한산도를 출발했다.

이러한 첩보는 당시 벽방산에 망군(초병)으로 나가 있던 초소장 제한국(諸漢國)으로 부터 들어온 것이다.
이날 오후 여섯 시 쯤 척후선으로부터 오리량과 당항포 등지에 적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다음날인 3월 3일 이순신 장군은 이억기, 원균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와 장문포(장목면 장목리) 앞 바다의 증도(甑島) 근처에서 진을 치고 퇴로를 차단한 후, 조방장 어영담으로 하여금 경예선 30척을 거느리고 왜군을 찾아 공격하게 하였다.

증도는 마산시 구산면 원전리 앞의 섬으로, 이 고장 사람들은 현재까지도 이 섬을 ‘시리섬’이라 부른다. '증(甑)자가 '떡시루 증'이기 때문에 오늘날 까지도 경상도 사투리로 시리섬이라 하는가 보다.


아무튼 어영담이 지휘한 함대는 이 날 진해선창(마산시 진동면 진동리)에 정박하고 있던 10척의 왜선을 협공하여 6척은 읍전포(邑前浦,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에서, 2척은 어선포(於善浦,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에서, 나머지 2척은 시굿포(柴仇叱浦,마산시 구산면)에서 격파하고 불살라 버렸다.

그 날 밤 이순신 함대는 아자음포(阿自音浦, 아잠포,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법동마을)에서 진을 치고 당항만 입구를 지키며 하룻밤을 새웠다.


3월 4일 당항포 앞바다에 이르러, 이순신 장군과 이억기는 현 동진교 바깥쪽 염섬 일대의 당목 입구를 지켜 밖에서 들어올 왜적에 대비하고, 어영담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당항만 안으로 들어가, 적들이 버리고 육지로 도망간 배 21척을 불태워버렸으니, 이것이 제2차 당항포해전이다. 수륙 합동작전이 절실히 요구되는 해전이었다.


난중일기에 보면 제2차 당항포해전이 한창이던 1594년 4월 25일 명나라 군사 2명이 이순신 장군의 진영을 찾아와 서신을 전하고 갔는데, 명나라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으로부터 전해온 것으로, 적을 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 날부터 몸이 아파 약 20일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창궐하던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명나라 원군에 대한 불만으로 화병이 났었는지 모를 일이다.



* 장문포해전(9월 29일 ~ 10월 4일)


장문포 해전(長門浦海戰)은 1594년 11월 12일(음력 10월 1일)부터 12월 29일(음력 11월 18일)까지 진행된 전투로서, 정유재란 이전의 마지막 전투이다.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李舜臣)이 9차례 출전해 총 17회에 걸쳐 벌인 크고 작은 해전 가운데서 가장 성과가 작았던 해전이다.


1594년(선조 27)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한 수륙 합동작전으로, 3회의 전투가 벌어졌다.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아군 함선 50여 척, 일본 수군 함선 117척이 서로 대치하였다. 10월 1일 조선 수군은 새벽에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다 영등포로 들어가 왜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왜군은 바닷가에 배를 대놓은 채 항전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 뭍에 배를 매려 할 즈음, 적의 포격을 맞아 배에 불이 붙었으나, 번지기 전에 진화하였다.


이후 10월 3일까지 왜군이 항전하지 않는 바람에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다. 10월 4일에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함께 수륙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먼저 군사 수백 명을 뭍으로 올려 보내 싸움을 걸었다. 이어 저녁 무렵 수륙 합동작전을 벌여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돌아와 칠천량(漆川梁)에 진을 쳤다.


총 6일 동안 치른 수륙 합동작전에서 아군은 왜선 2척을 격침시켰다. 아군 피해는 없었으나, 왜군이 항전하지 않아 전과는 미미하였다. 그러나 이 해전의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이 해전으로 인해 일대 위기를 맞는다.


장문포해전은 원래 이순신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에게 건의해, 윤두수 자의로 행한 수륙 합동작전이다.

뒤에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에 의해 선조(宣祖)의 재가를 받아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명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작전이 전개된 상태였다.

결국 수륙 합동작전은 성공하지 못하고, 2척의 적선만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조선군은 한 달 보름 동안 수행한 작전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한산도 통제영으로 복귀했다. 독단적으로 작전을 진행한 윤두수는 책임을 지고 체직되었다.
한편 이 전투는 김덕령이 참전한 유일한 대형 전투로서, 김덕령은 얼마 뒤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더 이상의 활약을 하지 못하고 무고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서는 북인과 서인 사이에 당쟁이 일어나고, 이순신은 '불붙은 함선에 타고 있던 모든 병사가 전사하였는데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훗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돼 권율(權慄)의 막하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원균의 칠천량해전 패전으로 조선 수군이 전멸하다시피 된 것도, 바로 장문포해전이 빌미가 되어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블로거 산책 ]


당항포해전에서 패퇴하는 적을 육지로 추격하여 잡았다 하여, 경남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남쪽 일대를 "잡안개"라 불렀고, 진해시 웅천동에서 펼쳐졌던 웅포해전에서 일부 병력이 육지의 적을 공격하는 척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대규모 상륙작전은 1594년 겨울 이순신장군이 거제도의 장문포 왜성을 공격할 때 있었다. 장문포는 현재의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이다.


1594년 8월(이하 날짜는 모두 양력) 경부터 왜군들의 움직임이 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 일대를 중심으로 연안 각 포구마다 집을 짓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했다.

이렇게 되자 도원수 권율 장군이 한산도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밀 문건으로 11월 9일에 군사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9일 아침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5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통영시 화도 앞바다에서 곽재우, 김덕령, 한명련 등 육군장들을 승선시켜, 칠천도로 가서 거점을 확보한 후 장문포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11월 11일에 일제히 장문포를 공격하여 적선 2척을 불태웠으나, 적은 성문을 굳게 걸고 응전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며칠 간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응전해 오지 않자, 11월 15일에는 이순신은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한 후, 함상에서 수백 명의 육전대를 차출하여 상륙작전을 구사했다. 아울러 전선을 장문포로 보내어 포구 내를 들락거리며 계속 싸움을 걸게 했다. 그날 저녁 나절에 아군이 바다와 육지에서 호응하자, 놀란 적들이 갈팡질팡했다는 기록이 있다.


2차 당항포 해전 이후 큰 전투 없이 소강기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런 전투가 없는 상황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 초명이 이균이었던 자로서 흔히 선조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선조의 불만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8월 21일에는 영의정 유성룡과 대화를 하면서, 이순신이 일을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니냐는 말을 한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변호하지만 선조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9월 3일에는 이순신에게 선조의 밀지가 도착하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9월 초3일[무인]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했지만, 3년 동안 해상에 있어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원수 갚을 뜻으로 날을 보내지만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소굴 속에 들어 있는 적이라 경솔히 나가 칠 수는 없는 일이요, 또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함이 없다」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밤 10시께 흥양이 내가 홀로 앉아 있는 줄을 알고 들어와 자정까지 얘기하다 헤어졌다.


답답하지만 왕의 밀지에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현장에서 거리가 먼 왕은 사정을 몰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바로 현장에 있으므로 다른 누구보다 수군이 쉽게 출전하지 않는 상황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할 자가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이순신에게 직접 그런 말을 하면 당당히 자기 의사를 표명한 것이라 생각하겠는데, 조정의 대신들에게 편지 등으로 이순신의 험담을 하였던 걸로 보인다. 이순신이 이런 상황을 파악한 것은 유성룡과 병조판서 심충겸이 보낸 편지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렇게 이순신의 험담을 했더란 말인가? 조선 삼도 연합 수군 중에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며, 역시 ‘균’이란 이름을 가진, 무능한 주제에 욕심은 많은 경상우수사 원균 뿐이다. 그런 가운데 1594년의 마지막 수군 출동인 장문포 해전이 추진된다.


그러나 사실 누구보다도 나가 싸워서 적들을 쓸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선조나 원균이 아니라 이순신이었다. 그러나 나가 싸우려고 해도 적군은 꼭꼭 숨어서 싸우려 들지를 않는데, 어떻게 싸우겠는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선 수군의 출전이 계획되니, 이것이 바로 장문포 해전이다. 장문포 해전은 이전의 해전과는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의 해전들은 이순신의 현장에서의 판단이 위주가 되어, 순전히 수군의 완전 주도형 해전이었지만, 장문포 해전은 이와는 달리 통제사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의 인척이며 좌의정겸 삼도체찰사인 윤두수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해전이다.

장문포 해전의 건의자도 처음부터 이순신이 아니라 윤두수였다. 여기에 윤두수와 원균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순신이 나가지 않고 머뭇거린다고 하던 원균의 건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순신도 이미 전 해 겨울에 거제도에 있는 일본군에 대한 원균의 보고를 받고 봄이 되면 거제도를 포위할 것을 검토하였지만, 군선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철회하였다. 당시의 판옥선은 약 100여척이었는데, 사실 일본 수군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전력이었지만, 적들이 해전을 기피하고 육지에 은거하는 상황에서는 뭍에 접근하다가 적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더구나 일본 군선에서는 기술상의 문제로 사용하지 못하는 조선군의 노획한 화포를 땅에서는 사용이 가능하고, 만에 하나라도 조선 수군이 전멸하는 날에는 그것은 곧 조선의 멸망위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순신의 결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1594년 9월에 추진된 장문포 해전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윤두수가 도착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날의 일기에는 “심히 불행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윤두수에 의해 무리한 작전이 추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9월 19일에는 비변사가 거제도 공략을 주장하는 등, 장문포 해전은 본격 추진되어 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가며, 체찰사 윤두수를 주장으로 하며, 수군 판옥선에 의병장 곽재우와 김덕령 등이 육군 천여 명을 이끌고 참가하며, 도원수 권율이 지원하는 장문포 해전이 시작된다.


9월 27일에 출동한 수군은 29일에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 이른다. 그러나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해전 이후 항상 그랬듯,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반격을 자제하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나오지를 않았다. 그나마 나온 적도 선봉 2척을 무찌르니 땅으로 올라가 더 이상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날은 빈 배만 깨뜨리고 물러나 칠천량에서 밤을 보낸다.


다음날인 10월 1일에도 큰 전투는 없었으나, 일본군이 작은 배를 보내 뭍에 배를 매려던 조선군 사도 2호선에 불을 던진 일이 있었다. 전면승부는 승산이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조선 수군이 물러나기만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지라 소규모 공격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불은 꺼졌으나 경계를 소홀히 한 군관은 처벌을 받았다.


이후 10월 3일까지 별다른 전투가 없는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10월 4일에 이르러 조선군은 다시 공격을 실시한다. 곽재우와 김덕령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땅으로 상륙을 하고, 바다에서 수군이 호응하는 작전이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작전을 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일본군을 혼란시키기는 했지만, 육군이 기대만큼 활약을 해주지 못하여 적군을 바닷가로 몰아내지도 못하였고, 따라서 수군도 적을 섬멸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날의 작전도 별다른 전과도 피해도 없이 종결되었다.


육군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일본군이 성에 있는 상황에서는 천여 명이란 군사는 적을 몰아내기에는 부족했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순신도 이순신이지만 곽재우와 김덕령 역시 이름을 날리던 명장들이기에 ,일본군이 육지 싸움도 회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전투 때문에 이순신의 곽재우와 김덕령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안 좋아지게 되는데, 이는 두 의병장이 진짜 무능해서가 아니라, 유일한 이순신과의 합동작전에서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게다가 이순신의 인물에 대한 평가기준 자체가 아주 엄격하였다는 이유가 크다.


6일에는 선봉을 장문포로 보내니, 일본군은 패문을 땅에 꽂아 두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일본이 대명과 더불어 화친을 의논하는 터이라 싸울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2차 당항포해전에서 담종인에게 패문을 보내게 요청한 것처럼, 자력으로 무찌를 자신이 없는 조선 수군에 대하여 명나라의 권위를 빌려서 전투를 피하고 물러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날 일본군 1명이 투항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전투 종반까지 무대응 전술로 일관하여, 결국 10월 8일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 이후, 사헌부를 비롯한 대간들은 체찰사 윤두수와 권율, 이순신 등을 작전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탄핵하였다. 하지만 당초 이 작전은 윤두수가 주도하였고, 이 작전에 부정적이었던 이순신은 명령에 따라 출동하였지만 적군이 전혀 대응을 하지 않으니, 전과를 거두고 싶어도 거두지 못한 것이었다.


당초 작전에 참여한 육군도 천여 명 수준이라 수륙합동 작전이란 말이 무색하게 그 인원이 적었다. 행주대첩이나 진주성전투 같은 수성전에서는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을 물리치는 대승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공격자의 입장에서 천여 명은 너무 적은 병력이었다. 그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권율과 이순신에 대한 탄핵은 넘어가고, 윤두수만 파직되는 것으로 징계는 마무리되었지만, 그도 얼마 안 가서 군기와 군정을 관장하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된다.


이 전투 직후, 원균은 마치 자신이 시종일관 작전의 중심이었던 양 장계를 올려서, 통제사 이순신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師) 원균(元均)의 장계에,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場門浦)에 둔거(屯據)한 적세(賊勢)와 접전한 절차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2일 평명(平明)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된 것이 필시 둔처(屯處)한 왜병을 청원(請援)한 것이었습니다.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우리 병사들이 강개(慷慨)하여 진퇴(進退)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辰時)에 주사(舟師)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 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城)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 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步)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設備)는 매우 흉험(兇險)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臣)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陸兵)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舟師)로서는 다시 어떻게 끌어 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巨濟)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陸戰)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4일 묘시(卯時)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 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玄勝字銃筒)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鄭銳船)을 영등(永登)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육병장 등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가서 직접 형세를 고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서 7일에 돌아갔고, 신 및 주사(舟師)는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5일 휴병(休兵)할 때에 신이 거느린 사후선(伺候船)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관(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6일 묘시(卯時)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과 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守門將)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 와서 수급(首級)을 베어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 있던 잡물(雜物)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櫓) 등은 싣고 왔다.’하였습니다.
다시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 와서 증거품으로 하라고 하였더니, 7일에 돌아와 고하기를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산골짜기로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그중에 한 명이 다급하게 되자 칼을 풀고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의 중위장(中衛將)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6일에 행군하여 왜적이 숨어 있는 해변에 복병하고 있으면서 출몰하는 것을 엿보아 재빠르게 배를 움직여 돌진해서 1명을 생포해 왔고, 선봉장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적진에 달려 들어가 왜인이 쓴 작은 판(版)을 탈취해 왔는데, 판본(版本)은 통제사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한산(閑山)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파직과 의병장 김덕령



◆ 일본군의 간계와 조선 관군 수뇌부의 오판


일본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미 그 지난해 겨울에 조선으로 건너와 거제도에 있었고, 이어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 바다를 건너와 울산 서생포에 상륙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지만, 조선에 염라대왕(閻羅大王)보다도 더 무서운 인물이 있어서 마음대로 대한해협을 건너올 수가 없었으니, 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조선 수군의 무서운 화력을 그동안의 해상전투를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는 일본군인지라, 섣불리 정면공격을 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궁리를 거듭하던 일본군 지휘부는 마침내 이순신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같은 왜장들은 조선에서 오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국왕 선조(宣祖)의 성격, 조정의 당쟁, 이순신과 원균 간의 불화 등에 관해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틈새를 파고들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이순신을 실각시키든지, 그것이 안 되면 이순신을 함정 속으로 유인하여 제거하려는 간계를 꾸몄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의 부하이면서 조선의 언어에 능통해 통역을 전담했던 요시라를 간첩으로 삼아 그에게 밀명을 내렸다. 요시라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를 몰래 찾아가서 이렇게 일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이가 나쁜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기요마사가 머잖아 일본에서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내가 그 시간을 알아가지고 기요마사가 탄 선박을 가르쳐줄 것이니, 조선에서는 통제사를 시켜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지키게 하시오. 그러면 백전백승(百戰百勝)하는 통제사로서는 그를 잡아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면 첫째로 조선의 원수를 갚는 것이요, 다음은 유키나가의 마음도 통쾌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한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적군의 간계였으나, 병법(兵法)의 병(兵)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능한 장수와 조정 대신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나중에 유성룡(柳成龍)은 요시라란 자의 정체에 대해 징비록(懲毖錄)에 이렇게 썼다.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드나들며 우리나라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므로, 김응서가 특별히 대해주고 또 도원수에게 보고하여 포상을 받게 했다. 그런 뒤로 우리 진영에 무상출입하면서, 제 나라에 가면 왜놈 복색을 하고 우리나라에 오면 우리 의관을 바꾸어 입고서 온갖 정보를 물어가는 것이었다.'


김응서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조정에 보고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월 14일에는 도원수 권율이 몸소 한산도에 와서 명령을 하달했다.


이순신은 이는 왜적(倭敵)의 간계라는 사실을 간파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왜군이 있는 부산으로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드시 왜적(倭敵)의 복병이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함대를 많이 끌고 나가면 적군이 모를 리 없고, 적게 끌고 나가면 오히려 포위를 당할 것입니다. 또 倭人이 하는 말은 본래부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순신의 함대에게 여러 차례 참패를 당했던 일본 수군은, 오래 전부터 조선 수군과의 전면전(全面戰)을 피하고, 해안가에서 조선 수군을 포격할 수 있는 지역에 성을 쌓은 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오는 길목마다 복병을 배치시키고 있었다.

그때, 부산에 잔류하고 있는 일본군의 병력은 2만도 넘었다. 만일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출정하면 일본 수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에 전진 배치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부산에 당도하기도 전에 한바탕 치열한 접전을 펼치는 것이 불가피했다.


설사 조선 수군이 부산까지 진격한다고 해도, 가토 기요마사의 상륙을 막자면 절영도와 대마도 사이에 진형을 펴야 하는데, 외해(外海)의 급물살을 견뎌내면서 진을 친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수군의 함대 규모가 일본 수군 전체에 비해 너무나 열세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한산도 통제영의 군선 수효는 130여척이었다. 하지만 부산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의 군선은 3백여 척 안팎이었고, 조선에 대한 재침공을 위해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올 일본 군선의 예상 수효만도 역시 4백여 척에 이르렀다.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 군선의 반을 잃을 경우를 각오하고 적군과 교전을 한다고 가정해 봐도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만일 부산으로 오는 일본 군선 4백여 척 중 절반이 거제도의 내해(內海)를 돌아 수군 본영을 장악해 버리면, 적군의 서진(西進)을 막을 길은 너무도 요원한 것이다.

아무리 제갈량(諸葛亮)을 능가하는 훌륭한 전략가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에서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전투였으며,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1월 12일에 가덕도로 건너와서, 13일에는 다대포를 거쳐 울산 서생포에 건너와 있었다. 일본군의 첩자인 요시라는 다시 김응서에게 가서 이간책을 썼다.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를 막지 않는 사이에 기요마사가 조선에 상륙했소. 내가 하는 말대로 따르지 않아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소."


1월 19일, 이순신을 좋은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던 김응서는, 그 말을 또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1월 21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조선 땅으로 건너왔다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보고가 올라왔고, 그 이튿날 황신(黃愼)도 같은 보고를 올렸다. 21일에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수군의 출동을 건의했고, 선조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건너왔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조선 수군의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이 한산도에 전해진 것은 1월 말이나 늦어도 2월 2일이었다.


이순신은 그래도 어명(御命)을 어길 수 없다는 생각에 2월 2일 곧바로 함대를 이끌고 출동,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부산포를 공격하고, 귀로에 가덕도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판옥선과 협선 각 한 척이 썰물에 빠져 일본 수군에게 나포되는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순신이 이렇게 조정의 어리석은 명령을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속였다느니 출전을 하지 않았다느니 적군을 치지 않았다느니 하는 생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그의 적은 일본군만이 아니었다. 힘이 되어줘야 할 국왕과 대신, 장수들까지 이순신을 적대시하여 해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타는 불에 기름을 붓듯 원균까지 이순신을 헐뜯는 장계를 보냈는데, 그 뒷부분은 이렇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날랜 배를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武威)를 떨치고 100여 명이나 200여 명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淸正)은 평소 수전(水戰)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컨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적군과 싸운 적이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감히 우러러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원균은 이렇게 해서 자신이 통제사가 된 다음에는, 상부에서 아무리 출동을 하라고 해도 소 죽은 귀신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먼저 육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군을 쳐야 한다면서 딴전을 피웠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전란으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이르렀음에도, 동서로 갈라진 당쟁은 피난 중에도 그칠 줄 몰랐고, 국왕 선조는 오늘은 동인의 손을 들어줬다가 내일은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하면서 자신의 왕권 안위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흉계에 빠질 무렵에는 원균의 비호세력인 김응남(金應南), 윤두수(尹斗壽)를 중심으로 한 서인의 발언권이 더욱 강했다. 어전회의 때마다 서인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반면 원균을 천거하기에 갖은 안간힘을 썼다.



◆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어전회의


김응서(金應瑞)의 보고를 받은 직후인 1월 23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고 갔다.
이 발언록을 읽어 보면 참으로 기막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자들이 일국의 임금이요, 조정 대신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선조(宣祖)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드러누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윤두수(尹斗壽) "이순신은 왜적(倭敵)을 겁내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나아가 싸우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이산해(李山海) "이순신은 정운(鄭運)과 원균(元均)이 없기 때문에 머뭇거리게 된 것입니다."

김응남(金應南) "정운은 이순신이 싸움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자 이순신이 겁을 내어 어쩔 수 없이 싸웠는데, 해전에서 연승(聯勝)한 것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이라고, 정언신(鄭彦信)이 늘 정운의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이제 이순신에게 가등(加藤)의 머리를 잘라올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군선을 거느리고 위세를 부리면서 기슭으로만 돌아다니며 종시 성의를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로다! 이순신이 가등(加藤)의 상륙을 방관(傍觀)하여 다시 전란(戰亂)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는가!"


선조와 대신들의 이러한 대화 내용은 정말 개탄할 일이었다. 이순신이 요시라의 말에 따라 가토 기요마사를 잡지 못하고, 정운과 원균이 없어서 감히 출전을 못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경쟁하듯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을 실각시키려고 온갖 못된 꾀를 짜내던 서인 가운데 특히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형제는 원균과 족친 관계였다. 원균과 윤근수가 동서라고도 하고, 또는 처남매부 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월 27일 어전회의에서는 이처럼 완전히 쐐기를 박는 대화가 오고 갔다.


선조(宣祖) "전라도 등지는 전혀 방비가 없고, 또 수군으로 한 명도 오는 자가 없다니 어찌 된 일인고?"
유성룡(柳成龍) "그곳에는 호령이 잘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군사들이 곧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윤두수(尹斗壽)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싸움을 꺼려 물러나서 한산도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큰 계획이 실시될 수 없었으므로 어느 누가 통탄치 않겠습니까?"
정탁(鄭琢) "이순신은 과연 죄가 있습니다."

선조 "이제는 설사 가등(加藤)의 머리를 손에 들고 온다고 해도 결코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야!"
유성룡 "이순신은 동리 사람이라 신이 젊어서부터 잘 알았는데, 능히 자기 직책을 다할 사람으로 보았으며, 또 평소 희망이 반드시 대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그를 아는가?"
유성룡 "강직해서 남에게 굴복할 위인이 아니기에 신이 천거는 했습니다만, 임진년(壬辰年)의 전공(戰功)으로 정헌(正憲)까지 올린 것은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선조 "이순신은 용서할 수 없어!"
김응남(金應南) "수군으로는 원균만한 자가 없으니 그대로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성룡 "원균은 나라를 위한 정성도 적지 않습니다."

선조 "원균을 통제사로 삼아 수군의 선봉에 세워야겠어."
김응남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정탁 "이순신이 참으로 죄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위급한 때에 대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선조 "이순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무신(武臣)으로 조정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버릇을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안돼! 해야 할 일은 속히 하는 것이 옳다. 원균을 즉시 통제사에 임명한다."

그렇게 해서 그날 어전회의는 원균을 통제사로 기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 이순신의 파면과 하옥


2월 4일에는 사헌부에서 이순신을 하옥하여 정죄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고, 6일에 선조(宣祖)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선전관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잡아오게 하라. 또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오고, 만일 전투 중이면 싸움이 끝나고 쉬는 틈을 보아 잡아오도록 하라."


이순신은 이처럼 난리가 나면 도망이나 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공론이나 일삼는 임금과 대신들의 아우성에 따라 해임되고,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등의 죄목을 뒤집어쓴 채 선전관에게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후임자인 원균에게 군사, 무기, 군량 등은 정확히 인계하고, 그 달 26일 돼지우리 같은 남거에 실려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비통하게 울부짖는 가운데 서울로 끌려갔다.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 따르면, 당시 이순신이 후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물품은 군량미 9천 914석, 화약 4천근, 총통 3백정 등이었다. 이 가운데 군량미는 영내에 있는 것이고, 총통도 전함에 장착된 것은 제외한 것이었으며, 이 밖에 휘하에 있는 병사와 전함 및 무기와 장비들도 일일이 수량을 밝혀 정확히 인계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따르면, 당시 조선 삼도수군(朝鮮三道水軍)은 전함 130여척에 격군 1만 3천여 명으로 나와 있다.


이순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선전관에게 붙잡혀 서울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백성들이 길가에 쏟아져 나와 앞길을 가로막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통제사 영감! 저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장군! 이제 앞으로 우리 백성들은 어찌 살라고 하십니까?"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된 것은 3월 4일이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바로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당대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감옥에 찾아와 이렇게 위로하며 걱정했다.
"주상(主上) 전하(殿下)께서 극도로 진노하시고, 또 조정의 여론도 엄중하여 사태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어쩌면 좋겠소?"

그러자 이순신이 이렇게 대답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오. 죽게 되면 죽어야지 어쩌겠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로를 빼앗고, 제멋대로가 아닌 게 없고 꺼리는 게 없는 죄 등 네 가지였다. 이순신은 투옥된 지 8일 뒤인 3월 12일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기망했다는 죄목은 국왕 선조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것이고, 적을 놓아주었다는 죄목도 이미 자세히 설명했듯이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했다. 또 남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말은, 부산포의 왜군 진영에 불을 지른 것과 개전 초의 전공(戰功)이 모두 원균의 것인데, 이순신이 가로챘다는 것이니, 네 가지 죄목 모두 근거도 없고 황당무계한 죄목이었다. 이는 나중에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왕 선조는 이처럼 객관적이며 실체적인 진실에 따라 신하를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싶은 신하에게는 무슨 죄목이든 덮어씌워 죽여야만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 의병대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


이에 앞서 의병대장 김덕령(金德齡)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선조(宣祖)가 김덕령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사건이,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경우와 그 정황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김덕령은 1567년 11월 29일에 오늘의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인 석저촌에서 김붕섭(金鵬燮)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金允梯)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한데다가 또한 효자로 이름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는 형 덕홍(德弘)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군사 6백 명을 모았다. 부대를 이끌고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올라갔을 때 형이 김덕령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죽기를 작정한 몸이고 또 너보다는 오래 살았으니 내가 먼저 죽는 것이 옳겠구나.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또 다시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두고 형제가 둘씩이나 죽을 곳을 찾아 나선 것은 잘못인 듯하다. 그러니까 너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좋겠다."


김덕령이 듣고 형의 말이 옳다고 여겨 두 형제는 작별을 했다. 형은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그 다음 달에 벌어진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듬해에 형의 전사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김덕령은 상복을 입은 채 다시 의병을 일으켜 5천여 명의 군사를 모았다.


김덕령은 몸집이 작은 편이었지만 용력이 뛰어나고 무술도 능한 천부적인 장수감이었다. 그는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권율 휘하에서 영남 방어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고 , 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수륙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해 선전관이니 형조좌랑이니 하는 벼슬과 더불어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가 인솔하는 의병부대에게도 충용군(忠勇軍)이라는 부대명칭을 특별히 내려주었다.


그런데 강화교섭이 시작되자, 전황은 지리멸렬 소강상태에 빠져버리고, 성격이 불같이 급한 김덕령은 그것이 너무나 못마땅했다. 그는 한때 화병이 나서 병석에 눕기도 했다.
그러던 중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다 군졸 하나가 곤장을 맞고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 탈주병을 잡으려고 그 아비를 잡아다 곤장을 치자 죽어버린 사건도 생겼다. 군사를 함부로 죽이는 인물이라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김덕령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선조가 그의 전공(戰功)을 생각하여 석방했으므로 본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1596년 7월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연루되어 또 다시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토벌군을 이끌고 갔던 김덕령이, 오히려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선조가 친히 국문하는데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선조(宣祖) "너는 역적 한현, 이몽학의 무리와 결탁하여 나라가 위급한 틈을 타 반역을 꾀했다. 이제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하라."

김덕령(金德齡) "시시비비는 분명해야 하거늘 어찌 조금도 감추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위해 친척을 작별하고 선영을 버리고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오히려 상을 베푸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헛된 이름을 지녔기에 적도들이 신을 시기하고 모함한 듯합니다. 7월 14일에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적도들을 치기 위해 달려갔으나, 이미 진압되어 본진으로 돌아간 것밖에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김덕령이 역적과 내통했음이 분명하니 즉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나 이제나 재주란 오로지 저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소인배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임금에게 맞장구를 쳤다.

유성룡이 나서서 김덕령의 죄란 역적들이 찍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니 시일을 두고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무슨 미운털이 박혔는지 선조는 김덕령 같은 자는 고문을 당하다가 죽어도 괜찮다는 극언을 했다. 선조는 이처럼 엽기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저승에 가서 선조가 먼저 간 김덕령에게 사과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섯 차례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일세의 영웅 김덕령은 마침내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때 아까운 나이 29세였다.




칠천량 해전


-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 :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칠천로 265-39(하청면 연구리)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1월에 조선을 재침입했다(정유재란). 이때 조선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으로 벌한 뒤, 급히 한산도 본영으로 돌려보냈다. 본영에 돌아온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하기 위해 3도수군의 전선 160여 척을 다 출동시켰다.


그런데 부산진포구의 일본 수군은 미리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란작전을 유도했다. 게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여기에서도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의 영등포로 후퇴했다.

조선군은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15일 밤에 도도·와키자키·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수륙양면기습작전에 말려들었다.
원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접전했으며, 경상우병사 배설은 전세를 보고 있다가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갔다.

원균은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여 결국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도망쳤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죽은 조선 수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해전으로 3도수군통제사인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전사했다. 이로써 조선의 3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함대는 서쪽 해상을 향해 쳐들어가 일본군의 남원 및 진주로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이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흩어진 병력과 배를 수집·점검할 것을 명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충청수사로 권준(權俊)을 기용했으며, 뒤이어 전라우수사에 김억추(金億秋)를 임명했다.






정유재란(삼도수군통제사 복직 후)시 이순신의 해전



1. 어란포 해전(於蘭浦海戰)(1597. 8. 27)
  - 어란포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어란진항)


 1597년 10월 7일(음력 8월 27일)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후 치른 첫 번째 전투였다. 

칠천량 해전 패전 후 남은 13척의 판옥선을 수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던 중, 음력 8월에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자신을 노출시켜 왜군을 유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어란포 해전 후 본진을 진도의 벽파진으로 옮겼다.


2. 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 1597. 9. 7)
  - 벽파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벽파항)
  -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 :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길 90. 진도향토유적 제5호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2번째 해전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벽파진에서 적선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복귀도 확인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나중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하나, 첩보는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 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명량대첩


* 개요 :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 명량(울돌목) :
  - 명량대첩비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34 (문내면). 보물 제503호
  - 명량대첩기념공원(우수영 관광지) :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산 36


* 전투 상황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중에 남아 있던 쓸만한 전선(戰船)은 칠천량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 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 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하였다. 일본 수군의 진입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 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으며,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 등에게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 수군에 비해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였다.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 분포로 인해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었다.


격전중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이순신이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투의 기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 수군은 물러나 도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그들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쇠(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


* 1598년 무술년 : 절이도해전, 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성 전투, 왜교성 전투, 노량해전, 남해왜성 소탕전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은 정유재란 말기인 1598년, 명군의 최선임자이던 병부상서 총독군무 형개가 입안한 공세 대전략이다. 이후 1598년의 나머지 정유재란 전투들은 모두 이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로병진책은 육군을 전라도 방면의 서로,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 세 갈래로 나누고, 여기에 해군이 맡은 수로를 더하여, 네 갈래로 총공격을 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편성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사로군(四路軍) 편성과 주요 전투

 - 동로군 총병관 마귀 : 한성에서 출발, 충주와 안동을 거쳐 경주에서 조선군의 선거이와 합류하여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친다(제2차 울산성 전투)
 - 중로군 제독 동일원 : 한성에서 출발, 청주와 상주를 거쳐 성주에서 남하,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친다(사천성 전투)
 - 서로군 제독 유정 : 한성에서 출발, 공주를 거쳐 전주에서 조선군의 권율과 합류하여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친다(왜교성 전투)
 - 수로군 도독 진린, 등자룡 : 충청도에서 출발, 전라도 남해안에서 이순신과 합류하여 배후에서 육군을 지원한다.


사로병진책은 성공만 했다면 남해안의 왜성들에 웅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동로군의 울산성 전투는 승리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패배했고, 사천성 전투 역시 패배했다. 그리고 왜교성 전투의 경우 서로군과 수로군의 손발이 맞지 않아, 조명연합군은 3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황세득 등 장교들까지 일부 전사하며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최종 결전인 노량해전에서 시마즈군을 궤멸시켰으나, 나머지 일본군은 탈출에 성공했으며, 조선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사로병진이 마무리된 이후, 남해도의 일본군을 공격(남해왜성 소탕전)함으로써 정유재란은 끝난다.




명량대첩 이후 해전


*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1598. 7. 18) : 50여 척 격침

 

  - 절이도해전 승전탑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금진항 : 전남 고흥군 금산면 신촌리
  - 개요 : 1598. 7. 18 절이도(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서 왜군들과 전투를 벌여 왜적의 수급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린 해전이다.
 
  - 전투 상황


7월 18일 명나라 수군이 도착한 지 2일째 날, 드디어 적 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에 접하고서, 이순신은 전 함대에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 곳에서 경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7월 19일 새벽에 일본함대는 거금도(절이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뚫고서 금당도로 나오는지라, 이순신 함대와 거금도 북방해역에서 해상 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난중일기의 이 당시 부분이 망실되었고, 이충무공전서에도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천병을 모욕하는 일은 황제를 모욕한다는 취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선조 수정실록(선조 31년 8월)에 보면 이순신 함대가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분멸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따라서 나머지 50여 척도 대파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순신자령수군(舜臣自領水軍 :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돌입적중 발화포(突入賊中 發火砲 :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소오십여척 적축환(燒五十餘隻 賊逐還 :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때 진린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가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와서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 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국의 원군(援軍)이 참전하지도 않고 소국의 전과를 탈취해도 천군(天軍)으로 대접받는 판이었다.


이 해전을 절이도(거금도)해전이라 하는데, 망국적인 사대·왕조사가들이 왜곡 집필한 「이충무공전서」에 이 사실이 누락되어 있어 간과하기 쉽지만,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을 배후 지원세력으로 업고서 명량대첩의 전훈을 되살리면서, 원균의 하극상에 의해 실패한 장문포·영등포해전의 쓰라림을 생각할 때, 결코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군 피해 없이 적함 50척을 수장시킨 대전과가, 정확하고 정직하게 공식문서에 기록·반영되지 않았음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튼 이 해전의 성과로 이순신 함대는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해역을 확대함으로써, 고흥반도 이서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때 분멸한 적전선 50척과 대파 내지 반파된 적전선 50척에 탑승한 적군을 산정하면 16,000여명이 된다. 물론 아군은 함선 손실은 없었지만, 전사상자가 30여명이 발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해전이 격전이었으며 엄청난 적군의 인명손실이 있었기에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1795년에 윤행님(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에는 녹도만호 송여송이 진린에게 적전선 6척과 수급 69개를 상납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 거금도앞 바다가 적의 시체로 가득찼던 것이 틀림없다.


1598년 7월 19일 치러진 절이도(거금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명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서진 중이던 100척 규모의 적 함대를 거의 괴멸시키는 대전과를 수립함으로써, 적의 요새지인 예교(광양만)까지는 못 미치지만 고흥반도까지는 완전 장악하고, 이제 계속 동진하여 여수반도를 끼고 있는 순천만과 남해도의 서측방 광양만을 장악하면 전라도 수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나라 수군을 동원하여 연합작전을 펴, 일본의 요새 진지인 순천 예교성 앞 포구에 주박하고 있는 100여 척의 함선을 분멸시키면, 고니시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 것이고, 왕년의 한산도 전진기지를 재탈환 확보함으로써, 경상도 해역까지 망라하는 광활한 남해의 제해권을 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순신은 골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예교 공격을 위한 결정적 시기만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실을 간파한 진린이 사전에 방해공작으로 가로막는지라, 이에 이순신은 여러 번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엉뚱한 처방을 내린 선조의 작태가 더욱 한심하다. 내용인즉 명군 경략(총사령관격)에게 건의하여 진린을 육장으로 전임시키고, 수군 유격장 계금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을 통합 지휘토록 함으로써, 수륙합공으로 예교를 점령하자는 고육지책을 구상한 것이다.
이 소식이 진린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대노하여 이순신에게 호통을 쳤다. 결국 진린에게 약점만 잡힌 선조는 이 조처를 시행치 못하고 없었던 것으로 하였다.


이 해전이 시작하기 며칠 전,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김완이 귀국하여 왜 수군 진격 알렸다.



* 장도해전과 왜교성 전투
 
- 장도(獐島) : 순천왜성 인근. 전남 순천시 해룡면 율촌리 앞바다
- 충무사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2길 145((해룡면 신성리 산 28-1). 충무공 사당
 
- 왜교성(순천왜성, 예교성)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전남 기념물 제171호


정유재란(1597年)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선봉장 宇喜多秀家(우끼다히데이)와 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1만 4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남해안 26 왜성 중 유일하게 한 곳만 남아 있다.


순천왜성은 수륙 요충지로서 성곽 규모가 120,595m²(36,480평), 외성 2,502m, 내성 1,342m로 외곽성(토석성)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검단산성 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 다리가 물에 뜨게 하여 예교, 왜교성이라 하며, 일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임진란 패인이 전라도 의병과 수군의 용전에 있었다고 보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키 위해 풍신수길의 야심에 따라 전라도 각처에 진지를 구축해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무술년(1598년) 8월 그가 급사 후, 왜성에 주둔해 있던 침략 최정예 부대인 소서행장 왜군과 조·명 수륙 연합군 사이에 2개월에 걸친 최후·최대의 격전을 펼친 곳이다.


순천 시가지에서 여수 쪽으로 6㎞쯤 가다가 왼쪽으로 6㎞를 가면 200여 호가 사는 신성리 마을과 이충무공을 배향한 충무사가 있고, 남쪽 200m 지점 광양만에 접한 나지막한 송림에 위치한 왜성은, 유정 · 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6천, 진린 ·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1만 5천 병력이, 왜성을 비롯 장도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멸했다.


 

- 장도해전(獐島海戰)(1598. 9. 20) : 30여 척 격침, 11척 나포


1598년 8월 18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고, 직후에 고부교(奉行)과 고다이로(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침략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1598년 7월 경략(經略) 형개(邢驚)가 한성으로 당도하면서,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군을 공격목표로 한 동로군과,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군을 공격목표로 한 중로군,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목표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였다.

이와 아울러, 진린의 명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 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세웠다.


9월부터는 일본군의 상호간의 구원전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적군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그러나 울산왜성의 일본군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고, 사천왜성 공격 또한 명장 동일원(董一元)의 조급한 작전으로 패퇴함으로써, 결국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에 들어와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을 출발하여, 수원을 경유, 전주로 내려온 다음, 순천 왜교성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포함, 3만 6,000의 병력으로 왜교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수로군은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의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합류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흥양의 절이도해전(折爾島海戰)에서 승리 후, 9월 하순에 이르러 마침내 조명연합육상군과 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의 총격전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음력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결국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30여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왜군 3,000명을 무찔렀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피해도 커, 명나라 전선 30척이 격침당하고, 명 수군 2,300명이 전사했으며, 왜군에게 포위된 명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휘하의 조선군 130명도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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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거 산책 ]


1598년 2월에는 도요토미가 죽었다는 첩보가 조정에 도착한다. 그러나 선조는 도요토미가 정말 죽었다면 적들은 이를 숨기려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 이는 적들의 계책일 것으로 판단한다.
도요토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정확하였다.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도요토미는 이미 병들어 서서히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항의 <간양록>에는 도요토미가 7월에 죽었다는 말이 있다. 또한 8월 5일자의 <선조실록>에도 도요토미가 이미 죽었다는 포로의 증언을 말하고 있는 의병장 임환의 보고가 첨부된 전라병사 이광악의 장계가 실려 있다.
이외에도 입부 이순신이 도요토미가 7월초에 죽었다는 보고를 하는 등, 조선군은 여기저기서 귀환포로 등을 통해 도요토미 사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다만 도오툐미의 사망 일자에 대한 정설은 8월 18일이니, 포로들의 증언과는 어긋난다.


도요토미의 죽음은 곧 극비리에 일본군에 알려짐과 함께 철수명령도 내려진다. 하지만 조명연합군도 도요토미의 죽음을 인지하고, 이런 가운데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계획한다. 그것은 1차 울산성 전투 직후 경리 양호가 입안한 사로병진이었다.


이 작전은 조선의 지형적 조건 상 군사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우므로, 군사들을 나누어 각 지역을 책임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본래는 육군을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나누고, 수군은 각 육군에 배속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1차 울산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연합한 명군이 오랜만에 제대로 싸워 가토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면서도, 결국 섬멸하는데 실패하고 후퇴한 후, 수군의 지원 필요성을 느끼면서 수군을 수로군으로 독립시켜서 사로군을 이루었다.


각군의 대장은 모두 명나라 장수가 맡아서, 동로군의 대장은 마귀, 중로군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매, 서로군은 유정이 맡았으며, 수로군 대장은 진린이었다. 이 중 중로군 대장은 이여송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이여매가 형을 대신하게 되면서, 동일원이 후임으로 중로군의 대장이 된다. 이 사로군이 각지의 일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사로병진이다.


사로의 대장 중 진린이 가장 먼저 내려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류한 것에 이어서, 8월 18일에는 육군의 대장들이 한양을 출발한다.


마귀의 동로군은 경상좌병사 김응서와 함께 9월 중순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의 도산성을 포위한다.
9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만, 울산성의 가토군은 동로군의 유인작전에도 넘어가지 않고 성곽에 의지하며 수성전을 계속한다.
일본군이 해안가에 축조한 왜성은 종전 후 조선 조정에서도 그 양식을 본받아 축성을 하자 할 정도로 견고하고 수성에 효율적이기에 함락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 부산에서 일본 구원군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마귀는 동로군을 이끌고 경주로 철수하였다. 1차 울산성 전투가 가토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붙인 것과는 다르게, 2차 울산성 전투는 이렇게 맥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동일원의 중로군은 경상우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사천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사천성의 일본군을 지휘하는 무장은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보다 딸리는 무장에 한낱 도자기 도둑으로 비쳐지지만, 실제 역사의 시마즈는 전국시대의 이름난 무장으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자신이 가담한 서군이 도쿠가와의 동군에 의해 패배에 직면하자, 도쿠가와군의 본진을 정면으로 가르면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시마즈의 후퇴’를 감행한 맹장이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야 조선에 침입한 장수이며, 그 후예들이 메이지 유신 후 정한론을 주장한다는 걸 생각하면 원수로 분류되겠지만, 그 능력까지 폄하할 이유는 없다.


동일원의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하였다. 성주와 고령을 거쳐서 9월 18일에는 진주로 진격하였고, 20일에는 남강을 넘어서 일본 진영을 점령하였다. 9월 28일에는 조선의 정기룡을 선봉으로 삼아 시마즈군이 주둔한 사천성을 포위하였다.

시마즈는 적들의 병력 규모가 큰 것을 보고, 자신의 휘하 병력들을 사천 신선으로 후퇴시켰다.
여기서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시미즈군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이는 시마즈의 유인에 넘어간 결과였다. 결국 중로군은 시마즈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중로군의 피해는 일본 기록은 3만8천여 명, 명나라 기록은 3~4천명, <선조실록>에 나온 기록은 7~8천명이다.
사천성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무장으로서의 위엄을 떨쳤지만, 명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체면도 구기고 말았다.


유정의 서로군은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군을 치기 위하여 9월 중순 전주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남하하였다. 서로군에는 2만의 명군과 6천의 도원수 권율 휘하 조선군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동로군, 중로군과 다른 점은, 조명연합함대로 구성된 수로군이 예교성 앞바다에 있는 유도에 주둔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 최초이자 최후인 조명 연합 수륙합동 작전이 실시되는 것이었다.


조명연합함대가 유도에 이른 것은 9월 20일, 유정의 서로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어느 드라마에서는 조선 수군의 지휘권을 유정에게 주려고 하자 이순신의 수군이 반발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다.
이순신이 진린 때문에 작전을 못 한다고 하니, 조정에서는 유정에게 지휘권을 주는 것이 수군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고 시행하려 했으나, 진린 측이 눈치 채면서 무산된 것이다.
물론 싸울 생각이 없는 건 유정도 마찬가지라서, 결국 제대로 싸울 의지와 능력이 있는 고위지휘관은 이순신 뿐이었다.


유정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강화회담을 미끼로 하여, 고니시 유키나카를 유인하여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명나라 중군을 유정으로, 군관으로 도원수 권율로 꾸며서 군사 수백을 거느리게 하고, 적군도 안면을 알고 있는 전라도 순찰사 황신은 가짜를 꾸미지 않고 고니시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둘기 20마리를 숨겨두었다가 고니시가 막사로 들어오면 날려 보내, 이를 신호로 적을 공격하고 고니시를 생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멀리서 군사의 형세가 강해보임을 보고 의심을 하여 쉽게 접근하지를 않았고, 잠시 후 비둘기가 날아가고 명나라 군대가 실수로 포를 쏘니, 고니시가 함정을 눈치 채고 달아나면서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 
유정은 곧 서로군을 움직여 적들을 추적하였으나, 고니시는 잡지 못 하고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한 적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거둔 수급이 98개였으며, 명군의 피해도 많았다. 이렇게 하면서 육지에서 서로군이 순천 예교성을 포위하자, 바다의 수군도 움직여서 바다에서 성을 봉쇄하였다. 수군은 검은 베로 돛을 만들고 여러 가지 모양의 깃발을 그 사이사이에 세워두니 매우 웅장해 보였다.
 
다음날인 21일에는 서로군은 목책을 설치하고 해자를 파려했으나, 적이 막아 싸워서 성에 접근하지는 못 했다.
일본군은 성위에 포루를 설치하면서 짤막한 목채를 같이 두어 그 안에 허수아비를 세우면서 발포하여 서로군의 접근을 막았다.

수군은 아침부터 진격하여 활과 포를 쏘며 하루 종일 싸웠지만, 물이 얕아서 적군을 추적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적군 경쾌선이 정찰을 위해 접근하자, 이를 바로 추격, 적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배와 배에 있던 물건들은 진린에게 바쳐졌다.

이날 밤, 유정은 횃불을 들고 공격할 듯 진격하다가 불을 끄고 다시 진으로 돌아오는, 폼만 잡고 싸우지는 않는 행위를 지속하였다. 적은 여기에 연달아 포를 쏘아 불이 성 밖으로 번졌다가 한참 후에 꺼졌다.


다음날 수군이 다시 진격하여 예교성을 공격하니, 일본군은 죽기를 각오하면서 물 가운데로 나아가 수군을 포위하였으나, 수군은 많은 수급을 거두고 조수에 맞추어 물러났다.
그러나 이 날의 전투에서는 유격 계금이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명군 11명이 전사하였다. 조선군도 옥포만호와 지세포만호가 부상을 당하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음날인 23일, 진린은 명군의 전사와 부상에 화를 내면서, 천만호 및 홍주대장과 한산대장을 각각 곤장 7대를, 금갑도, 제포, 회령포만호에게 15대씩을 때렸다.
진린의 이런 행동은 명군의 피해에 대한 분풀이 외에도, 유정에게 수군 지휘권이 넘기려는 논의도 있은 점을 감안한 지휘권 확립도 목적을 둔 듯 하다.


그 후 며칠간은 유정이 공성무기를 준비한다며 전투를 중지하였기에, 수군도 유도에서 대기한다. 계절은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강한 바람이 불었기에 며칠간 배를 움직이기도 힘든 날씨도 이어졌지만, 수군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다.


10월 1일, 유정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난중일기>에 이 날 새벽 진린이 유정에게로 가서 잠깐 얘기하고 왔다는 걸로 보아 진린과도 협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10월 2일, 육지에서는 유정이 동틀 무렵부터 서로군을 지휘하여 진격하였고, 수군 역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육지의 서로군의 공격은 그다지 신통치가 않았다. 적 성안에 진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하거나 성안으로 끌려가는 명나라 군사들이 속출하고, 방위를 해야 할 군사들이 밤에 자지를 못해서 졸다가 습격을 받기도 하니, 이날 죽은 명군이 8백 명이었다.


수군은 진격하여 적극적인 공격을 감행, 많은 적을 죽였지만, 사도첨사 황세득과 이청일 등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와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 등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3일에는 유정이 진린에게 비밀서신을 보내어, 조수를 틈타 수륙협공을 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래서 초저녁에 출동한 수군은 조수를 타고 적군의 수채에 육박하여 포탄이 막사까지 맞추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동쪽으로 몰리니 서쪽은 자연히 비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육지의 서로군은 별다른 공격을 취하지 않아 성을 함락시키지 못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해안 가까이 접근한 명 수군은 곧 바닷물이 빠지면서 갯벌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군이 이 배들을 공격하여 불을 지르니, 사선 19척과 호선 20여척이 불타게 되었다. 명나라 수군들은 꼼짝도 못 하고 적군을 상관(上官)이라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육지에까지 들렸다.


조선 지형에 어두운 명 수군의 실책으로 이들이 위기에 빠진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명군만 피해를 입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을 생각하여 조선 판옥선도 7척을 일부러 갯벌에 갇히게 한다. 판옥선은 배가 높고 견고하고 활과 포를 쏘며 대항하니 적군이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판옥선이 성벽 같은 역할을 한 셈이었으니, 그 덕분에 조선 판옥선은 무사히 다음 조수를 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인 4일, 분노한 진린은 수군을 다시 출동시킨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서로군의 공격이 없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이에 진린은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서로군에 대하여 분노해, 육지에 올라 유정의 막사에 가서 손으로 유정의 수자기(帥字旗)를 찢으면서, “마음속 심사가 좋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곧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군문에 알리니, 유정은 얼굴빛이 흙빛과 같이 되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장관 중에 능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홀로 어찌하겠소.” 라며 변명하였다. 아마도 진린도 적군보다도 더 도움 안 되는 아군의 행태에 분노했을 테니, 이순신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는 않았을까?
이리하여 두 명나라 장수들은 깊은 불화에 빠지게 된다.


수군의 공격은 예교성을 위협하였지만, 서로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6일에는 권율이 이순신에게 유정이 달아나려 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과연 다음날인 7일 서로군은 유정의 명령에 의해 군량과 병장기도 내버려 둔 채 퇴각한다. 군량을 불태우라는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미처 타지 못한 것은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넘어가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7년간의 전쟁 중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륙협공 작전은 육군의 무성의로 별 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수군은 해안에서 싸우느라 육지의 포와 조총사거리에 노출되면서도 적군을 크게 위협해가면서 용감히 싸웠지만, 서로군이 대응을 하지 않으니, 계사년부터 소강기에 있던 다른 해전들처럼 바닷가에서 위협을 하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전투를 어느 누구는 "거 봐. 이순신도 패배한 적 있다니까."라고 말하는 근거로 든다. 물론 고니시를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수군은 예교성의 막사에까지 포탄을 날릴 정도로 큰 위협을 가했다. 수군이 이 정도 했으면 육군인 서로군이 성을 점령하든가 해줘야 하는데, 그걸 못 했다. 이렇게 이순신의 발목을 잡는 건 대개는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 블로거 산책 ]


조명연합 수로군은 1598년 10월 14일에 고금도 덕동 기지를 출발하여 10월 19일에 순천 예교성 바로 앞에까지 진출하여 장도를 공격하였다. 당시 장도에는 왜군의 군량미 창고가 있었는데, 이순신은 군사를 상륙시켜 군량미를 빼앗아 오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10월 21일 까지 3일 동안 공격을 계속해도 왜군은 바다로 나오지 않고 육상에서 방어만 했다.


그 후 10월 31일 부터 11월 2일까지 연 3일간 공격을 계속했으나, 이 일대가 수심이 얕아 대형 군선이 기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0월 31일 연합수군은 성 가까이로 진격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이날의 공방전은 치열했으며 왜군의 시체가 해안에 즐비했다고 한다.


이날 전투에서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과 군관 이청일(李淸一), 그리고 수군병사 29명이 이 전사하고, 명나라 수군 5명도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육상에서 지지부진하게 싸우던 명나라 광동군은 수군이 썰물을 타고 철수하자 ,성벽을 타고 내려온 왜군에게 20여명이 살상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1월 1일에는 다시 야간 공세를 펼쳐 다음날 까지 조선 수군은 분전했으나, 육지에서는 유정이 지휘하는 명나라 육군이 합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았고, 바다에서도 진린이 지휘를 잘못하여 명나라 수군의 대소 함선 128척이 좌초하거나 불타는 큰 피해를 보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결국 명나라 군사들의 수륙합동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4일 유정은 순천으로 후퇴하고, 조명연합함대는 11월 6일에 고금도 덕동 기지로 귀환하였다.

이러한 장도해전은 일본으로 퇴각하려는 왜군의 발을 묶어놓고, 최후의 노량해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이순신 최후의 노량해전(1598. 11. 19)



* 노량해전 개요 :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 관련지역
  - 충렬사(忠烈祠)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 이락사(李落祠),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 : 경남 남해군 고현면 남해대로 3829  


* 전투 상황


1597년 재침(정유재란)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 블로거 산책 ]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횡사하였으므로, 철수하려 했다. <선조실록(宣祖實錄)>(권 103, 선조 31년 8월 19일(임신(壬申))에 의하면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의 비밀 장계(狀啓)가 왔다.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7월 초에 병사했으므로, 흉적(凶賊)이 장차 철수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 등 왜군들은 빨리 철수할 것을 바라고 있었고, 이순신은 석 달이 지난 11월 8일 예교성에 있는 왜적들이 10일 안으로 탈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명나라 유정(劉綎)에게서 받았다.


이순신은 도망가는 왜적을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을 비장한 각오로, 11월 9일 고금도(古今島)를 떠나 11월 11일 다시 유도에 도착하여, 예교에 있는 왜적이 도망갈 길을 차단하였다. 이틀 뒤 왜적선 10여 척이 근처의 장도에 나타났다가, 이순신 함대의 추격을 피해 예교 가까운 포구인 신성포(新城浦)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군은 종일 예교 앞에서 왜적을 유인하기도 하고, 바짝 압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해상 봉쇄선을 장도까지 확장하였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왜군은 부하 8명을 통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에게 돼지와 술 등 뇌물을 바치고 도망갈 길을 터 달라며 교섭을 시작했다.
진린은 손쉬운 전공을 세우려는 탐욕을 가졌음직 하나, 이순신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그들의 의도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598년 11월 17일 저녁, 예교성에 갇힌 왜군은 횃불 신호로 남해 등지에 있는 그들의 아군에게 알리었다. 이에 호응하는 횃불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고성에 있는 다치바나(立花統虎), 사천에 있는 시마즈(島津義弘), 남해에 있는 무네(宗義智) 등이 모두 노량 바다로 집결하여, 고니시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갈 최후의 전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이순신 역시 최후의 결전을 할 요량이었다. 이순신은 18일 밤 자정이 되자, 문득 대야에 깨끗한 물을 떠와 손을 씻었다. 혼자 갑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이 원수 놈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卷) 9 부록(附錄) 31쪽「행록(行錄))


아무튼 이순신은 왜적선이 무수하게 이동한다는 정보에,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여 11월 18일 밤 10시에 출항, 노량 앞 바다로 이동하였으며, 11월 18일 밤부터11월 19일까지 이틀 간 밤을 새가며 싸웠다.


11월 19일 새벽 2시쯤 아군 연합 함대는 왜적의 선단이 몰려오는 노량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군이 새벽 4시 노량을 거쳐 관음포(觀音浦) 앞 바다에서 이르자, 이순신은 요격전(邀擊戰)을 벌였다. 우리 수군은 전선 83척, 수군이 1만 7,000여 명이고, 명나라 수군은 전선 63척, 수군 2,600명이었다.


왜적의 병력은 대선 500여 척, 수군 6만여 명이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1년 11월 27일 도체찰사 이덕형의 장계)에 의하면 “적선이 3백여 척”이라고 하였지만,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권 9 부록 1「행록」과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는 “적선이 5백여 척”이라 하였으며,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4일)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군문 형개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적선 100척을 나포하고 200척을 불태웠으며, 참수 500급, 생포 180여 명, 익사자는 아직 물위에 떠오르지 않아 알 수 없으며, 이총병(이순신)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명사(明史)>에서 본 노량 관음포 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1598년 11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났다. 마귀(麻貴)는 드디어 도산(島山), 유포(酉浦)에 들어갔고, 유정(劉綎)은 예교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석만자가 수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려 하자, 진린이 이를 맞아 쳐부수어 패배시켰다. 여러 곳의 왜군이 돛을 달고 모두 돌아갔다.
왜가 조선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다. 중앙의 조선과 그 속국들은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관백(關白)이 죽고서야 전쟁이 비로소 종식되었다.”라고 되어 있다.(<명사(明史)>(권320「열전(列傳)」제208 외국(外國) 1 조선)

여기서는 진린의 역할로 왜적선을 패배시킨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순신의 역할이 가장 핵심이 됨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 수군의 1차 진군로 (1592년 5월 7일 조선 수군은 옥포에서 일본군과 첫 전투를 벌였고, 육군을 포함하여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이룩한다.)




1차 출동(보라색): 옥포>합포>적진포
2차 출동(빨간색): 사천>당포>당항포>율포
3차 출동(초록색): 한산도>안골포




* 조선수군의 4차 출동 :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