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우당 문익점과 관련 유적지 답사(계획)
* 일시 : 2019. 4. 7
* 답사지 : 면화시배지, 도천서원, 문익점 신도비, 문익점 묘소
* 문익점 :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문숙선의 아들로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시호는 충선공(忠宣公).
고려(高麗) 말기의 문신(文臣)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와 재배와 보급에 성공.
- 남평 : 전남 나주시에 있는 읍의 명칭.
- 삼우당(三憂堂) : 나라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 성인의 학문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 자신의 도가 서지 않는 것, 세 가지를 근심한다는 뜻의 삼우(三憂)를 호로 삼음.
* 면화시배지 : 문익점과 정천익(문익점의 장인)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 도천서원(道川書院) : 문익점 선생의 공덕을 후세에 알리고,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고지인 이곳에 세조 7년(1461년)에 사당(祠堂)으로 건립.
1554년(명종 9)에 ‘도천(道川)’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사당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다가 1612(광해군 4)년에 중건. 1787년(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는 사액을 다시 받음. 그 뒤 권도(權濤)를 추가로 배향.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891년(고종 28)에 단성(丹城) 사림(士林)들에 의하여 노산정사(蘆山精舍)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사당인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됨.
* 문익점 신도비 : 고려시대 목화씨를 몰래 가져와 가난한 백성들의 겨울추위를 견뎌내게 해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신도비.
* 문익점 묘소
* 기타
-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귀국할 때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중국[元]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 후직씨[后稷氏] : 중국 주나라의 시조로 여기는 전설상의 인물.
성은 희(嬉), 이름은 기(棄)이다. 어머니가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였다 하며, 세 번이나 내다 버렸으나 그 때마다 구조되었다고 한다. 순임금 때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그 공으로 후직[后稷]의 지위에 올랐다.
# 후직[后稷]은 중국 순임금 때 농사를 맡아보던 벼슬.
* 아래의 사진들은 2017. 9. 9 울산들꽃학습원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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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해,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를 지냈다.
그는 1363년 사간원 좌정언으로 일하다가, 일종의 기록관 자격으로 계품사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로 갔다.
당시 고려와 원의 관계는 복잡했다. 원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인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몰아내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이때 원나라 조정은 원에 머무르던 덕흥군을 지지했던 것 같다. 실제로 원은 덕흥군을 고려 왕에 봉하고, 군사 1만 명을 보내 요동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의지가 높았다. 하지만 고려의 최영 장군이 원나라 군대를 물리쳐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문익점은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후,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빌미로 귀국하자마자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문익점은 원에서 돌아올 때 몰래 숨겨 온 목화씨를 재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원나라에서 탐스러운 목화밭을 보고, 나라 밖으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던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왔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씨앗을 심었는데, 처음에는 재배법을 몰라 한 그루만 겨우 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3년의 노력 끝에 대량 재배에 성공했다.
그러나 목화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을 뽑는 방법이 또 난관이었다. 이는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원나라 출신 승려 홍원(弘願)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그는 마침 씨를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로써 문익점은 목화를 재배해 옷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다.
1375년(우왕 1) 문익점은 목화 재배에 성공한 공을 인정받아 다시 전의주부에 임명되었고, 1389년에는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조선 시대 학자 조식(曺植)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 상고 시대 중국의 농사를 관장하던 신)과 같다.”라고 그를 찬양했다.
목화는 재배에 성공한 지 10여 년 만에 온 나라에 퍼졌다. 목화의 전래는 우리나라의 의생활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목화가 국내에서 재배됨에 따라 그때까지 수입에 의존했던 목면과 솜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들만 입던 무명옷과 솜옷을 서민들까지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목화씨를 추출하여 솜을 트고, 면직물을 만들기 위해 물레와 가락, 날틀 같은 면직 기구를 제작하고 발달시킴에 따라, 생산 도구들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솜은 옷뿐 아니라 초나 화약의 심지로도 이용되었고, 튼튼한 무명실은 노끈, 낚싯줄, 그물 등 일상용품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무명은 훗날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물물교환 시 통화 수단으로 이용되어, 세금을 걷는 기본 통화가 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문익점에게 관직 운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다시 조정에 복귀했지만, 곧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추진한 전제 개혁에 반대하다가 탄핵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공로는 1440년 조선 세종 때에 가서야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란 시호를 받으면서 다시 인정받았다.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남아 있으며,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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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에 관하여
문익점(文益漸, 1329년 ~ 1398년)은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1]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 재배를 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증직되고, 세종 때인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되었다.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의 씨 몇 개를 고려로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이를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최초로 한국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전해지나, 최근 백제 시대 면직물이 발견되어[2] 삼국시대에도 목화 재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그의 목화 반입과 재배 기록은 후일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곡의 문인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문익점은 1329년 2월 경상남도 산청의 강성현(江城縣)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익점의 생년은 다소 불확실하여 1328년생 설과 1331년생 설, 1332년생 설 등이 전한다.
그의 첫 이름은 익첨(益瞻)이었다가 뒤에 익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2살 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李穡)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3]
1360년(공민왕 9) 문익점은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었다.
원나라 사행길과 목화 반입[편집]
원나라 왕환[편집]
1363년에 좌정언으로 재직 중, 계품사(啓稟使)인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때 연경에 도착한 그는,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여 고려로 진군하게 하자 이를 지지했다.
원나라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하여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의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3]'라는 견해도 있다.
목화 밀반입[편집]
운남에서 문익점은 사람들이 목화를 심어 옷을 해 입는 것을 보았다.[4] 고려에서는 귀족들이나 왕족들만이 솜옷과 솜이불을 해 입었으므로, 그는 이를 고려로 반입할 뜻을 품게 된다.
목화씨를 고려에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원나라는 법으로 목화를 나라 밖으로 가져가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4]
귀국할 때 수입 금지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귀국, 사행길을 마친 뒤 관직을 사퇴하고,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반을 나눠서 목화를 재배한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자신의 시종인 김룡(金龍)과 함께,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몰래 원나라의 어느 목화밭에 들어가,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다.
목화 재배 성공과 시중 보급[편집]
3년 만에 목화의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라서 고민하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실을 뽑아냈다.
정천익이 호승인 홍원(弘願) 등에게 씨를 빼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기계(繅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다시 시중에 보급시켰다. 이후 이를 근거로 옷과 이불을 만들게 되었다.
그가 심은 것은 실패하고,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어서 다시 재배하여 성공하였다. 그 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된 것이다.
후일 조식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며 그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은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4] 이 기구를 '물레'라고 부르는데,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4]
문래가 발명한 실잣는 기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문래라 부르다가, 말이 와전되어 물레가 된 것이다.
관료 생활[편집]
1374년 그는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친원파 권문세족의 역공격을 받고 청도군수로 좌천되었다.
우왕이 즉위한 직후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해서,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감주부(典儀監注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37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그는 홀로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383년(우왕 9)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가 세워진다.
생애 후반[편집]
신진사대부와의 갈등과 은퇴[편집]
성리학적 소양이 있던 그는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으며,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右文館提學 書達同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러, 그해 8월 그 무렵의 토지에 대한 전제개혁(田制改革)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는데, 이때 문익점은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할 때,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문익점은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더불어 사전혁파를 비롯한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였다.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를 반대하다가, 사헌부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정에 복직하였다. 그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으며, 11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진주로 물러났다.
은퇴와 최후[편집]
그는 기울어져가던 나라 일, 자신의 학문을 소신껏 펴지 못하는 안타까움, 학문이 더욱 깊어지지 못함을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삼우거사라 불렀다.[4]
1392년 이성계, 정도전 등이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에 대한 절의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한 문익점은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4] 1400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삼우당실기》 (三憂堂實記)가 있다.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그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면화를 가져와 민간에 보급하고,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평가되고 숭배되었다.
또한 그의 치적은 성리학의 초기 인사인 이곡의 직제자의 한사람이자, 이색, 정몽주의 동문이었으므로, 성리학 이념의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후[편집]
묘소는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고, 묘 근처에는 《문익점신도비》(文益漸神道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가 세워져 있다.
조선 건국 후,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동지춘추관사 겸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
1440년(세종 22)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다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았다.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제향되었다. 단성의 사당에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1785년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사액을 지어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후대의 학자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수록되었다.
묘소는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66호 《산청문익점묘》(山淸文益漸墓)로 지정되었다.
연보[편집]
- 1329년 2월 8일: 출생
- 1338년: 학당 입학
- 1341년: 이곡 (이색의 아버지)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움
- 1346년: 주씨 부인과 혼례
- 1348년: 장남인 중용(中庸) 출생
- 1350년: 경덕재 (시경 전문 교육기관) 입교 후 이름을 익점으로 바꿈
- 동년: 2남 중성(中誠) 출생
- 1353년: 정동성향시(征東省鄕試)에 이색과 함께 급제
- 1360년 11월: 신경동당시에 정몽주와 함께 문과 7품에 급제, 정8품인 김해부 사록(金海府 司錄)이 됨
- 동년: 주씨 부인 사망
- 1361년: 종7품인 순유박사(諄諭博士)에 오름
- 1362년: 정6품인 승봉랑(承奉郞)에 오름
- 1363년: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이 된 후, 4월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함
- 3월에 행차했다는 설도 있음
- 동년 11월: 운남행성(베트남과 접한 중국의 남단)으로 유배
- 1366년: 유배 종료, 원나라 대도로 복귀해 예부시랑 어사대부를 지냄
- 1367년 2월: 목화씨를 가지고 개경에 도착
- 동년: 정3품인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 藝文官提學 兼 知製敎)에 올랐다가, 휴직을 청하여 귀향해서 목화 재배 시작
- 1368년: 예문관제학 겸 성균관사성(藝文館 提學 兼 成均館司成)이 됨
- 1369년: 부친상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
- 1373년: 이색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제수 받았으나 병으로 조정에 들지 못함
- 1374년: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오름 (종6품 또는 7품)
- 1375년: 정3품인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다가, 청도 군수로 좌천
- 1376년: 모친상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시묘를 중단하지 않음)
- 1383년: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를 건립
- 1388년: 정3품인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 書達同知事)가 됨
- 1389년 8월: 사전(私田)에 관해 이색과 우현보 등에 뜻을 같이하자, 대사헌 조준의 탄핵으로 낙향
- 1390년 8월: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이 됨
- 동년: 시무론 8조를 상소한 뒤, 신병을 이유로 사임
- 1394년: 이성계가 두 차례 조정에 들기를 권유하나 두문불출하자, 3품의 벼슬을 내리고 봉록을 지급
- 1400년(경진년): 사망
- 조선실록에는 1398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었으며, 문익점의 증손 문치창의 기록에 따르면, 70세까지 생존해 1400년에 사망했다고 함
영향력[편집]
목화 전래의 영향[편집]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며, 온 백성들이 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목면으로 포근한 솜과 튼튼하고 땀을 잘 흡수하는 무명 옷감으로 의생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물레와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 도구 제작의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또한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튼튼한 무명실은 노끈, 낚싯줄, 그물을 만들어서 일상용품 여러곳에 두루 다양하게 쓰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무명은 물물교환의 화폐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어 세금을 걷는 기본 통화가 되었다. 또한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의 하나였다.
공로의 인정[편집]
1375년(우왕 1) 조정에서 문익점을 불러 이러한 공로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삼았고,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1389년(창왕 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추진한 전제(田制) 개혁에 반대하여,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고 파면된 뒤, 정계에 뜻이 없어 고향(진주 강성현)에 하향했다.
죽은 후 조정에서는 문익점을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후손으로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의 아들 셋이 있었다.[2] 남평 문씨 대동보에는 문중성(文中誠)과 문중진(文中晉)이 추가로 나타난다.
조선 태종 때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 여겨 후손인 문중용에게 벼슬을 내렸으며,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세웠다.
세종 22년(1440년)에는 영의정에 추증,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는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고종 때에는 일부 유생들이 모든 백성의 만세에 이룬 공을 들어 이색과 함께 문묘에 모실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문극검(文克儉)
- 친조부: 봉익대부(奉端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문한학사(文輪學士) 치사(致仕) 문윤각(文允恪)
- 외조부: 영동정(令同正) 조진주(趙珍柱)
문익점이 등장한 작품[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 창녕박물관 소장 남평문씨 고문서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9호 (2009년 12월 3일 지정)
논란과 의혹[편집]
소속된 사신행차단에 대한 논란[편집]
1360년(경자년, 공민왕 9) 실시된 과거인 신경동당시에 응시해, 문익점은 정몽주와 함께 급제해, 현재의 부군수에 해당하는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이 되었다. 이어 성균관의 순유박사((諄諭博士)로, 그리고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핵심기관인 사간원의 좌정언(左正言)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재위 중인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배원 정책을 시행해서, 친원파를 숙청해서 고려와 원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급기야 원나라 황제인 순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했다.
공민왕은 자신의 복위를 위해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고, 1363년(공민왕 12) 3월과 4월에 다시 사신들을 파견했다. 이때 계품사(計稟使)로, 정사(正使)인 찬성사 이공수(李公遂), 부사(副使)로 밀직제학 허강, 그리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좌정언 문익점을 정하여 사행단이 정해졌다.
이는 태조실록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과연 문익점이 어느 쪽 사행단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사 이공수가 나중에 고려로 돌아올 때 임박을 서장관으로 하여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문익점이 원나라 황도인 대도에서 덕흥군의 신원을 확인하는 문제로 이공수를 찾아보았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공민왕의 시해를 노린 ‘흥왕사의 변’ 이후에 출발한 사신단에 속해 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의 경우에는 이공수를 계품사로 해서 떠난 사행단이 진정표와 하평해개적표, 2개의 표문을 가지고 떠났기 때문에 서장관이 2명이었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1363년이 아닌 1364년(갑진년, 공민왕 13)에 사행을 떠났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원나라에서의 행적[편집]
널리 알려져 있기로는, 원나라에서 ‘불사이군’의 기개를 보이고 순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대도에서 가장 먼 운남행성으로 3년동안 유배를 가게 되고,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강남지방을 거치게 될 때 목화를 발견하여 목화씨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고려사를 보면 덕흥군에 붙어 공민왕을 배신하고, 덕흥군과 최유의 고려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공수와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덕흥군에 붙었다고 이야기하는 고려사의 내용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고려사의 편찬이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루어졌고, 이성계를 지지하지 않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한 사람들의 경우, 관련 내용을 누락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신돈을 다룬 부분을 살펴보면, 개혁의 성과나 그 중요성 등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기보다는, 사적인 추문만을 기록하거나, 신돈이 무슨 일만 벌이면 천지에 기이한 변고가 일어났다고 기록하는 등, 한 인물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익점이 덕흥군에 붙었다는 이야기가 옳다고 가정해보면, 고려로 순순히 돌아왔다는 것도 큰 의문이다. 당시 공민왕을 배반하고 덕흥군을 고려의 새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던 사신들은 다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러므로 문익점이 공민왕을 배반했다고 한다면 순순히 고려로 돌아올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설령 고려로 돌아왔다고 해도 문익점은 파면 이상의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익점이 고려로 돌아온 직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점이, 문익점이 공민왕을 배반하였다는 기록이나 더 큰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에 모두 적혀 있다. 즉 문익점이 공민왕에 대한 충절을 지킨 충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덕흥군에 붙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또 다른 증거는, 바로 이성계를 지지하는 역성혁명을 꾀하던 신진사대부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직을 그만두고 6년 동안 시묘살이를 살았던, 주자가례를 철저히 지키려던 고지식한 사대부가 주군을 배반하고 새 왕을 섬기고자 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적어 보인다.
목화의 전래 과정[편집]
유배 장소 논란[편집]
문익점이 사신행차를 갔을 당시는 원나라가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원나라 조정에서 유배를 보내는 곳은 일반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운남행성인데, 당시에는 홍건적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 각 지역이 나뉘어 지배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당시에 이곳까지 순탄하게 길을 떠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문익점이 유배를 갔다는 설을 부정하는 글을 보게 되면, 홍건적에 관계된 혼란한 정국이 언급되곤 한다. 그렇지만 주원장과 세력다툼을 벌이며 맞서던 장사성이 지배한 지역을 살펴보면, 운남행성까지의 여정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장사성은 옛 오나라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다 하여 ‘오왕(吳王)’이라 자처했지만, 원나라의 ‘승상’으로서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의 관할권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 제후국과 비슷한 지위로 원나라에 협조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항주에서 통주를 거쳐 대도까지 연결된 운하는 여전히 유효했고, 이를 통해 쌀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대도에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원장이나 다른 홍건적의 세력이 지배하는 지역을 피한다면, 운남까지의 여정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최소한 장사성이 주원장과 대적하고 있는 시기라면 운남까지의 여정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리라 보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운남까지 유배를 갔다는 증거로 제시되기에도 여전히 약한 근거라 볼 수 있다. 운남까지 유배를 갔다고 쉽게 결론내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강남지방까지 이동한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목화씨를 구한 지역 논란[편집]
문익점이 굳이 강남지방을 방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도(현재의 베이징)에서 충분히 목화씨를 구할 수 있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왕정의 ‘농서’에 따르면, 이미 문익점이 대도에 가기 오래전부터 목화의 재배가 북쪽 지방에서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현재도 중국은 목화씨의 산출이 가장 큰 국가이지만, 그 경작지는 강남지역 위주이다. 즉, 옛날부터 대량으로 재배되던 지역에서 현재까지도 목화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문익점은 특히 사신단의 서장관으로서, 원나라 조정의 상황을 주시하며, 분주하게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대규모로 목화재배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닌 대도에서 운좋게 목화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이를 심어보자는 생각까지 이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목화씨의 금수 품목 여부 논란[편집]
문익점이 금수품목인 목화씨를 붓뚜껑속에 숨겨서 들여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점이 있다.
문익점이 목숨을 걸고 몰래 목화씨를 구해왔다는 주장에 타당성이 없는 이유로는, 당시 해외로 수출을 금하는 품목은 활이나 화약 등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재료와 희귀한 서적 정도였다는 점이다. 목화를 특별히 금수 품목에 넣어 관리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기에, 마치 지금의 세관을 통과하듯 엄중한 감시를 피하려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 속에 넣어 숨겨왔다고는 볼 수 없다.
설령 목화의 반출을 엄하게 금하고 있었다 해도, 원말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금령이 잘 지켜졌을 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
즉 문익점은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오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태조실록에도 보면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라고 까지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는 목화의 덕을 본 후대의 사람들이 문익점의 공을 드높이기 위해 과장을 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평가[편집]
의생활에 혁명을 가져다 주었다[4]는 평가가 있다. 문익점과 정천익의 목화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공로는 참으로 컸다. 무명과 베 위주이던 옷과 이불에, 솜, 면화 이불과 옷이 보급,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 한 점이 후대에 높이 평가된 것이다.
후대의 학자인 조식, 김육, 윤휴, 이익, 정약용 등은 그가 목화를 보급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남명 조식(曺植)은 후일 문익점의 공로를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라는 시를 지어 찬양하기도 했다.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참고 서적[편집]
- 김영진, 《농림수산고문헌비요》(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2)
-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가람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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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화기(木棉花記)
목화 도입 내력 및 문익점(文益漸)의 약력과 사적 등을 기록한 책.
목화의 도입 내역과 목화를 처음으로 재배한 유전에 세워진 기념비의 비문, 문익점의 약력과 사적을 기록한 필사본. 편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규장각도서.
내용
필사본. 편자와 편찬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서두에 조식(曺植)의 한시가 있고, 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본디 우리 나라에는 목화가 없었는데, 고려 공민왕 때(1360년) 진주 사람 문익점이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으면서 봉사(奉使)로 원나라에 간 지 3년이 되는 가을 귀국할 때, 길가의 밭에 눈송이같이 흰 꽃이 있어, 이를 기특히 여겨 종자(從者) 김룡(金龍)으로 하여금 여러 개를 따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밭을 지키던 노파가 이르기를, 이는 국가가 금하는 바로 외국인이 이를 절취한 즉시 자기도 같은 벌을 받게 된다고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가져온 것이다.
다음해 꽃밭에 이를 심었고, 그 뒤 성공하여 종자를 나누어 전국에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차에, 호승(胡僧)이 우리 나라 산천을 두루 다니며 구경하다가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의 집에 머물러 있던 중, 홀연히 목화를 보고 울면서, 고향에서 목화를 본 지 수년 만에 이국에서 번성하는 목화를 보니 자연 눈물이 난다고 하였다.
이에 호승으로부터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등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게 되었으니, 문익점의 공은 태산이나 하해(河海)에 비길 만하다.
이러한 본문의 끝에도 조식의 한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문익점의 공이 백곡(百穀)을 처음 재배한 후직(后稷)의 공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유전에 세운 기념비의 비문이 들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곳은 문익점이 비로소 목화를 재배한 유전이며, 그가 세상을 뜬 지 500여 년이 지난 이제 이 기념비를 세우면서 그의 공을 기리되, 조식의 한시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니 후직의 공과 같도다(衣被生民后稷同)’를 인용하면서, 지방의 여러 선비들이 의논하여 이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약력란에는 문익점의 약력이 기록되고, 사적란에는 “문익점이 봉사로 중국에 가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그의 장인 정천익이 이를 심었으나, 처음 재배법을 몰라 마침내 한 나무밖에 남지 않았으나, 3년째에 크게 잘 자랐다 하며, 그 유적지는 의성군 산운면 제오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목화의 도입 내력과 그 가공법의 개발 경위를 밝히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농업기술사 연구에도 필요한 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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