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전적지 웅치와 이치

道雨 2022. 10. 5. 16:20

임진왜란 판을 바꿨다, 영화 '한산'에 나오는 이 고개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19〉 웅치·이치

 

웅치(熊峙)는 어디인가.

웅치는 725만 관객을 모은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고개다. ‘육지의 한산대첩’으로 불린다. 웅치는 호남을 지킨 임진왜란의 성지(聖地)다. 원불교 성지도 근처에 품은 웅치는 이제는 트레킹과 라이딩·드라이빙의 성지가 됐다.

 

* 웅치는 전북 완주군과 진안군을 잇는 고개다. 사진 앞 능선을 가로지로는 고개는 덕봉길로 옛 웅치라고도 부르며, 뒤의 익산-포항고속도로가 보이는 곳에는 현재의 웅치, 즉 곰티재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을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 전투지로 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 정여립 사건 탓 전북 의병 활동 위축

 

“어휴 말도 마요. 고개가 얼마나 험한지 명절 때마다 기우뚱거리는 버스를 타고 고향인 진안으로 넘어가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지난달 6일. 전주에서 일하는 전모(57)씨는 양손에 트레킹용 스틱을 들고 곰티재(485m) 고갯마루를 찍고 다시 완주 쪽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곰티재는 웅치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평일에 이곳을 찾은 게 (기자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라며 “주말이면 트레커·라이더·드라이버가 몰려 유난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 웅치는 임진왜란의 격렬한 전투지로, 당시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 묻혔지만 지금은 트레킹 장소로 인기다. 김홍준 기자

 

 

웅치는 전북 진안군과 완주군 사이의 고개다. 고개가 껴안고 있는 만덕산(762m)과 부근 지형이 웅크린 곰의 형상이라 이름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옛 웅치’가 있고, ‘현재의 웅치’가 있다. 1910년 일제가 낸 신작로가 현재의 웅치다. 보통 곰티재로 부른다. 인근에 덕봉마을 옛길(덕봉길)과 적천치 등 또 다른 고갯길 두 곳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덕봉길을 웅치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해져 '옛 웅치'라고도 한다.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서 바라본 만덕산과 그 일대는 마치 곰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웅치(熊峙)라고 이름 붙었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 웅치를 넘어가는 길 대신 들어선 모래재로 고갯마루에서 한 차량이 완주 방면으로 내려서고 있다. 김홍준 기자

 

 

곰티재는 진안 부귀면 세동리 우정·부암마을과 완주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다. 1872년 ‘전주지도’에는 웅치험애(險隘·가파르고 험함)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전주에서 온 고한식(66)씨가 곰티재에서 들려준 '사고사례'는 이렇다. "1966년 6월 6일이었나. 진안에서 전주로 가던 버스가 곰티재를 넘다가 200m 아래로 굴렀다지. 17명이나 죽었어. 대부분 중·고등학생이었지. 이듬해에는 결혼식 하객을 태운 버스가 굴러떨어지기도 했어." 좀 더 낫다는 모래재(1972년)와 보룡재(1997년)에 전주와 진안을 오가는 도로가 생겼다. 하지만 고씨는 "여전히 눈알이 핑핑 돌 정도로 굴곡이 심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430년 전 임진왜란. 왜군은 고씨가 걷고 있던 이 고개를 넘봤다. ‘웅치전투’다. 한산대첩과 같은 날인 1592년 7월 8일(음력) 벌어졌다. 진안에서 왜군이 몰려왔다. 지금 사계절 비경을 자랑하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다진 흙 밑으로 그들의 수만 발자국이 찍혔을 테다. 『난중잡록』이 전한다. ‘(왜적이) 산 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번쩍이고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 전북 완주군에서 모래재로를 이용해 진안군으로 넘어가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만난다. 가을을 비롯해 계절의 절경을 선사한다. 사진 왼쪽 얕은 산이 웅치 일대다. 김홍준 기자

 

 

일본군은 전라도의 수부(首府·감영이 있던 곳)인 전주를 접수해야 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을 함락하고, 상륙 20일 만에 한성까지 무너뜨린 일본군은, 임진왜란의 장기화를 예상하고 조선을 분할통치하려고 했다. 호남을 놔둘 수 없었다. 전주 감영의 수장, 전라관찰사 이광(1541~1607)은 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광은 군사를 움직이라는 주변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왕의 명령이 떨어져서야 근왕군(勤王軍)을 편성해 한성으로 향했지만, 한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에서 말을 돌렸다. 다시 왕의 명령으로 군사를 ‘긁어모아’ 북으로 향했는데, 오합지졸 6만 군사는 1500명의 왜군에게 용인 광교산 근처에서 유린당했다. 이는 영화 ‘한산’에서도 언급하는 내용이다.

 

이광이 주저했던 이유는 ‘정여립 사건’ 때문으로 보인다. 김종수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라고도 부르는 정여립 사건은 당시 호남, 특히 전북 지역을 초토화했는데, 이광은 이로 인해 절대 권력자가 허가하지 않으면 자신의 관할구역인 전라도를 벗어나는 군사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인이었던 정여립(1546~1589)은 동인으로 갈아탔다. 정여립은 서인의 공세에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했다.

전주와 진안을 아울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활을 쏘고는 했다. 왜구를 격퇴했다. 사람을 모으고, 무예를 다지니, 서인의 공격 빌미가 됐다.

김 교수는 “혁명으로 개국하고,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이은 조선에서는, 다른 혁명과 모반을 막으려 사병제도를 없앴다”며, “그런데 정여립이 사실상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다는 건 서인들이 그에게 역모죄를 씌울 좋은 구실”이라고 말했다.

 

1000여 명이 처형됐다. 호남이 흔들렸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을 정탐한 일본 승려 겐소(玄蘇)가 “조선은 기축옥사로 원망의 소리가 가득해 한번 치기만 하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조선 최초의 사병으로 볼 수도 있는 정여립의 조직은 모반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다.

이광도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북의 의병 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뜸했던 이유도, 정여립 사건으로 인한 인물난과 조직 기반의 붕괴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충남 금산을 손에 넣은 왜군은 전북으로 진격했다. 무주·용담·진안이 떨어졌다. 곧바로 전주로 향하는 관문, 웅치였다.

김 교수는 "이광은 관군과 의병을 신속하게 배치하는 등 이전과 달리 사력을 다했다"고 말했다.

 

‘동이 틀 무렵 왜적 선봉 수천 명이 깃발을 등에 꽂고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이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힘이 다 된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자 무너지며 나주(판관 이복남의) 진영으로 갔다…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김제군수) 정담은 …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전주 동쪽 안덕원에 주둔했다(『난중잡록』).’

 

안덕원에서 다시 접전이 벌어졌다. 왜군은 금산으로 물러났다.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웅치전투는 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이어지는 안덕원 전투와 함께 호남 방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달 7일. '옛 웅치'로 부르기도 하는 덕봉길(부귀면 세동리 신덕마을~소양면 신촌리 두목마을)에서 웅치전적지보존회에서 세운 세 개의 푯말을 만났다. 웅치전투 세 곳의 방어진지를 가리키는 내용이었다.

'현재의 웅치'인 곰티재 고갯마루에는 웅치전적비가 있다. 그곳에서 지난 8월 5일(전투가 벌어진 음력 7월 8일) 웅치전투 기념식이 열렸다. 헷갈린다.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덕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두목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덕봉길에 있는 웅치 제3방어진지 푯말. 진천골 등 군사용어에서 따온 지명 이름이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이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무대라고 보고 있다. 김제군수 정담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웅치(곰티재) 고갯마루의 웅치전적비. 김홍준 기자

 

하 교수는 “웅치 일원의 세 고갯길 중 덕봉길 일대가 웅치전투의 주요 전장으로 추정된다”며 “이 지역에는 진친골·왜장바위 등 전투와 관련된 지명이 있고, 성터·서낭당·진지터와 전사한 군사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 교수는 또 “실제 전투는 웅치 일원의 세 고개 전역에서 전개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난중잡록』에서는 ‘왜군이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라며 전투가 폭넓게 전개됐음을 표현하고 있다.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에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던 조선이 육상에서 거둔 실질적 첫 승리였다. 동시에, 호남을 지켜냄으로써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두목마을 쪽에서 바라본 덕봉길(옛 웅치길) 고갯마루. 급조한 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이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무대라고 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의병장 황박(?~1592)은 영화 ’한산‘에서 웅치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이후에 벌어지는 이치(梨峙·배티재·349m, 충남 진산군 묵산리~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전투에서 전사했다.

또 ‘한산’에서는 이순신이 있던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육지와 해상 양면으로 공격하기 위해 일본군이 웅치를 넘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수와 웅치의 거리는 직선상으로 130㎞나 된다. 같은 날(7월 8일) 벌어졌지만 동시에 작전을 펼칠 거리가 아니다. 극적 전개를 위해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권율장군 이치대첩비. 김홍준 기자

 

 

* 국도 제17호선이 뚫리면서 충남 금산과 전북 완주를 잇는 이치 고갯마루도 도로 위로 올라왔다. 옛 이치 길은 사진 왼쪽의 대둔산휴게소 아래에 있다. 김홍준 기자

 

 

#일본, 일제강점기 때 권율전적비 파괴

 

“우리도 우리지만 전주성도 걱정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안성기가 연기한 광양현감 어영담(1532~1594)이 이순신(박해일 분)에게 말한다.

일본군은 전주를 다시 공략했다.

1592년 8월 17일(전투 날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치에서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왜군을 맞이했다. ‘황진은 용맹이 으뜸이었는데, 돌격전을 벌이다가 적의 탄환에 맞았다…권율이 칼을 빼 호통치며 독전하니, 사졸들이 모두 용감하게 달려나가 일당백으로 싸워 이겨냈다(『재조번방지』).’

 

이기복 충남 금산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권율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이치전투는 일본군에게 큰 패배였다”며 “일제 강점기에 고종 때 세운 권율이치전적비를 파괴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말했다. 현재 권율이치전적비는 옛 이치 길을 바라보고 있다.

황진·황박과 항왜장수 김충선의 비석은, 국도 제17호선에 난, 대둔산(878m)이 보이는 새로운 이치 고갯마루에 있다.

 

 

*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권율장군 이치대첩비는 고종 때 만들어졌으나 일제가 강점기 때 파괴했다고 한다. 그 일부가 남아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달 6일. 월상리에서 곰티재 고갯마루를 찍고 다시 걸어 내려오던 김재근(68·전주)씨가 칡꽃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다른 곳보다 한 달이나 늦은 개화다. 동행하던 김수현(68·전주)씨는 “곰티재는 꽃 피는 것과 얼음 녹는 것은 두 박자 느리고, 단풍 드는 것과 눈 오는 것은 한 박자 빠르다”고 말했다. 예전 완행버스가 다녔다면서 길은 흙과 자갈 뒤범벅이다. 김재근씨는 “아스팔트라도 깔렸다면 이런 발 맛은 못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재의 웅치, 곰티재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인명이 묻혔지만 지금은 트레킹 장소로 인기다. 김홍준 기자

 

만덕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고갯길 옆구리를 친다. 절벽으로 떨어지지 말라고 1960년대에 세운 방호벽을 끼고 자동차가 지나간다. 자전거 라이더가 엉덩이를 들고 힘을 낸다. 이들은 다른 이들이 그랬듯, 곧 의기양양하게 솟은 1㎞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밑에서 잠시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군 수천, 수만 명이 몰려오던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사라진 길.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이어진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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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치, 이치 전투

 

 

용인 전투에서 패배후 전라도로 돌아온 이광은,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김제 군수 정담에게 웅치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정담은 황진과 나주판관 이복남, 전주만호 황박(의병장) 등과 함께 웅치에 머물며 방어 태세를 갖췄는데, 이광은 황진에게는 남원 방어를 위해 잠시 내려가라고 명했다가 다시 귀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이 사이에 웅치로 일본군이 밀어닥쳐, 일본군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왔는데, 이복남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정담은 부하 장수가 후퇴를 권했음에도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며 끝까지 활로 쏘며 저항했으나, 일본군에 포위돼 전사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기사 )

 

다행히 이복남이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때 황진의 군사가 도착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해 물러가게 했다. 즉, 일본군이 웅치까지는 돌파했으나 안덕원을 돌파하지는 못한 것.

 

징비록에서는 당시 주장인 이광의 공으로만 언급되었으나, 포저집과 계곡집, 강한집, 고대일록 인명록에서 황진이 안덕원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왜노들이 전주(全州)를 침범하자, 공이 말을 달려 안덕원(安德院)에서 왜노들을 크게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맞혀 죽였으니, 이로부터 왜노들이 감히 전주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였다.

 

적이 전주(全州)로 향하자 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나아갔는데, 안덕원(安德院)에서 적과 만나 접전을 벌인 결과 크게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훈련판관으로 관직이 승진되었다.

 

진안(鎭安)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으며, 훈련원 판관으로 이치 전투(梨峙戰鬪)에 참가하여 왜적을 격퇴하였다.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安德院)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邀擊)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7월 초의 일이었다.

패배한 일본군은 소양평 방면으로 도주했는데, 황진은 이를 추격하여 대파시켰으며, 이 전투의 공로로 종5품인 훈련원 판관으로 승진했다. 황진은 남은 병사들을 모아서 이치고개로 향했다.

 

권율은 황진 부대와 함께 이치 전투를 준비했다. 복병은 물론 목책을 쌓아놓았으며 마름쇠와 깃발까지 동원했다. 일본군이 이치에 도착 총을 쏘며 달려들자, 황진은 부하 장수인 공시억 등과 함게 고지에서 맞서 싸웠고, 다른 부하 장수인 위대기는 복병으로 일본군을 급습했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기사)

 

한편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하므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렇게 황진이 부상까지 당해가면서 이치 전투에 승리하고 동복으로 돌아가는데, 백성들이 나와서는 "황진 장군이 아니면 전주가 어찌 무사하였겠습니까."하고 칭송했다고 한다.

황진의 행장에 의하면, 일본 승 화안(和安)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인 이성구에게, 자신들이 전쟁 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록에서도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황진의 공을 으뜸으로 꼽았다.

 

한편 이치 전투의 공로로 황진은 훈련원 부정으로 승진했는데, 정철이 남쪽 지방을 시찰하다가 이 전투에 관해 알아보고는, 격문을 다시 올려 익산 군수(종4품)겸 전라도 조방장(전라도의 군직을 맡는 부장), 통정대부(정3품,당상)로 승진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웅치와 이치를 일본군이 통과하면, 전주는 6군 소조천융경(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 이끄는 16,000명의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수 밖에 없다. 전라도 최대 도시인 전주가 일본군 손에 떨어지면, 호남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한반도 최대 곡창지인 호남 평야를 잃으면 조선은 전쟁을 계속 수행할 여력이 없다.

웅치 전투 직후에,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 6,700명이 금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지만 패하고 만다. 

 

조헌과 영규가 이끄는 1,600명의 의병과 승병 역시 2차 금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한다.

결국 일본군의 전라도 점령을 막은 것은 권율과 황진의 관군이고, 이 곳이 임진왜란 초기 최대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도 공을 크게 인정한 것이고, 황진의 이례적인 고속승진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정유재란이 시작될 때까지 다시는 호남을 공격하지 못했으며, 이는 곧 이순신의 수군이 해전에만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출처] 웅치.이치전투|작성자 kanghoon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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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낭만도사'님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 '한산'의 웅치전투와 의병장 황박






영화 ‘한산 : 용의출현’을 보면 육지에서 의병들의 전투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투항한 왜군이 의병들과 함께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웅치(熊峙)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인데, 이때 의병장이 황박(黃璞)입니다. 황박은 실제로는 이 웅치전투에서 전사하지 않고 이치(梨峙)전투에서 29세로 전사합니다.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좀 늙었는데, 배우 이준혁이 연기했습니다. 웅치전투와 황박 그리고 전적지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전투의 개요


1592년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웅치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 관군·의병과 왜군의 전투이다. 임진왜란 개전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2개월이 지나자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의 거의 전 지역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였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의 일부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千隆景]의 지휘 아래 호남을 공격하여 1592년 6월 23일에 금산성을 점령했고, 이를 거점으로 용담·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진안을 점령한 왜군은 1592년 7월 8일 본격적으로 웅치(熊峙)를 공격하였으나, 전라도 관군과 의병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안덕원(安德院)까지 진출하였으나,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이를 격퇴하고, 전주 부성과 전라도 방어에 성공했다.

 
 

* 저 산고개가 웅치다


전투의 경과


1592년 7월 2일에 진안에 주둔하던 왜군이 장수로 이동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전라 감사 이광은 웅치 수비에 임하던 동복 현감 황진을 남원으로 이동시키고, 대신 의병장 황박(黃樸)으로 하여금 웅치 수비를 돕게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7월 5일부터 다시 웅치로 향하여, 7월 8일 새벽부터 웅치 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이 때 7월 8일은 바다에서 역사적인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권율은 전라 감사 이광의 지시에 따라 남원에서 영호(嶺湖)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황진은 남원에서 돌아오는 중이었으므로, 웅치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나주 판관 이복남·의병장 황박 등이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전장에서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 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 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왜군 선봉의 공격을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싸워 물리쳤고,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점에 왜군이 다시 전면적으로 공격하자, 웅치의 수비 병력도 이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저녁 무렵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고 피로한 틈에 왜군이 다시 전면 공격을 가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과 황박은 안덕원으로 후퇴했다. 김제 군수 정담과 휘하의 병력은 웅치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정담을 비롯하여 종사관 이봉·강운 등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웅치는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 조조선국충간의담)”라고 적은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1592년 7월 9일에 전주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남원에서 돌아온 동복 현감 황진이 안덕원 인근에서 전력이 약화된 왜군을 격파했다.

 



전투의 결과


안덕원에서 동복 현감 황진에게 패하고 퇴각한 왜군은, 며칠 동안 진안 지역에 머물면서 약탈을 행하다가 금산으로 철수하였다. 이들은 잔존 병력들과 함께 다시 진산을 거쳐 이치(梨峙)를 공격하였으나, 동복 현감 황진과 광주 목사 권율 등에게 패배하여 금산성으로 철수하였다.


웅치에서 안덕원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투는, 후일에 벌어진 이치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초기 호남 방어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웅치 전투를 통해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열을 가다듬어, 왜군의 호남 점령 시도를 무산시켰다. 호남 지역의 곡창을 보존함으로써,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적·물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웅치전적비 안내판
의병장 황박은 현재 전북 익산시 왕궁면 장암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주(紆州), 호는 죽봉(竹峰)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문숙공 황거중(黃居中)의 후손이다.

황박 장군에 대한 기록은 『김제향교지』 충훈 편에서 찾을 수 있다.

‘문숙공거중후임난순절이치증병사명정충(文肅公居中后壬亂殉節梨峙贈兵使命旌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뜻은 “황박은 문숙공 거중의 후예로, 임진왜란 시 이치전투에서 순절했고, 증직으로 병사를 받았으며, 충신으로 정려를 받았다”이다.

문숙공 황거중은 우주황씨(紆州黃氏) 중시조로,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가 남원 운봉 전투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한 개국 공신이다. 황거중의 묘는 비봉면 내월리에 있다.


의병장 황박은 무과 급제 후 전주 만호로 있었다. 1590년 부친상을 당했고, 시묘살이 중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 시묘살이를 청산하고, 의병 500명을 모집하여, 고향에 홀로되신 어머님과 부인,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죽을 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그의 나이 28살이었고, 3대 독자였다.

 
 

           * 황박장군 추모비


 

이치전투와 황박

 

 

웅치의 선봉장 황박과 주력부대를 이끌던 황진은, 부하들을 이끌고 이치의 권율 장군 휘하에 배치를 받았다. 이치의 선봉장은 동복(현 화순) 현감 황진이었고, 후군장은 의병장 황박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에는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군장 황진 장군이 이마에 적탄을 맞고 졸도하여 쓰러지자, 왜적들이 포위하여 좁혀 오자, 황박 장군은 이를 뚫고 들어가서 대적하다 8월 28일 전사하였다”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는 9월에야 3대 독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통곡하다 졸도하였고, 식음을 전폐하자, 전라감사 김광혁이 선조에게 음식 하사를 건의하여, 계사년(1593년)에 선조가 하사한 음식이 고향 집에 도착하였다.


의병장 황박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고, 고산면 어우리 샘골 우주황씨(紆州黃氏) 전주파 종산에 ‘황박(黃璞)’의 제단(祭壇)이 있으며, 김제시 용지면에 충신 황박 정려가 있다.

 
 
 

                                       * 영화'한산'에서 황박을 연기한 이준혁 배우

 

 

 

 

웅치 전적비(熊峙 戰績碑)

: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 18-1

 

필자가 이곳 전적비를 찾은 것은 6년 전이었다.

당시는 아무도 찾지 않는 듯 인적도 드물었다.

또 웅치고개까지 가는 길도 비포장 도로였는데 지금은 어떨까?

영화 ‘한산’이 계기가 되어 전적지에 많이 찾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 웅치전적비

 
 


[출처] 영화 ‘한산’속 웅치전투 의병장 황박|작성자 낭만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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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안덕원 전투에 대한 글은 '푸른들녁'님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왜적을 쓸어버린 안덕원전투 [ft. 소양평, 단암사, 황진장군 정충사]

 

 

 

웅치에서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자, 아군은 비록 패했지만 전열은 정비하여 곰티재를 내려와 화심을 지나, 전주 아중리 부근 안덕원으로 후퇴합니다.


왜군 역시 밤이 되어 고갯길을 따라 장구목(완주 소양면 삼중일교)으로 내려와, 전주성 진입을 목표로 구진(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을 지나 안덕원으로 향합니다. 


안덕원(安德院)은 전라북도 전주시 산정동에 있던 원(院)의 하나로, 공적 숙박시설인 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입니다. 

 

 

 

 

안덕원마을은 진안 방면에서 완주군 소양면을 지나 전주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었는데, 지금의  전주시 아중리와 금상동 지역 어느 곳에 있던 마을입니다. 


금상동성당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은 지금은 산자락을 깎아 경사도가 낮아졌으나, 과거에는 경사가 심한 길이었다고 합니다. 


안덕원마을의 좌측인 북쪽에는 소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우측인 남쪽에는 묵방산(523m)으로  산자락이 이어져 있습니다. 


1592년 7월 8일 웅치에서 후퇴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과 남원 쪽에서 급히 이동해온 황진 부대 등은 안덕원 부근에 매복하여 왜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은 전주성은 이정란(李廷鸞)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자신은 용인전투 패전 과정에서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 최후의 보루인 남고산성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주성 수성장이었던 충경공 이정란을 기리기 위해, 남고산성 가는 길목에 충경사가 서있고, 전주시를 동서로 가로지른 도로를 ‘충경로’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이광이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전주성을 버리고 남고산성으로 숨어들어간 이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금산의 적이 멀리 말을 달려 추격해 와서 웅치에 도착하고, 곧장 전주로 향하니 감사 이광이 말하기를, “대군이 성안에 들어와 지키고 앉아서 적을 우리 지경에 가까이 오게 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내가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성 밖에 외진을 만들 터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다가 안팎으로 협공하면 성공할 것이다.” 하였는데, 실제로는 도망가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박동량, 기재사초 하권, 임진일록 3, 8월)


임진왜란 개전 3년전 기축옥사로 정여립을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아까운 인재 1천여명을 선조가 학살하지 않았더라면, 국난을 맞이했을 때 이광같이 무능한 자가 아니라 유능한 인재가 앞장서서 전라도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이 천하공물론을 바탕으로 이 나라는 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만인의 공물이라며, 신분을 뛰어넘어 대동계를 결성하여 무술과 병법을 연마하고, 왜구 침입시 소탕에 앞장섰던 사실을 상기하니 더 안타깝습니다.




일본군은 웅치 고개 돌파에는 성공했지만,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전주성에 군사가 얼마나 있는지 방어태세가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 수 없어 무작정 전주성 공격에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왜군이 전주성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가던 중 조선군이 미리 세워놓은 허수아비와 횃불들을 피해 그 옆에 있는 험한 고개로 다시 이동하다가, 매복해 있던 황진 부대 등에게 급습을 당해 패퇴합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 고을 사람인 전 전적 이정란이 주민을 이끌고 전주성에 들어가 지켰으며, 감사 이광은 주성 밖 龍函臺(용함대 : 높고 평평한 곳, 남고산성)에 진을 치고서, 낮에는 疑兵(의병 : 가짜 군사)을 설치하여 가득하게 하고 밤이면 횃불을 줄지어 세워 서로 응하게 하였다. 


정란이 군사를 엄히 단속하여 주성에 웅거하니 왜적이 고군으로 깊이 들어와서 대적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는데, 이로부터 다시 침입하지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26권 1592년 7월 1일)


혼란에 빠진 왜군이 소양평 방면으로 도주하자, 황진 부대는 이를 추격하여 대파하여, 왜적 3천여 명을 사상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소양평이 현재 어느 곳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어, 소양면 죽절리 단암사를 찾았습니다. 단암사에서 안덕원까지는 4~5km 십리 정도 떨어져 있어 비교적 가까운 거리입니다.


단암사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위틈을 파서 미륵전을 앉힌 모습이 이색적이고, 단암사 뜰앞에 서있는 오래된 미륵불이 이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이곳을 오가면서 많이 보았던 사찰이건만 관심이 없었기에, 이 곳이 안덕원에서 기습을 당하여 도망치는 왜적을 깨부순 역사적인 장소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못해보았습니다.


의병장 이정란이 남긴 [수성유적(守城遺蹟)]에 따르면 “소양평 불당 앞에서 적을 만나 싸워 선봉을 쓰러 눕혔다(所陽坪佛堂前 與賊合戰 戮盡先鋒)”고 기록되어 있고, 소양면 죽절리 단암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안덕원전투는 웅치전투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전투이므로, 웅치전투와 같은 전투로 보기도 합니다. 권율은 웅치의 공이 행주의 공보다 크다고 했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 한 도가 이 싸움으로 인해 보존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덕원전투에서 황진 장군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워 일본군을 쓸어버렸는지에 대해서, 사료들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진 장군이 전라감사 이광의 명에 따라 전주에 도착했을 때 왜적은 이미 안덕원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황진은 안덕원에서 왜적을 쓸어버렸다. [무민공실기]


동복현감 황진이 홀로 왜적 떼를 만나 곧바로 내쳐, 적장 한 명과 왜군 3천명을 죽였다[단조보감]


황진 장군이 안덕원에서 일기당천으로 적병을 궤멸시켰다. [최수지가 전주 부윤에게 올린 글]


진안을 석권했던 왜군이 전주성을 침공하려고 웅치를 넘어오면서 전투를 벌여, 우리 측의 정담 이하 많은 장병이 전사하며, 전열이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 다급한 시기에 황진 군대의 명쾌한 전승 소식은 하나의 희소식이었다.[안방준의 임진전사, 호남절의록의 기록]


적국인 왜국 승려 가스야스[和安]가 조선에 와서 연위사(延慰使) 이성구(李聖求)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이 임진왜란 중에서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세 곳을 헤아렸는데 웅치를 첫째로 꼽았다고 합니다. 


웅치전투를 통하여, 그동안 관군과 의병으로 분리되어있던 조선의 군대가 체계적인 연합군을 구축하여 함께 싸우기 시작합니다. 


웅치전투 이후 수륙병진 작전을 통해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본진과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공격하려던 왜군의 전략은 좌절되고 맙니다.


안덕원 전투 관련 안덕원 지하차도 부근에서 역사적인 기념물 등이 있는지 자료도 찾아보고 이리 저리 둘러보기도 했지만, 흔하디 흔한 전적비나 기념비 하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 왜군이 어디에 주둔했고 기습공격을 감행한 곳이 어디인지, 도망가는 적을 쫒아가 패퇴시켰다는 소양평이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보이질 않습니다. 혹시 알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가르쳐주면 고맙겠습니다.


안덕원이 있던 곳인 아중리 입구에 안덕원 지하차도가 있고, 소양쪽으로 안덕교가 있고, 안덕원로가 나있어, 이곳이 안덕원이었다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왜군의 전주 침공을 막아 곡창 호남을 지킨 자랑스런 안덕원 전투와 임진왜란 개전 이후 처음으로 매복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왜적 수천 명을 쓸어버린 용맹스런 황진 장군을 기념하는 ‘안덕원 전투 기념 공원’과 황진 장군 추모비 정도는 안덕원 지역에 조속히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진 장군을 모신 사당과 그의 묘소는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 정충마을 뒤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붙어 있는 문패에 ‘평남댁’, ‘베트남댁’ , ;화정댁‘ 등 택호와 함께 멋진 사진이 붙어 있어 평화로운 마을에 사람사는 온기를 더합니다.

마을 이름이 정충마을이라 조금 우습기도 한데, 이 마을이 정충마을이 된 이유는 마을 뒷산에 있는 황진 장군이 사당 이름이 旌忠祠(정충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당으로 가는 길 마을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가 수준 이상입니다. 

황진 장군이 황희 정승의 5대 손이라 황희 정승의 ‘누렁소와 검은 소’ 일화도 벽에 글과 그림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황진 장군을 모신 정충사는 2020년 대홍수때 산사태가 나 토사가 무너지고 사당도 훼손됐는데, 아직까지도 보수가 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황진 장군이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께서 통곡하며, “황진이 이미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 고 한탄할 정도로 큰 공을 세운 황진 장군인데, 당국에서는 좀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안덕원에서 대패한 왜군은 1592년 7월 10일에 진안을 거쳐 고바야카와 본진이 있는 금산으로 후퇴하고, 황진 역시 안덕원 전투 직후 전력을 재정비하여 이치고개로 이동 이치 전투를 준비합니다. 이치는 권율 장군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주를 공격하던 일본군의 본진은 금산에 있었고, 호남의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방어사 곽영의 부대는 진산에 주둔하며 금산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치전투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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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황진(黃進) 장군

 

 

 

 

 

총론

[1550년(명종5)∼1593년(선조26) = 44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무장(武將). 자는 명보(明甫). 호는 아술당(蛾述堂)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남원(南原)이다. 아버지는 생원 황윤공(黃允恭)이고, 어머니 남양방씨(南陽房氏)는 봉사방응성(房應星)의 딸이다. 정국공신(靖國功臣)황탄(黃坦)의 손자이며, 명재상 황희(黃喜)의 5대손이다.

 

선조시대 활동

 

1576년(선조9)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고향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례를 마치고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이 되어, 1583년(선조16) 함경도 시전(時錢)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참획한 오랑캐의 수급(首級)을, 죄를 지어 충군(充軍)된 친구에게 양보하였다. 그 뒤에 경원부(慶源府)안원보(安原堡)권관(權管)을 거쳐,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1년(선조24) 통신사(通信使) 정사(正使)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김성일(金誠一) 일행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그 형세를 보고 일본군이 곧 조선으로 침략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노자를 털어 일본 보검(寶劍) 한 자루를 사가지고 돌아오면서, “왜적이 쳐들어올 때 내가 장차 이 검을 쓸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 제용감 주부를 거쳐, 동복현감(同福縣監)이 되었는데, 장차 왜변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이에 대비하여 매일 공무가 끝나면 언제나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면서, 실전에 필요한 온갖 무예를 연마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임진왜란 초기 활동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근왕(勤王)하기 위해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관찰사이광(李光)을 따라 용인(龍仁)까지 북상하였다. 이 때 일본군의 습격으로 전라도 군사가 거의 전멸하였으나, 그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에 잠복하였으므로 온전히 동복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그 뒤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웅치(熊峙)를 지키던 중, 일본의 주력 부대가 전주(全州)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병력을 이끌고 전주로 달려갔다. 도중에 진안(鎭安)에 침입한 일본의 선봉 부대를 전멸시켰고, 안덕원(安德院)에서 일본의 주력 부대와 만나 접전을 벌인 끝에 크게 격파하였고, 그 전공으로 그는 훈련원 판관에 임명되었다.

이현(梨峴)을 지키고 있을 때, 한 밤중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다리에 탄환을 맞았으나, 휘하의 군사들이 힘껏 싸운 끝에 왜적을 물리쳤다.(『간이집(簡易集)』 권1)

 

부상을 치료하는 사이에, 훈련원 부정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전라도체찰사 정철(鄭澈)이 그의 명성을 듣고,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임명하고, 전라도조방장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어 전라도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북상하여 수원에 주둔하면서,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그동안 세운 전공으로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고, 충청도 조방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1593년(선조26)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충청도병마사의 행영(行營)을 안성(安城)으로 옮기고 군사를 재정비하였다. 적장 후쿠시마[福島正則]가 안산(安山)을 탈취하려고 죽산성(竹山城)에서 나오자, 그는 이들과 맞서 싸워 죽산성을 빼앗았다. 또 퇴각하는 일본군의 뒤를 추격하여, 상주(尙州)의 적암(赤巖) 등에서 싸워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가장 용맹을 떨친 명장으로, 바다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육지에서는 황진을 꼽을 수 있다.

 

제2차 진주성 싸움과 황진의 죽음

 

1593년(선조26) 명(明)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거의 성립되어,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명나라 군사도 일단 전투를 중단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제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주력 부대를 진주성으로 총집결시켰는데, 그 군사 규모가 5, 6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김해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이 제일 먼저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이어서 경상도우병마사 최경회(崔慶會),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등이 관군을 이끌고 들어왔다. 충청도병마사 황진은, 고립된 성이라 구할 수 없다는 의병장 곽재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천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그해 6월 충청도 병사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권3)

 

이어 김천일(金千鎰) · 고종후(高從厚) · 양산숙(梁山璹) 등 전라도 의병장들과 김준민(金俊民) 등 경상도 의병장들도 의병들을 이끌고 자발적으로 모여 들었다.

 

문관 출신인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을 대신하여 나주 의병장 김천일이 총지휘를 하고, 황진은 ‘순성대장(巡省大將)’을 맡아서 김해부사 이종인과 함께 전투 계획을 세웠다.

 

6월 20일 일본군의 대병력이 진주성으로 진격하면서 <제2차 진주선 전투>가 벌어졌다. 며칠 동안 공성(攻城)하는 왜군과 이에 대항해 수성(守城)하는 조선군 사이에서 일진일퇴의 전투가 거듭되었다. 전투 중 큰 비가 내려 성벽이 무너지자, 황진은 직접 돌과 흙을 져 날랐고, 밤을 새워 성벽을 다시 쌓았다. 이에 감명받은 백성들이 모두 나서서 도왔으므로, 하루 만에 성벽을 보수할 수 있었다.

 

6월 28일 새벽녘에 왜적이 진주성의 동쪽과 북쪽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한바탕 크게 싸워 왜적을 물리쳤다. 순성대장 황진이 순찰하다가 이곳에 이르러서 이종인의 무예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성 밖 상황을 살펴보다가, 성 아래 잠복해 있던 적병의 총을 이마에 맞고 즉사하였는데, 향년이 겨우 44세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진주성 전투는 6월 2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개되어 서로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는데, 8일째 되던 날 황진 · 장윤 · 김준민이 왜적의 탄환에 전사하자, 그들에게 의지하던 장병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성안의 민심도 흉흉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 서북쪽 성벽으로 일본군이 난입하여, 진주성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여, 약 6만여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진주목사서예원 등은 도망쳤고, 최경회 · 이종인 · 고종후 등 수십 명의 지휘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성품과 일화-전쟁터에서 꽃피운 우정

 

황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수염이 아름다워, 그 모습이 매우 특이하고 훌륭하였다. 사람됨이 엄격하고 진중하며 기개와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고, 어깨의 힘[膂力]도 남보다 세었다.

젊어서 강건하며 민첩하기가 마치 비호(飛虎)와 같아서, 각종 무술 시합에서 항상 이종인과 1, 2등을 다투며 나란히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친한 벗이 되어서 생사(生死)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무과에 급제하여 이종인은 김해부사로, 황진은 충청도병마사로 진주성 싸움에 자원하여 참가하였다. 그러나 8일째 전투가 끝나고 순찰을 하던 황진은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친구 이종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황진이 죽었을 때에는 아직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이어서, 이종인은 그의 시신을 성 안의 한 구석에 묻었다.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의 두 아들이 그 시신을 찾아서 전라도 남원의 선영에 안장하였다. 34년 뒤에 그의 부인 소씨(蘇氏)가 돌아가자, 1626년(인조4) 선영의 옆 자리를 골라서 묘소를 만들고 부부를 합장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묘소는 전라도 남원 풍산(楓山)의 선영에 있는데, 장유(張維)가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계곡집(谿谷集)』)

죽은 뒤에 좌찬성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되었는데,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 · 정충사(貞忠祠)에 제향되었다.(『청음집(淸陰集)』 권29)

 

부인 진주소씨(晉州蘇氏)는 부장(部將)소충세(蘇忠世)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황정직(黃廷稷)은 무과에 급제하여 안동판관(安東判官)을 지냈고, 차남 황정열(黃廷說)도 무과에 급제하여 교동현감(喬桐縣監)을 지냈다. 손자 황위(黃暐)는 황정열의 아들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