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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 초혼(招魂)과 그에 관한 이야기

道雨 2023. 5. 30. 17:56

김소월의 시 초혼(招魂)과 그에 관한 이야기

     

 

 

 

초혼

                                                                                                                   - 김소월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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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과 시 초혼의 이야기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김정식'이란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3살 때, 김정식의 아버지는 일본인 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이상자가 된다.
정식은 할아버지 집으로 옮겨져 아픈 상처를 가진 채 성장했다.

이후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3살 많은 누나 '오순'을 알게 된다. 
'정식'은 종종 '오순'과 마을 폭포수에서 따로 만나며 마음을 의지했다.
정식이 14살이 될 때까지 둘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일제강점기하에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정식에게 행복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가 14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강제로 혼인을 올리도록 명한 것이다.
혼인의 상대는 할아버지 친구의 손녀 '홍단실' 이었다.
당시엔 집안 어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였고, 정식은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홍단실과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오순이 19살이 됐을때, 그녀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둘의 연락은 끊겼지만,  정식은 자신의 아픔을 보듬어주던 오순을 잊지 못한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이후에 일어난다.
세상은 정식에게 작은 그리움도 허용하지 않았다.
3년뒤에 오순이 남편에게 맞아 사망한 것이다.
오순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고,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정식은 아픈 마음을 안고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사랑했던 오순을 기리며, 시(詩)를 한 편 적는다.

 

이 때 지은 시가 바로 '초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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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1902~1934)

 

* 생애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에 시달리며,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하는데,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온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를 하게 된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게 된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 대지진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한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시킨 것이었기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에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할아버지의 광산이 경영 실패로 망한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 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또한, 사망 당일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샀다는 기록이 있어서 "김소월이 빈곤에 시달리다 아편을 먹어 자살한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고는 했다고 하는데, 그러다 아편 과다 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 기타

 

한국인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온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뜻.

민족시인이자 한국 서정시의 원류, 민족시의 발원지로 불리는 우리나라를 대표 하는 시인이다.

전 국민 애송시 1위 역시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이다.

 

김소월은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김소월의 이름과 시속의 화자들이 여성적인 느낌을 많이 주어, 가끔 그를 여류시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한다.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은 현재는 북한 지역이라, 분단 이래 남한(대한민국)에서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을 뿐더러, 오늘날엔 다른 의미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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