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땅밑 ‘1800년’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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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9일 오전 11시,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금강송 숲. 요란한 전기톱 소리가 적막을 깬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아름드리 금강송 한 그루가 쓰러졌다. 가지를 쳐내 매끈해진 나무는 산림청 헬기에 달려 인근 야적장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강릉과 양양에서 공수한 수령 80~250년 금강송 스물여섯개는 서울 경복궁에서 1년여 동안 건조 과정에 들어간다. 나무가 마르는 한편으로 다듬은 화강석재를 쌓아올려 무지개문을 만든다. 2009년께 마른 금강송이 기둥과 대들보가 되어 누각으로 우뚝 서면 광화문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터이다.
광화문 복원작업이 후반으로 치닫고 있다. 한켠에서는 이렇게 광화문에 새로운 역사를 더하고 있고, 한켠에선 시간을 거슬러 광화문에 쌓인 옛 역사의 켜를 들춰내고 있다. 복원사업을 계기로 발굴팀이 들여다본 광화문 터 땅속은 수백년 세월이 타임캡슐처럼 고스란히 담겨 세월의 역순으로 역사의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 1968년 광화문
박정희 대통령때 만든 이 구조물은 ‘광화문’이란 현판을 빼면 온통 돌과 콘크리트다. 철거를 위해 지하 10m까지 굴삭기를 내려 기초를 뽑아냈다. 현재 고궁박물관 옆 공터에 진열된 잔해를 보면 기둥과 천장은 물론 공포와 서까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당시 정부가 녹화를 위해 벌채를 금하면서 시범케이스로 목재를 전혀 쓰지 않은 공법을 채택했다. 1억5000만원의 공사비가 들었는데, ‘5대 궁궐 및 능원 보수’ 비용이 1100만원이었던 것과 견주면 들인 공이 비친다. ‘현지 목조 복원’(문화재관리국), ‘원래 자리 콘크리트 복원’(서울시)으로 의견이 갈렸으나 대통령 지시로 결판났다. 1968년 12월12일치 신문을 보면 3월15일 기공해 272일 동안 연인원 12만8천명이 투입돼 완성한 구조물은 길이 88.6m(양쪽 담장 포함), 높이 15.4m, 무게 7800t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968년 광화문’은 콘크리트 덩어리인 점 외에 터에 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 1927년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 없애려다 마지못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현재 민속박물관 정문자리)으로 옮겨놓은 원래의 광화문 건물은 한국전쟁(1951년) 중 폭격으로 소실됐다. 터 역시 일제가 싹뚝 깎아 평평하게 다듬고 전찻길로 내주어 잊혀졌다. 1968년 광화문은 안으로 들여세운 총독부 정문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총독부 건물을 승계한 중앙청 건물과 함께 옛 남산의 신궁자리를 향하게 된 것이다.
1867년 광화문
광화문 발굴팀의 추정은 옳았다. 원래 광화문, 곧 고종 4년인 1867년 만든 ‘1867년 광화문’은 ‘1968년 광화문’보다 1 정도 앞에 있었다고 본 발굴팀은 두 달 간의 발굴 끝에 지난 9월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 떨어진 곳의 도로 아래 70cm 지점에서 동서 34.8m, 남북 10.2m(총14.7m) 크기의 ‘1867년 광화문’ 기단부를 찾아냈다. 일제가 흩뜨리고 ‘1968년 광화문’을 지으면서 일부를 파먹었지만 홍예문 자리가 분명했으며 정문의 위엄을 위해 돋운 월대와 임금이 다니던 어도를 일부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1867년 광화문’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작업 가운데 일부. 그해 5월17일 공사를 시작해 9월18일 기둥을 세우고 10월11일 대들보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공사기간이 농번기와 겹치는 것은 서울이 도시화하면서 노임노동자가 형성됐음을 반영하고, 비교적 짧은 다섯 달만에 완공한 것은 민간 목재상의 출현, 조립식 가공기술 발달, 기술자의 직능분화 등의 결과라고 김동욱 교수(경기대)는 분석한다. 당시 총감독은 스물네살 김수연. 전문가 기술자인 그는 근정전 설계도 감독했다.
1395년 광화문
원위치를 확인해 1차 목표를 이룬 발굴팀은 욕심을 더 냈다. ‘1968년 광화문’이 파먹어 어차피 훼손된 ‘1867년 광화문’ 기단부 북쪽 면을 절개해 보자는 것. 흙을 걷어내며 아래로 파들어가자 70cm 바로 아래서 태조 이성계 때 축조한 원래 광화문 곧 ‘1395년 광화문’ 기단부 층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1867년 광화문 문설주 자리 아래를 파보니 1395년 광화문 문설주가 1곳만 일부 파손되고 나머지 5곳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1395년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무수한 발길에 반들반들 닳은 흔적이 뚜렷했다. 발굴팀은 1867년 태조 때와 고종 때의 광화문 터가 70cm 높이의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일치한다고 추정했다.
중건한 1867년 광화문을 태조 때 터 위에 그대로 세웠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발굴팀 최인화 학예연구사는 “‘특이한 것만 기록한다’는 일반적 기술원칙을 준용하면 기획자인 대원군 이하응이나 총감독 김수연은 ‘중건하는 궁궐은 원래의 자리에 세운다’는 의식을 당연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궁릉관리과 조규현씨는 “통상 100년마다 지표가 1m 정도 상승하는데 중건하면서 기존 터를 활용하면 튼튼한 터를 얻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1800년 깃든 ‘타임캡슐’
타임캡슐은 1395년 기단부 아래에도 있었다. 잡돌과 사질토를 시루떡처럼 여섯켜로 쌓은 지층이 드러났고 또 그 아래에는 10cm 굵기의 80~140cm 말뚝을 30~50cm 간격으로 촘촘히 박은 뻘흙층이 드러났다. 1395년 광화문 기단은 뻘흙 자리를 메우고 세웠다는 얘기다. 본래 경복궁 자리는 북악산 양쪽 계곡에서 발원해 청계천과 합류하는 개천의 중간 지점 선상지로, 퇴적토가 쌓이고 습지처럼 축축한 땅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습지를 판축해 튼튼한 터로 활용하는 것은 2세기 때의 백제 몽촌토성, 부여외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전통기법이다. 뻘흙에 촘촘히 박은 나무기둥이 빨대가 되어 습기를 위쪽 시루떡 흙층으로 뽑아올리면 뻘흙층이 단단히 굳어 완벽한 기초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광화문 터는 1800년의 시간을 머금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베어온 금강송이 마르기 전에 타임캡슐을 어찌할 것인가 현명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이렇게 강릉과 양양에서 공수한 수령 80~250년 금강송 스물여섯개는 서울 경복궁에서 1년여 동안 건조 과정에 들어간다. 나무가 마르는 한편으로 다듬은 화강석재를 쌓아올려 무지개문을 만든다. 2009년께 마른 금강송이 기둥과 대들보가 되어 누각으로 우뚝 서면 광화문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터이다.
광화문 복원작업이 후반으로 치닫고 있다. 한켠에서는 이렇게 광화문에 새로운 역사를 더하고 있고, 한켠에선 시간을 거슬러 광화문에 쌓인 옛 역사의 켜를 들춰내고 있다. 복원사업을 계기로 발굴팀이 들여다본 광화문 터 땅속은 수백년 세월이 타임캡슐처럼 고스란히 담겨 세월의 역순으로 역사의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 1968년 광화문
박정희 대통령때 만든 이 구조물은 ‘광화문’이란 현판을 빼면 온통 돌과 콘크리트다. 철거를 위해 지하 10m까지 굴삭기를 내려 기초를 뽑아냈다. 현재 고궁박물관 옆 공터에 진열된 잔해를 보면 기둥과 천장은 물론 공포와 서까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당시 정부가 녹화를 위해 벌채를 금하면서 시범케이스로 목재를 전혀 쓰지 않은 공법을 채택했다. 1억5000만원의 공사비가 들었는데, ‘5대 궁궐 및 능원 보수’ 비용이 1100만원이었던 것과 견주면 들인 공이 비친다. ‘현지 목조 복원’(문화재관리국), ‘원래 자리 콘크리트 복원’(서울시)으로 의견이 갈렸으나 대통령 지시로 결판났다. 1968년 12월12일치 신문을 보면 3월15일 기공해 272일 동안 연인원 12만8천명이 투입돼 완성한 구조물은 길이 88.6m(양쪽 담장 포함), 높이 15.4m, 무게 7800t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968년 광화문’은 콘크리트 덩어리인 점 외에 터에 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 1927년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 없애려다 마지못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현재 민속박물관 정문자리)으로 옮겨놓은 원래의 광화문 건물은 한국전쟁(1951년) 중 폭격으로 소실됐다. 터 역시 일제가 싹뚝 깎아 평평하게 다듬고 전찻길로 내주어 잊혀졌다. 1968년 광화문은 안으로 들여세운 총독부 정문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총독부 건물을 승계한 중앙청 건물과 함께 옛 남산의 신궁자리를 향하게 된 것이다.
1867년 광화문
광화문 발굴팀의 추정은 옳았다. 원래 광화문, 곧 고종 4년인 1867년 만든 ‘1867년 광화문’은 ‘1968년 광화문’보다 1 정도 앞에 있었다고 본 발굴팀은 두 달 간의 발굴 끝에 지난 9월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 떨어진 곳의 도로 아래 70cm 지점에서 동서 34.8m, 남북 10.2m(총14.7m) 크기의 ‘1867년 광화문’ 기단부를 찾아냈다. 일제가 흩뜨리고 ‘1968년 광화문’을 지으면서 일부를 파먹었지만 홍예문 자리가 분명했으며 정문의 위엄을 위해 돋운 월대와 임금이 다니던 어도를 일부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1867년 광화문’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작업 가운데 일부. 그해 5월17일 공사를 시작해 9월18일 기둥을 세우고 10월11일 대들보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공사기간이 농번기와 겹치는 것은 서울이 도시화하면서 노임노동자가 형성됐음을 반영하고, 비교적 짧은 다섯 달만에 완공한 것은 민간 목재상의 출현, 조립식 가공기술 발달, 기술자의 직능분화 등의 결과라고 김동욱 교수(경기대)는 분석한다. 당시 총감독은 스물네살 김수연. 전문가 기술자인 그는 근정전 설계도 감독했다.
1395년 광화문
원위치를 확인해 1차 목표를 이룬 발굴팀은 욕심을 더 냈다. ‘1968년 광화문’이 파먹어 어차피 훼손된 ‘1867년 광화문’ 기단부 북쪽 면을 절개해 보자는 것. 흙을 걷어내며 아래로 파들어가자 70cm 바로 아래서 태조 이성계 때 축조한 원래 광화문 곧 ‘1395년 광화문’ 기단부 층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1867년 광화문 문설주 자리 아래를 파보니 1395년 광화문 문설주가 1곳만 일부 파손되고 나머지 5곳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1395년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무수한 발길에 반들반들 닳은 흔적이 뚜렷했다. 발굴팀은 1867년 태조 때와 고종 때의 광화문 터가 70cm 높이의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일치한다고 추정했다.
중건한 1867년 광화문을 태조 때 터 위에 그대로 세웠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발굴팀 최인화 학예연구사는 “‘특이한 것만 기록한다’는 일반적 기술원칙을 준용하면 기획자인 대원군 이하응이나 총감독 김수연은 ‘중건하는 궁궐은 원래의 자리에 세운다’는 의식을 당연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궁릉관리과 조규현씨는 “통상 100년마다 지표가 1m 정도 상승하는데 중건하면서 기존 터를 활용하면 튼튼한 터를 얻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1800년 깃든 ‘타임캡슐’
타임캡슐은 1395년 기단부 아래에도 있었다. 잡돌과 사질토를 시루떡처럼 여섯켜로 쌓은 지층이 드러났고 또 그 아래에는 10cm 굵기의 80~140cm 말뚝을 30~50cm 간격으로 촘촘히 박은 뻘흙층이 드러났다. 1395년 광화문 기단은 뻘흙 자리를 메우고 세웠다는 얘기다. 본래 경복궁 자리는 북악산 양쪽 계곡에서 발원해 청계천과 합류하는 개천의 중간 지점 선상지로, 퇴적토가 쌓이고 습지처럼 축축한 땅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습지를 판축해 튼튼한 터로 활용하는 것은 2세기 때의 백제 몽촌토성, 부여외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전통기법이다. 뻘흙에 촘촘히 박은 나무기둥이 빨대가 되어 습기를 위쪽 시루떡 흙층으로 뽑아올리면 뻘흙층이 단단히 굳어 완벽한 기초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광화문 터는 1800년의 시간을 머금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베어온 금강송이 마르기 전에 타임캡슐을 어찌할 것인가 현명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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