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만남, 상 제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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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는 풍속을 교화시켜 질서를 세우고, 동시에 효(孝) 사상을 세우는 수단으로 삼아 국가에서도 이의 시행을 적극 권장하였다.
공자는 3일 이전의 입관(入棺)은 살인행위와 같다고 했다. 옛날에는 장례 기간이 길었다. 임금은 5개월 장, 4품 이상의 대부는 3개월 장, 선비는 1개월 장, 일반 백성들도 지금 3일장보다 길었다. 때문에 입관은 3일, 만 2일이 지나야 했다. 그 까닭은 첫째, 소생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혹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니 적어도 삼일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장례를 치르자면 상복이나 관과 같은 여러 물품들이 필요한데, 이런 물품들을 준비하려면 적어도 3일 정도는 필요하다. 셋째, 미리 시신을 관 속에 넣어버리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자식들이 돌아가신 부모의 얼굴이라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돌아오는 시간을 감한 것이다.
유교식 상례 즉, 전통 상례의 핵심은 3년 상, 만 2년이다. 공자는, “자식이 태어난 지 3년이 된 뒤라야 비로소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다.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기 때문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도리”라고 했다.
상주가 지팡이를 짚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중에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2천여 년 전에 쓰여진 <예기>에 의하면, “효자가 부모를 잃으니 몸과 마음이 상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수가 없고, 근심과 괴로움으로 삼년상을 나니 몸은 병들고 메마르기 때문에 지팡이로 병든 몸을 부축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스스로 죄인으로 여겨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와 허리에는 죄인처럼 동아줄을 매고 지팡이를 짚고 3년을 난다.
한마디로 제사를 몇 대까지 지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반적으로 4대 봉사를 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6품 이상은 3대 봉사를, 7품 이하는 2대까지 봉사하고, 서민들은 부모제사만 지내토록 하였다. 이 같은 신분에 따른 차등봉사는 조선 말기에 양반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일반 서민들까지도 모두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다. 오히려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의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그럼 밤은 왜 올리는가. 대부분의 식물은 싹이 돋아나면 싹을 낸 최초의 씨앗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땅속에서 새싹을 틔운 최초의 씨 밤은 그 나무가 크게 자라도 땅속에서 썩지 않고 생밤인 채로 오래오래 남는다. 이런 밤의 묘한 생리 때문에, 밤은 자손과 조상을 연결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여겼다. 그래서 조상을 모시는 위패나 신주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 이유도 그 같은 밤의 상징성 때문이다. 감은 어떤가. 감씨를 심으면 반드시 감나무가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고욤나무가 나온다. 감씨를 심기만 해서는 고염이 열리지, 감은 열리지 않는다. 감나무를 만들려면 3~4년쯤 된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 붙여야 감이 열리기 시작한다.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여만 감이 열리듯이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된다는 것이다. 생재기를 째서 접붙일 때 아픔이 따르듯이 사람도 교육이란 아픔을 겪어야만 한 인격체로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제사상에 감을 놓는 것이다. ▶글·사진_ 정종수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
* 윗 글은 '문화재사랑(44호)' 정종수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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