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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네트워크를 중시하고, 4백 년 전부터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천했던 이황의 교육법, ‘지고 밑져라’는 희생과 손해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아량을 가르친 이함 등 위대한 인물들이 직접 실행했던 자녀 교육법을 소개한다. "자식 하나 키우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수백 년 지속해온 명문가들은 어떻게 자녀교육을 했기에 대대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유지해 올 수 있었을까. 영국 옥스퍼드대 자녀양육연구소는 어린이 1만7천명이 33세가 될 때까지의 성장과정을 추적 조사한 결과,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적극적인 아버지의 자녀들이 학교 성적도 좋고, 사회생활과 결혼생활도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와 별거 중인 아버지나 의붓아버지도 자녀가 책 읽는 것을 들어준다거나, 숙제하는 것을 도와주는 등의 방법을 통해 자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버지가 자녀양육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녀 관리를 어머니와 나눠서 한다든가, 자녀교육에 관심을 갖고, 함께 외출하는 일 등이라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이 연구결과에서 보듯이 자녀교육의 해법은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적극 나섰다. 특히 대대로 인재를 배출해온 명문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아버지가 자녀교육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 특히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서애 류성룡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일수록 자녀교육에도 헌신적이었다.
퇴계 이황의 자녀교육 열정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철저하고 열정적이었다. 퇴계는 300여명이 넘는 수제자를 길러내고 140번이나 넘게 공직의 부름을 받았던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자녀뿐만 아니라 친인척의 자제 등 무려 90명을 꼼꼼하게 챙겼다. “어제 너의 초사흗날의 편지를 보았다. 무사히 공부하고 있다니 위로가 된다. 지은 글이 등수에 들지 못한 것은 네가 탄식하고 안타까워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네가 평일에 놀고 게을렀던 결과이니, 이것 또한 무엇을 나무라겠는가? 다만 마땅히 가일층 공부에 힘써 진보할 것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며, 스스로 자신을 잃고 붓을 꺾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 글은 1551년 퇴계 이황이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술 한 병, 닭 한 마리, 생선 한 마리, 고기 한 덩어리를 보낸다.” 이는 퇴계가 맏형의 외손자(민응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요즘 극성 아빠를 능가할 정도로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를 읽을 수 있다. 대학자의 근엄한 모습만 남아있는 퇴계를 상상하면 쉽게 연결이 되지 않을 정도다. 퇴계는 이미 500년 전 가부장적 질서가 공고했던 시대에 섬세하게 보살피고 이끌어주는 이른바 ‘여성적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퇴계의 자녀교육의 열정은 그가 쓴 편지에서도 알 수 있다. 퇴계는 생전 아들 준에게 613여 통, 손자 안도에게 125통의 편지를 썼다. 아들과 손자, 후손에게 무려 1,300여 통의 편지를 썼다. 명문가의 자녀교육 가운데 한번쯤 시도해보아도 손해나지 않는 실천법이라면 바로 편지를 이용한 서신교육이다.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이용할 경우 가족 간의 대화의 장벽을 허무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유배지에서 18년 넘게 보낸 다산은 두 아들과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녀교육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1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자녀들에게 훈계한 내용은 먼저 문명세계(서울)를 떠나지 말 것, 두 번째는 독서에 힘쓸 것, 세 번째는 재물은 나눠줄 것, 네 번째는 근勤과 검儉 이 두 글자를 유산으로 삼을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자녀에게 내린 ‘한양 입성’이라는 특명이다.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자녀들에게 ‘서울 사수’라는 응급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자녀에게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선인들이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가장 강조한 게 있다면 다름 아닌 이웃에 대한 ‘배려’였다. 퇴계나 다산 등은 서신교육을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의 중요성을 들려주었다. ‘도움을 받고 싶다면 먼저 베풀어라’는 공동체의 덕목을 실천하도록 했다. 재령이씨(영해파) 운악 이함 가문에는 바로 배려의 정신을 실천한 가훈이 400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바로 ‘지고 밑져라’라는 가훈이다.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는‘미래를 위한 저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운악 이함 家는 이러한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명가로 도약할 수 있었고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학자를 배출했다. 바로 이함의 아들인 석계 이시명에서 시작해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는 당대 퇴계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혔다.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전 회장이 바로 운악 이함의 17대 종손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배려의 삶을 살도록 가르침을 받아왔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맞고 오면 칭찬을 해주었고 다른 아이를 때리고 오면 호되게 꾸중했다고 한다. 그는 요즘 손자들과 한 달에 한 번씩 ‘격대교육’을 실천하며 ‘지고 밑져라’는 가풍을 후세들에게 전하고 있다. 격대교육이란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가정교육이다.
우리나라는 동학혁명과 해방이후 좌우익 정치세력이 다투는 와중에 많은 고택이 불태워졌다. 동학군은 지역민들을 수탈한 양반가 저택을 급습해 인명을 해치고 집을 불태웠다. 경주최부잣집도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도에 의해 소실될 뻔 했다. 동학군이 양반집을 불에 태우고 돈을 강탈하던 중 최부잣집에도 들러 처마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양반과 부자치고 도둑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는 두목의 말에, 최부잣집 종손은 “우리 집이 그동안 어떻게 처신했는지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했다. 최부잣집의 내력을 확인한 동학도들은 순순히 물러갔다. 최 씨 집안은 12대에 걸쳐 이웃에 베풀어온 적선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경주최부잣집의 적선은 바로 미래를 위한 저축이었던 것이다.
아이를 ‘명품 인재’로 키우려면 부모가 먼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부모가 먼저 일어나고, 매일 독서를 하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부모의 행동은 미래 자녀의 행동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다. -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사진, 남정우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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