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지정 예고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 보물 제138호)”를 국보로 승격 지정 예고했다.
국보로 지정 예고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이다.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비의 비문은 신라가 낳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으로 그가 지은 다른 비문들인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 국보 제8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며, 일찍이 그 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됐다.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 - 쌍봉(雙峰) - 법랑(法朗) - 신행(愼行) - 준범(遵範) - 혜은(慧隱) - 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 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또한,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와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비문을 쓴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또한, 이 비문은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우선,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 기증)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있다.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기록과 건립의 후원자가 명확하게 밝혀진 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특히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와 같이 이 비는 1,085년 전에 세워진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 서예사, 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30일간 국보 지정예고된 후 문화재위원회의에서 최종 지정 여부가 심의,결정된다. 지정예고 기간 동안 관련 내용에 대한 의견이 접수되면 최종 지정 심의에 반영할 예정이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비로, 최치원의 4산비(四山碑) 중 하나이다.
지증대사(824∼882)는 17세에 부석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를 창시하였다.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자, 왕은 ‘지증’이란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은 ‘적조’라 하였다. 거북모양의 비받침은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은 거북 모양이며, 등 위에는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갖추고 있다. 비몸 위로 올려진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서로 다투듯 얽혀 있는 8마리 용이 장식되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데, 통일신라 후기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인 승려 혜강이 글씨를 썼다. 글씨는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꾸밈이 없고 우아하다.
이 비는 통일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세웠으며, 조각과 비문의 글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보물 제138호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를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했다. 국보 제315호로 지정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이다.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비의 비문은 신라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으로 그가 지은 다른 비문들인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 국보 제8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며, 일찍이 그 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됐다.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 - 쌍봉(雙峰) - 법랑(法朗) - 신행(愼行) - 준범(遵範) - 혜은(慧隱) - 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 하대의 불교사, 그중에서도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또한,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와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비문을 쓴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과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또한, 이 비문은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우선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 기증)하는 절차를 알려준다. 또한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건립의 후원자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으며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특히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와 같이 이 비는 1,085년 전에 세워진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 서예사, 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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