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
- 송도삼절과 최초의 양반 상인
# 화담(花潭) : 봄이 되면 바위틈 철쭉꽃이 만발하여 붉게 비추는 ‘꽃 못’
박연 폭포와 황진이, 서경덕을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이덕무가 한중일의 한시(漢詩)들을 모아 엮은 시화집(詩話集)인 『청비록(淸脾錄)』과 이긍익의 역사서인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경덕의 인품과 절행(節行)을 사모했던 황진이가 그를 추앙하는 마음으로 박연 폭포와 자신을 포함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는 말을 지었다.
서경덕은 세상의 명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담(花潭) 가 조그마한 초가집에 거처하며, 지극히 단순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았다. 또한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간혹 산수 유람을 떠났던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화담에서 보냈다. 화담은 서경덕의 삶의 전부였다고 과언이 아니다.
화담과 그 주변의 자연 풍경은 조선의 호사가(好事家)들이 반드시 유람해야 할 명승지였다. 특히 봄이 되어 바위틈에 핀 철쭉꽃이 만발하여 물에 붉게 비추는 ‘화담’은, ‘꽃 못’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서경덕이 화담 가에 집을 짓고 거처하면서 그 지명을 취해 자호로 삼기 시작한 이후, 화담은 퇴계 이황의 안동, 남명 조식의 합천, 율곡 이이의 파주처럼 서경덕 사상의 본향으로 재탄생했다.
당시 서경덕을 찾아온 문사(文士) 중 한 사람인 농암(聾巖) 이현보는 아예 ‘화담’이라는 시를 지어서, 서경덕의 드높은 학식과 덕망을 칭송하며 흠모의 정을 남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서경덕은 독특한 학풍과 여러 기행(奇行)으로 이황, 조식, 이이와는 또 다른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정통 성리학과는 다소 거리를 둔 유학 해석과 학문 방법으로 명성을 떨쳤다.
서경덕은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는 다른 기(氣)를 중시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학설을 주장하였다.
‘氣로 충만한 우주 공간에서 陽氣와 陰氣의 움직임을 주재(主宰)하는 것은 理이고, 理는 氣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은, 만물의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理, 변화하는 현 상태를 氣로 나누어서 보는 반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氣가 만물의 본체(本體)이고, 理는 氣와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기이원론’은 관념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관념인 理가 물질인 氣의 주재자(主宰者)라고 보기 때문에 물질보다 관념을 중시하는 ‘관념론 철학’이라고 한다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물질인 氣를 만물의 본체로 보고, 理·氣를 一體로 본다는 점에서 ‘유물론’ 철학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황과 이이는 일찍부터 “그는 유학의 정통이 아니다.”라거나, “서경덕의 학문은 (程子나 朱子가 아닌) 장횡거(張橫渠)에게서 나왔다.”라며 경계했다.
어쨌든 서경덕은 조선의 철학사에서 유물론적 성향을 지녔던 아주 희귀한 유학자였다.
서경덕은 학문하는 방법에서도 정통 성리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주자의 학문 방법은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독서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면 마침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독서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을 부정하고, 먼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직접 탐구한 후, 독서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으로 학문을 했다.
이러한 서경덕의 독특한 학문 방법은, 훗날 국가 차원에서 역대 임금의 업적 중 선정(善政) 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 사서인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자세하게 실릴 만큼, ‘서경덕식 공부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경덕이 화담 가에 집을 짓고 살게 된 이유는, 그의 부모님의 무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 화담 가에 거처한 서경덕의 삶에 대해 적었고,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은 가난에 초연했던 스승 서경덕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해주었다.
화담과 벗하며, 화담선생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던 서경덕은, 1546년 나이 58세에 죽음을 맞고, 화담 뒷산 언덕에 묻혔다. 무덤 앞에는 ‘생원서경덕지묘(生員徐敬德之墓 )’라고 쓴 조그만 비석이 세워졌을 뿐이다.
그의 죽음과 묘소 풍경은 25년 뒤인 1571년(선조 4) 9월 이곳을 찾은 대학자 우계(牛溪) 성혼의 증언으로 남아 전해온다.
또 다른 명사 오음(梧陰) 윤두수는 ‘화담(花潭)을 지나다가 감회가 있어서’라는 시 한 편을 남기기도 했다.
1609년(광해군 1) 홍이상이 지방의 선비들과 발의하여 화담의 옛터에 ‘화곡서원(花谷書院)’을 세우고, 서경덕과 그의 제자인 박순, 허엽, 민순 등을 배향했다.
서경덕이 거처한 후 ‘사상의 본향’ 중 하나로 변모했던 화담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사상과 시문학의 순례지’로 명성을 떨쳤다. 화담이라는 자연과 서경덕이라는 대학자가 결합되면서, 화담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넘어서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과 문학의 산실 가운데 하나로 거듭났다.
제왕이면서 동시에 한국사 최고의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정조까지 나서, 특별히 서경덕을 북송(北宋) 때의 대사상가인 소강절(邵康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극찬했다.
우리나라의 유현(儒賢) 가운데 두루 쓰일 재능을 갖춘 이는 정암(靜庵) 조광조와 율곡(栗谷) 이이뿐이다. 하서(河西) 김인후와 중봉(重峯) 조헌 같은 이는 절의(節義)가 도학(道學)보다 높고, 화담(花潭) 서경덕은 소강절(邵康節)과 비교해도 또한 불가하지 않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 「인물(人物)」
# 토정(土亭) : 물산(物産)이 모여드는 마포나루에 ‘흙집’을 짓고 살다
서경덕의 대표적인 제자들로서, 명신(名臣)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에 오른 사암(思庵) 박순, 사간원 대사간과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초당(草堂) 허엽, 우의정을 역임한 남봉(南峰) 정지연,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졸옹(拙翁) 홍성민 등이 있고, 학문과 시문 그리고 행적으로 이름을 남긴 이로는 행촌(杏村) 민순, 고청(孤靑) 서기, 곤재(困齋) 정개청, 연방(蓮坊) 이구, 동강(東岡) 남언경, 토정(土亭) 이지함 등이 있다.
정계와 학계에 두루 포진한 서경덕의 제자들은 하나의 학풍을 형성하며, ‘목릉성세(穆陵盛世, 목릉은 선조의 능으로, 수많은 인재가 등장해 조선 문화를 꽃피웠다하여, 후대에 선조의 시대를 목릉성세라 일컬음)’를 주도했다.
이에 서경덕의 제자와 후학들이 조선 유학사에서 최초의 학파라고 할 수 있는 ‘화담학파(花潭學派)’를 이루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정통 성리학을 세운 程子나 朱子보다는 장횡거와 소강절의 학문과 사상에 가까웠던 서경덕처럼, 특정 학문이나 학설에 구속당하지 않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는 물론이고,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 등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고, 경제(經濟)에 밝아 수많은 기행(奇行)을 남겨, 스승의 이름을 더욱 빛낸 제자로는 단연 토정 이지함을 꼽을 수 있다.
이지함은 당시 조선의 사대부 사회에서 금기하다시피 한 ‘상업(商業)’과 ‘해상 교역(海上交易)’을 국부(國富)와 안민(安民)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몸소 이를 실천에 옮긴 기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 충청도 보령의 해안 지역과 한양의 마포나루를 무대로 활동했다. 16세기 마포나루는 전국 각지의 온갖 물산(物産)이 모여들던 상업과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지함은 이곳 마포나루에 거처할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다져 정자를 지어 토정(土亭)이라고 이름 짓고, 이로 말미암아 ‘토정(土亭)’이라고 自號하였다. 자신의 뜻과 삶의 지향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반촌(班村)에 있지 않고, 천한 상인이나 온갖 장사꾼이 모여드는 나루터와 시장에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훗날 이지함을 ‘양반 상인의 모델’로 삼아 사회 개혁론을 주창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는, 사대부가 상업에 종사하거나 품팔이를 할 경우 당하게 되는 멸시와 수모를 적고 있다.
이지함과 동시대를 살았던 율곡은 그를 일컬어 사물에 비유하자면, “기이한 꽃[奇花], 이상한 풀[異草], 진기한 새(珍禽], 괴상한 돌[怪石]”이라고 했다.
특히 이지함은 마포나루의 ‘토정’을 근거지 삼아 몸소 상인이 되어 내외(內外)의 강해(江海)와 산천(山川)을 누비고 다니면서, 탁월한 수완으로 막대한 재물을 모았다가, 다시 가난한 백성이나 사정이 급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기행을 일삼았다.
이지함의 친조카로서 서경덕의 학통을 이은 북인(北人)의 영수이자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아계(鵝溪) 이산해는 자신의 숙부 이지함에 대한 글을 남겼다.
율곡 또한 이지함의 행적에 대한 글을 남겼다.
이지함의 기행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기록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지은 우리 역사 최초의 야담집(野談集)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이지함은) 손수 상인이 되어서 백성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몇 년 만에 수만 석에 이르는 곡식을 쌓았다. 그러나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준 다음 소매를 펄럭이며 떠나가 버렸다. 바다 가운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만 개나 되었다. 그것을 갈라 바가지를 만들어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1,000석에 이르렀다. 이 곡식을 한강변의 마포로 운송했다.
- 유몽인, 『어우야담』
이지함은 단순히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일정한 생산 능력을 갖추도록 가르친 다음에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때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맞도록 기술을 가르쳤고, 일종의 공장제 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진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해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이지함은 백성이 떠돌아다니며 헤진 옷을 걸친 채 음식을 구걸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겼다. 이에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큰 움막을 지어 거처하도록 하고, 수공업을 가르쳤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일정한 직업을 선택하도록 설득한 다음, 직접 얼굴을 맞대고 귀에다 대고 일일이 타일러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각자 그 의식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능력이 뒤떨어진 사람에게는 볏짚을 주어서 짚신을 삼도록 했다. 몸소 그 작업의 결과를 따져서 하루에 열 켤레를 만들어내면 짚신을 시장에 내다팔도록 했다. 하루의 작업으로 한 말의 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이익을 헤아려서 옷을 만들도록 했다. 이렇게 하자 두어 달 동안에 사람들의 의식이 모두 넉넉해졌다.
- 유몽인, 『어우야담』
이지함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추구했다. 그와 절친했던 율곡은 이지함이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고 구속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사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다.
율곡이 이지함의 자질이 아까워 성리학에 종사할 것을 권한 적이 있는데, 이지함은 “나는 욕망이 많아 성리학을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율곡이 “그대는 명예나 이익 그리고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욕망이 있어서 학문에 방해가 되겠소?”라고 했다.
이에 이지함은 “어찌 그것만이 욕망이겠는가, 마음이 가는 곳이 천하의 진리나 이치에 있지 않다면 모두 욕망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마음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여 규칙으로 단속할 수 없다. 이 또한 물욕(物慾)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심성 수양을 통해 이것을 통제하려고 했던 율곡과 같은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다르게, 이지함은 인간의 욕망을 인간 본연의 것으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양반 사대부일지라도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재물(財物)과 재용(財用)에 힘쓰고 몸소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독특한 철학의 소유자가 이지함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지함은 유학의 종조인 목은(牧隱) 이색의 6대손으로 양반 사대부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명문가의 출신이었지만,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내며, 성리학의 족쇄나 사회의 인습에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573년, 나이 57세 때 유일(遺逸, 초야에 숨어 있는 인재)로 천거되고, 다음해에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현감으로 나갔다. 이때 이지함은 포천현감으로 부임하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그의 독창적인 사회경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과 ‘삼대부고론(三大府庫論)’을 상세하게 밝히면서,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해서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과 광업을 적극 장려할 것을 건의했다.
‘본말상보론’은 본업(本業)인 농업과 말업(末業)인 상공업의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말업으로 본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개 덕(德)이라는 것은 근본이라고 할 수 있고, 재물(財物)이라는 것은 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과 말단은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말단을 제어하고 말단으로 근본을 보충한 다음에야 사람의 도리가 궁색하지 않게 됩니다. 재물을 생산하는 도리 역시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이 근본이라면 소금을 굽거나 철을 주조하는 일은 말단입니다. 그래서 근본인 농업으로 말단인 상공업을 제어하고 말업인 상공업으로 근본인 농업을 보충한 연후에야 모든 재용(財用)이 궁핍하지 않게 됩니다.
- 『토정유고(土亭遺稿)』, 「포천현에 부임할 때 올린 상소」
‘삼대부고론’은 상책(上策)을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이자 인심을 올바르게 하는 ‘도덕지부고(道德之府庫)’로, 중책(中策)을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대해를 이루듯이 어질고 현명한 인재들을 모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재지부고(人才之府庫)’로, 하책(下策)을 땅과 바다를 이용해 온갖 재물을 생산하는 ‘백용지부고(百用之府庫)’로 본 것이다.
앞의 두 가지(道德之府庫와 人才之府庫)는 현실적으로 열기 어렵고, 예전부터 있던 것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지만, ‘百用之府庫’는 이지함만의 독창적인 사회 경제 사상이었으며, 임금과 사대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용지부고’가 비록 하책이지만 성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권도(權道)라고 하였다.
땅과 바다는 백 가지 財用을 간직하고 있는 창고입니다. 이것은 형이하(形以下)적인 것이지만, 여기에 도움을 받지 않고서 능히 국가를 다스린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능숙하게 개발한다면 그 이로움과 혜택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질 것입니다. ··· 사사로이 경영하고, 이익을 좋아하며, 가득 찬 것을 탐하고, 베푸는 것에 인색함은 비록 소인(小人)들이 기뻐하는 바이고, 군자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 바이지만, 마땅히 취할 것을 취해 모든 백성을 구제하는 일 또한 성인(聖人)이 행해야 할 권도(權道)입니다.
- 『토정유고(土亭遺稿)』, 「포천현에 부임할 때 올린 상소」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외적의 침입에만 정신을 빼앗겨 바다를 감시하고 봉쇄할 줄만 알았지, 바다의 무궁무진한 재용(財用)을 전혀 활용할 줄 몰랐던 임금과 조정 그리고 사대부에게 경종을 울리는 상소문이었다.
바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견문, 그리고 그곳의 재용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줄 알았던 이지함의 능력은 1578년 아산현감으로 재임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관례에 의해 충청감영에 소금을 조달하는 일은 아산현에서 담당했다. 담당 아전이 소금을 사자고 했으나, 토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감영에 소금을 보내줄 기한이 거의 임박해서, 토정은 관아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동원하여 삽과 망태기 등을 많이 지니게 하고, 배를 띄워 남쪽을 향하여 갔다. ··· 토정이 배의 키를 잡았는데, 배를 움직이는 법도가 있었다. 배가 나는 듯이 나아가더니 한 곳에 이르렀다. 그곳은 흰 산이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산 아래 배를 대놓고, 산 밑을 파보니 온 산이 모두 소금이었다. 그리하여 그 소금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 신병주, 『이지함 평전』
이지함이 사망한 후 200여 년이 지난 정조 때, ‘양반 상인론’과 ‘해외통상론’을 통해 부국 전략을 추구했던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실천에 옮긴 역사적 모델로 제시한 유일한 인물이 다름 아닌 ‘이지함’이었다.
상업과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던 마포나루에 흙집을 짓고 거처하며, 스스로를 ‘토정(土亭)’이라고 자처하면서, 양반 사대부의 허울을 벗고 몸소 상인이 되어 나라의 부(富를) 늘리고,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는 데 힘썼던 이지함이야말로, 16세기에 이미 300년 이후 조선의 사대부가 어떻게 변신해야 개항과 근대화의 거센 물살 앞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 선각자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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