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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윤석열’과 수렁에 빠진 검찰

道雨 2021. 4. 2. 11:25

‘정치인 윤석열’과 수렁에 빠진 검찰

 

검찰총장이 퇴임 직후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사례는 외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옛 소련에서 독립한 신생국 에스토니아에서 최근 그런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라블리 페를링은 연말에 보수 야당인 ‘이사마’(Isamaa)에 가입할 뜻을 밝혔다. 오는 가을 치러지는 지방선거에서 수도 탈린 시장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페를링은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 검사로서는 퇴직 상태였으나, 유럽연합과의 사법협력사업 참여를 이유로 검찰청 소속으로 남아 있었다. 에스토니아 검찰청 윤리위원회는 페를링의 특정 정당 지지를 비윤리적 행위라고 판정했다. 후임 검찰총장인 판사 출신의 안드레스 파르마스도 “페를링의 행위는 현재 실질적으로 검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없는지와 무관하게 검찰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논란 속에 페를링은 지난 2월 공식 입당했다. 직전 검찰총장이 곧바로 정치에 뛰어드는 게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페를링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한다.

―검찰에 ‘정치적’이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옛 동료인 검사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나? 이건 민감한 이슈인데.

“전적으로 그렇다. 검찰은 독립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외관상으로도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원칙은 맞다. 하지만 내가 검찰의 평판을 훼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답변이다. 그가 언급한 원칙은 유럽연합 로마헌장에도 명시돼 있다. “검사는 독립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며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비춰보면 검사, 특히 검찰 내 영향력이 큰 고위 검사일수록 퇴직 이후 행보도 중요하다. 퇴임 뒤 정치에 몸담는다면, 현직 때 지휘한 수사·기소까지 ‘정치적 외관’을 쓰게 된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수사·기소권을 사적으로 활용했다는 의심이 두터워지는 것이다. 나아가 이후 검찰의 일거수일투족도 정치적 행위로 의심을 받게 된다. ‘공정한 법집행자’로서 검찰의 평판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검찰총장실은 이에 관한 이메일 질문에 “우리는 페를링의 행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에스토니아 검찰은 중립성과 독립성에 매우 높은 가치를 둔다. 여론이 그 필요성을 느낀다면 퇴직 검사의 정치활동을 일정 기간 금지하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2300명의 검사를 피라미드식 상명하복으로 지휘하며, 유례없이 집중된 수사·기소권을 휘두르는 우리나라 검찰총장의 ‘원칙 파괴’가 가져올 부정적 파급력은, 검사 수 170명의 소국 에스토니아와 비할 수 없다.

그런데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정치적 움직임에 대한 검찰 내부의 비판이 이제야, 그것도 단 한명의 목소리로 표출됐다는 것은 의아한 현상이다. 박철완 대구지검 안동지청장은 지난 31일 검찰 내부망에 “전직 총장의 정치활동은 법질서 수호를 위한 기관인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에 대한 국민적 염원과 모순돼 보인다”고 썼다. “두려운 감정이 올라온다”고도 했다. 다른 검사들은 지금의 상황에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건가.

 

이 문제는 원칙을 논하는 고담준론에 머물지 않는다. 곧 현실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통령선거 국면이 펼쳐지면 후보 진영 간 법적 다툼이 불거지고, 검찰의 사건 처리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곤 한다.

과거 대선에서도 검찰의 ‘활약’이 돋보였다. 2007년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 땅과 다스 실소유주 의혹 수사가 대표적이다. 당시 검찰은 대선을 2주일 앞두고 ‘다스가 이 후보의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의 결론이 엉터리였음은, 지난해 10월 다스가 이명박 전 대통령 소유라는 대법원 확정 판결로 공인됐고, 이 사건은 선거철 불공정 정치수사의 전범으로 남았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후보로 나서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검찰의 선거 관련 사건 처리가 공정하다는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민주적 선거 과정의 공정성마저 왜곡되지 않을까. 전직 검찰총장이 출마한 대선의 회오리를 겪은 시민들이 이후 그 어떤 정치적 사건에서 검찰의 결론을 곧이들을까.

검찰은 ‘윤석열의 유산’을 영원한 낙인으로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이는 공정과 정의라는 시대정신은 물론, 정치적 중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검찰제도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깊은 수렁이 될 것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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