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90일 시한의 ‘핵폭탄’을 던지다
이제훈의 1991~2021 _08
* 1992년 5월11~16일 한스 블릭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외부인으로는 처음으로 영변 핵시설을 방문해 핵사찰 작업의 일환으로 촬영한 자료 영상의 한 장면. 1925년 김소월이 읊조린 “약산 진달래꽃”의 영변과, 30년 넘게 ‘북핵’의 심장 구실을 해온 영변 핵시설 단지 사이엔 아득한 심연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더운 바람은 태풍을 몰고 온다고 했던가?
“냉전 종식 이후 가장 부드러운 바람이 분 때”라던 1992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의 영변 핵사찰 이후, 한반도는 ‘핵태풍’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국제원자력기구는 1992년 7월7~20일 2차 임시사찰 때 영변 핵시설에서 확보한 샘플을 분석해, 북이 플루토늄 재처리를 적어도 세 차례는 했음을 확인했다. 예상치 못한 북의 ‘플루토늄 90g’에 기겁한 미국이 깊이 개입해, 결국 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최정순은 “실험을 목적으로 한 미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셀리그 해리슨 일행한테 말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물론, 미국 중앙정보국(CIA)조차 북의 핵능력이 ‘플루토늄 추출’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지 않던 때다.
기겁을 한 해리슨이 ‘얼마나 추출했냐’고 묻자, 최정순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해리슨 일행이 평양을 떠나기 전에 다시 물으니, 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만 했다.
최정순은 원자력부 외사국장, 해리슨은 1972년 <워싱턴 포스트> 도쿄 지국장 자격으로 미국 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한 베테랑.
최정순과 해리슨의 ‘역사적 대화’는 1992년 5월3일 이뤄졌다. 북이 핵안전조치협정(Safeguard) 제62조에 따라 핵물질 재고 명세와 핵시설 설계 정보 등을 담은 ‘최초보고서’를 국제원자력기구에 내기 하루 전이다. 북은 이 최초보고서로, 1990년 영변 5㎿ 시험용 원자료(흑연감속로)에서 꺼낸 훼손된 사용후 연료봉에서 ‘시험용’으로 90g의 플루토늄을 한 차례 추출했다고 ‘자발적’으로 신고했다.
이 최초보고서에 명시된 “플루토늄 90g”은 미국·국제원자력기구와 북 사이에 충돌의 도화선이 됐다. 동북아 정세와 한반도 8천만 시민·인민의 일상을 30년째 뒤흔드는, 이른바 ‘북핵 문제’의 발화점이다.
해리슨은 북에서도 극소수만 공유하던 초특급 비밀인 플루토늄 추출 사실을 알게 된 최초의 외부인이다. 최정순은 왜 해리슨이 묻지도 않았는데 플루토늄 추출 사실을 ‘자발적으로’ 알렸을까? 2016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미국에서 북을 가장 잘 읽어낸다는 평가를 받던 해리슨의 판단은 이랬다.
“우리는 그가 문제를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 미국을 협상으로 끌어내려는 의도로 조심스럽게 준비된 발언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해리슨, <코리안 엔드게임>, 324~325쪽)
최정순의 폭탄 발언을 북 최고지도부의 ‘계산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실제 ‘최초보고서’ 제출 무렵 북의 행보가 주목할 만했다.
북은 핵안전조치협정이 정한 마감시한보다 한달 빠르게 최초보고서를 냈다. 더구나 최고인민회의에서 핵안전조치협정을 비준한 직후인 1992년 4월14일, 평북 영변지구의 핵시설 외관과 내부를 <조선중앙텔레비전>으로 공개했다. 이튿날엔 이 화면이 일본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게 했다고, 당시 한국 외무장관 이상옥은 회고록에 적었다(<전환기의 한국외교>, 526쪽).
1925년 김소월이 읊조린 “약산 진달래꽃”의 영변이, 머잖아 국제 비확산체제를 뿌리부터 뒤흔들 ‘핵시설단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북의 최초보고서 제출 일주일 뒤인 1992년 5월11~16일, 한스 블릭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 방북해 영변 핵시설을 사찰했다. 블릭스는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은 폭탄 제조용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미소한 분량인데다, 핵무기 개발까지는 장비나 기술 면에서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며 “북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보고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188쪽).
북은 블릭스한테 경수로를 제공하면 영변 원자로를 폐쇄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92년 6월30일 24차 베이징 북-미 참사관급 접촉에선 미국이 경수로 관련 기술·물질을 제공하면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시설)을 폐쇄할 생각이 있음을 내비쳤다(<전환기의 한국외교>, 542쪽).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기본 뼈대를 북은 이때 이미 협상안으로 내놓은 것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의 미국 수석대표인 로버트 갈루치는, 북이 블릭스의 영변 핵시설 방문을 허용한 1992년 5월을 “냉전 종식 이후 한반도에 가장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던 때”라고 회고했다(<북핵위기의 전말>, 15쪽).
그런데 1992년 봄 북의 이른 최초보고서 제출과 영변 핵시설 대외 공개는 전적으로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받겠다는 협조적 행보를 뜻하는 것일까? 최정순의 발언과 최초보고서의 ‘플루토늄 90g’은 북의 ‘다른 전략’을 가리킨다. 짐짓 핵능력의 한자락을 노출해 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미국을 자극해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는 ‘핵게임’의 시작이다.
북의 이런 핵게임을 나라 안팎의 언론은 흔히 ‘벼랑끝전술’이라 불렀고, 학자들은 강대국을 상대로 한 약소국의 “실존적 억지와 협상 전략”이라거나 “대미 강압외교” 따위로 개념화했다.
북이 언제 ‘핵게임’을 결정했는지 공개 문헌으론 확인되지 않는다. 전언은 있다. 1990~92년 남북고위급회담과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에 깊이 관여한 임동원은 회고록에, 19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중국에 다녀오자마자 소집한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회의에서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되, 이를 위해 핵문제를 대미수교를 위한 협상 카드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이른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는 “중국의 한 탁월한 북한문제 전문가”의 전언을 적어놨다.
해리슨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직후인 1991년 12월24일, 9년 만에 소집된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이뤄진 “불안한 타협”을 핵게임의 시발로 봤다. 해리슨은 “북한 관리들이나 외교관들과 대화를 하며 들은 내용을 종합”한 결과라며, 이 회의에서 강경파와 실용주의자 사이에 “만약 미국과의 협의가 실질적으로 진행된다면, 핵 프로그램은 유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의 협의가 반드시 이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해리슨은 이를 근거로 ‘김용순-캔터 회담’(1992년 1월22일)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게 ‘평양의 실용주의자들’한테 큰 타격을 줬고, 이들로서는 내부의 강경파에 맞서고 미국과 대화 재개를 위해서라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에 대한 북의 양보와 북-미 관계정상화 진전을 연계시키는 것’이 필요했다고 짚었다(<코리안 엔드게임>, 323쪽).
‘주한미군 주둔 용인’ 등의 협상안을 들고 뉴욕에 간 “김정일의 남자” 김용순 노동당 국제비서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등, 미국의 강경하고 냉담한 태도가 북의 위험천만한 핵게임을 작동시켰을 수 있다는 진단이다.
더운 바람은 태풍을 몰고 온다고 했던가?
“냉전 종식 이후 가장 부드러운 바람이 분 때”라던 1992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의 영변 핵사찰 이후, 한반도는 ‘핵태풍’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국제원자력기구는 1992년 7월7~20일 2차 임시사찰 때 영변 핵시설에서 확보한 샘플을 분석해, 북이 플루토늄 재처리를 적어도 세 차례(1989년, 1990년, 1991년)는 했음을 확인했다.
이 샘플은 국제원자력기구 연구소뿐 아니라 냉전기 소련의 핵시험을 분석한 미 공군 기술응용연구센터 산하 연구소가 맡았다. 예상치 못한 북의 ‘플루토늄 90g’에 기겁한 미국이 깊이 개입해, 결국 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이 발견한 이 “중대한 불일치”를 해명하라고 북에 요구했다. 그런데 북은 “중대한 불일치”가 왜 발생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최초보고서에 ‘플루토늄 90g 한 차례 추출’을 적을 때, 이런 상황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을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 전문가인 올리 헤이노넨은, 1991년 걸프전 이후 극미량의 방사성물질 시료에서 정확한 결과를 얻어낸 핵 분석 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당시 북은 몰랐을 것이라고 짚었다.
북의 애초 의도가 무엇이든 “중대한 불일치”의 발견은, 결과적으로 ‘대화 끝, 갈등 시작’의 신호탄이 됐다. 미국 정보기관은 이 플루토늄 추출량을 둘러싼 “중대한 불일치”(북-1회 90g vs 미-최소 3회 148g)를 북이 적어도 1~2개의 핵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플루토늄을 이미 생산한 ‘증거’로 간주했다.
이에 더해 국제원자력기구는 1992년 8월29일~9월12일 3차 임시사찰 때 북이 신고하지 않은 2개의 핵시설이 영변 핵단지에 있음을 발견하고 방문 허용을 북에 요구했다. 이 발견도 미국의 위성사진이 근거였다. 북은 두 시설은 군사시설이어서 사찰은 주권 침해라며 거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2년 8월24일 중국이 한국과 수교했고, 1992년 10월 한·미는 북이 “북침 핵전쟁연습”이라고 비난해온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준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북은 북·미 양자 직접협상으로 문제를 해소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은 ‘90일짜리 시한폭탄’을 세상에 던졌다.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이 그것이다.
1993년 3월12일 발표된 이 성명은 90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90일 뒤면 국제 비확산체제를 뿌리부터 뒤흔들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005178.html#csidxade1074e08a201fa160ef3901614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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