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해외학자들이 '최고' 외쳤다"... '전북 가야' 답사기

道雨 2021. 9. 9. 12:14

"해외학자들이 '최고' 외쳤다"... '전북 가야' 답사기

 

4일 봉화 왕국 전북 가야 유적답사... 곽장근 교수 "잠자고 있던 가야 깨워야”

 

                       ▲  고조선유적답사회원들이 전북 가야를 답사하고 있다.

 

 
지난 4일 고조선 유적답사회원 16명이 전북 가야를 답사했다. 전북 가야는 전북 남원시, 장수군 등 7개 시군에서 학계에 보고된 110여 가야 봉화에 근거를 두고 '전북 가야'라고 이름 지었다.

오전 10시, 남원시 아영면 소재지에 모인 회원들과 동행해 전북 가야 유적을 안내하는 가이드는 곽장근 교수. 군산대학교 역사철학부 역사전공 교수인 그는,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장, 전라북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과 호남고고학회, 후백제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전북 동부 산악지대에 지역적 기반을 두고 가야 소국으로까지 번창했던 운봉고원 기문국진안고원 반파국의 정체성, 후삼국 맹주 후백제의 탁월성, 전북 동부지역 제철유적의 역사성을 규명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곽장근 교수를 따라 유적지를 둘러보던 일행들 입에서는 한꺼번에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여태껏 경남에 산재한 가야 봉분만 생각했지, 전북에 수많은 봉분과 유물들이 숨어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행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학창 시절 삼국사기 중심의 역사만 배웠고, 경남에 위치한 가야만 배웠기 때문이다. 전북 가야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82년 광주‧대구간 고속도로 공사를 하기 전 학자들이 발굴조사를 하면서부터다.

백제 고분인 줄 알고 남원 월산리 고분을 조사하던 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가야 토기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발견된 장경호, 발형대부호와 철제유물인 투구, 목가리개, 갑옷은 가야 양식이었다. 

 

▲  남원 월산리 M5호분 출토 복발형 투구와 경갑, 찰갑으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배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00년 전 활동했던 전북 가야가 빛을 보지 못한 이유가 있다. 호남정맥이 백제와의 교류를 차단했고, 백두대간이 신라와의 교류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문헌자료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4세기 말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통일된 정치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연맹체로 존재하다가 백제와 신라에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자연미 그대로인 전북 가야" 

우연한 기회에 잠을 깬 전북 가야가 빛 보기 시작한 것은,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되면서부터다. 배낭을 메고 40년 동안 유적과 유물을 찾아 돌아다니던 곽장근 교수는 한국과 일본 중국 학자들을 안내할 기회가 있었다.

 

                      ▲  고조선유적답사단에게 전북 가야에 대해 설명하는 곽장근 교수 모습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기초조사차 전북 가야를 답사했던 외국학자들이 최고라고 했어요. 영남에 위치한 가야가 화장한 거라 비유한다면, 전북 가야는 자연미 그대로이거든요. 보시다시피 전북 가야는 산등성이에 그대로 있어, 때론 산인지 봉분인지 구분이 잘 안되거든요."

예로부터 철은 국력의 상징이다. '전북 가야'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철 제련기술이다. 전북 동부지역에서 발견된 제철 유적지는 250여 개소에 달하며, 남원 옥계동 제철 유적지에는 슬래그가 널려있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운봉고원의 철기문화와 유학승의 신앙심이 응축되어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운봉고원과 진안고원에서는 가야와 백제, 신라가 국운을 걸고 20년 동안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였다. 철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대규모 철산 개발과 거미줄처럼 구축된 교역망을 통한 철의 생산과 유통은 기문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운봉고원 일대 180여 기의 말무덤과 가야 중대형 고총, 금동신발, 수대경, 계수호, 철제초두 등이 기문국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답사단으로 왔던 회원 한 분이 "기문국은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셈이라는 얘기가 있다"며 설명을 요구하자, 곽 교수가 말했다.
      

"한국과 일본학자가 참여한 가운데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토론이 있었어요. '설'은 학자의 주장일 뿐이잖아요. 당시 학술회의에 참석했던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은 실체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지요. 설이 사실이라면 증거를 내놔야 합니다. 증거가 없으면 폐기해야 하고, 역사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곽 교수를 따라 장수 동촌리 고분군을 답사하던 일행은 그냥 산봉우리를 등산하는 줄 알았다. 둥그런 산등성이에 나무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등성이에서 간벌하던 인부들을 만나 설명을 듣고서야 고분인 줄 알았다. 고분 인근에 나열해놓은 돌덩이들은 강에서 주워온 돌이 분명했다. 강물에 씻겨 닳아진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  장수군 동촌리 고분을 답사하던 일행은 고분에 가득한 나무를 간벌하던 인부들을 만나 경위를 들었다. 장수군에서는 유적에 관심있는 분들을 간벌을 하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돌들은 고분에서 나온 것들로 강에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된다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장수군은 반파국의 정치적 중심지임이 분명하다. 240여 기의 가야 중대형 고총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반파국 고총은 보존상태가 심각한 상황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도꾸라세이지가 도굴과 농경지 개간으로, 40여 기의 고총 중 2기만 봉토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장수가 반파국 중심지인 이유? 봉화로의 최종 종착지

봉화란 횃불로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중앙에 알리던 비상통신 수단이다.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5개 봉수로가 목멱산(남산)에 모여 왕에게 전달되는 방식처럼. 가야 고총 못지않게 가야 소국의 존재 여부를 보여주는 증거가, 513년부터 3년 동안 백제와 전쟁을 치르면서 운영했던 봉화 제도이다.
    

                        ▲  장수군 서면 오성리 봉화산에서 발굴한 봉화모습

 

   
충남 금산군과 전북 무주군, 진안군, 완주군, 임실군, 순창군, 남원시 운봉읍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화로는 모두 장수군 장계면에서 만난다. 장수군 삼봉리 고분군 답사를 마친 곽장근 교수가 결론을 내렸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제철유적지 답사를 하지 못했지만, 다음 번에는 제철유적지 뿐만 아니라 성곽도 돌아볼 예정입니다. 반파국이 존재했다는 세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야 봉화대가 발견되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가야 봉화로의 최종 종착지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최종 종착지에 가야 고총이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  장수군 삼봉리 고분군을 답사하는 일행들.
 

▲  장수군 삼봉리 고분에서는 환두대도가 부장된 흔적과 꺾쇠가 출토되어 가야 고총의 피장자가 반파국의 수장층으로 밝혀졌다. 삼봉리 고분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도꾸라세이지의 극심한 도굴로 40여기 고총 중 2기만 봉토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북 동부지역에 존재하는 가야 고총은 420개나 된다. 이들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기 위한 지자체의 경제적 지원이 부족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오문수(oms114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