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건강보험 정책은 보장성 축소한 첫 사례다?
보건의료단체연합 "건강보험 도입 이래 보장성 축소는 현 정부가 최초"
복지부 대책, '재정적 지속가능성'에 방점…MRI·초음파 검사에 건보 적용기준 조정
건보재정 적자 돌아선 2001년 보장 줄인 적 있어…이후론 줄곧 '보장 확대' 기조
정부가 지난 8일 내놓은 국민건강보험 정책이 이례적으로 보장성을 축소하는 대책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진보 성향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6개 단체가 모인 보건의료단체연합의 정형준 정책위원장은, 지난 12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역대 어떤 정부도 이런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보장성을 축소하고 국민 부담을 늘리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이에 앞서 8일 낸 성명에서도 이번 정책을 두고 "전국민 건강보험을 도입한 1988년 이후 보장성 축소안을 제시한 것은 윤석열 정부가 최초"라고 밝혔다.
이 단체 지적처럼 이번 건강보험 정책은 보장성이 후퇴한 방안이고, 나아가 이렇게 건강보험의 보장을 줄인 사례는 과거엔 없었을까?
* '건강보험 지속 가능성 제고 방안' 규탄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윤석열 정부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 제고 방안'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2.12.14 mjkang@yna.co.kr
복지부, 건강보험 지속가능성으로 무게중심 옮겨
보건복지부가 8일 공개한 대책안의 제목과 내용을 보면, 이번 대책이 최소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방점을 찍진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제목부터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및 필수의료 지원 대책(안)'이다.
복지부는 이 자료에서 "광범위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은 의료접근성을 제고하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과잉진료 등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야기"했다고 지난 정책을 평가했다.
그러면서 향후 정책은 "건강보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후 이런 기조를 더 명확히 했다.
윤 대통령은 13일 국무회의에서 "지난 5년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20조원을 넘게 쏟아부었지만, 정부가 의료 남용과 건강보험 무임승차를 방치하면서 대다수 국민에게 그 부담이 전가됐다"며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인기영합적 포퓰리즘 정책은 재정을 파탄시켜 건강보험 제도의 근간을 해치고 결국 국민에게 커다란 희생을 강요하게 돼 있다"고 비판했다.
복지부는 보장성 강화 계획을 재점검하는 차원에서,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급여 항목 중 남용이 의심되는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초음파 검사에 대해 급여기준을 조정하기로 했다.
특히 급여화(건강보험 적용)하기로 예정돼 있던 근골격계 MRI·초음파는, 의료적 필요성이 입증되는 항목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급여화를 추진할 방침이다.
또 본인부담상한제의 경우 상급종합병원에서 외래로 진료받는 경증질환 105개는 본인부담상한제 적용에서 제외하고, 소득 상위 30%에 대해선 상한액을 올리기로 했다.
본인부담상한제는 비급여(건강보험 비적용)·선택진료비 등을 제외한 본인부담금 총액이 소득 수준에 따른 본인부담상한액(2022년 기준 81만∼580만원)을 넘는 경우 초과액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내주는 제도다.
* 의료복지 문재인 케어 (PG) [정연주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
이는 이른바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이전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으로 인해 건강보험 재정에 적신호가 커졌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재인 케어는 MRI, 초음파 등, 그동안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던 비급여 항목을 대대적으로 급여화하는 정책이다.
김우현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에 대한 소고'(2021년)란 보고서에 따르면, 뇌 MRI 검사의 급여 횟수는 제도 변화 전후로 53.9배, 뇌혈관 MRI는 101.1배로 각각 늘어나, 실제로 급여화된 항목 중 일부에서 의료 이용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 남용으로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당초 의학적으로 필요했으나 그동안 비급여로 묶인 탓에 이용이 저조했다가, 건강보험이 적용되면서 이용이 급증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남용 의심 사례에도 불구하고, 정책 기조를 '보장성 강화'에서 '지속가능성 제고'로 선회할 만큼 건강보험 재정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선뜻 수긍하기는 어렵다.
문재인 케어 4주년을 맞은 지난해 8월 복지부는 "건강보험 재정은 계획 당시 예상한 범위 내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2020년 말 기준 건강보험 재정준비금(누적수지)이 17조4천억원으로, 2019년 계획 수립 때 예상한 14조7천억원보다 2조7천억원 많은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렇게 보면 불과 1년 사이 건보 재정 건전성에 대한 정부의 판단이 달라진 셈이다.
[표] 건강보험 재정 현황
(단위: 조원)
실제 건강보험의 재정 수지는 최근 외려 좋아졌다.
2018∼2020년 3년 연속 당기 적자를 기록했다가,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다. 물론 작년 흑자 전환엔 코로나19로 의료 이용이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흑자 전환에 힘입어 재정준비금은 20조2천억으로 불었다.
이는 누적수지가 마이너스로 돌아섰던 때, 즉 재정준비금이 바닥나 보험급여를 주려고 차입에 의존해야 했던 2001∼2003년과 비교하면 양호한 상황이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를 감안할 때, 건강보험 재정의 중장기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겠지만, 새 정부 들어 건강보험 정책의 첫 일성이 지속가능성 제고가 될 만큼 재정 형편이 최근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 남용 방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축소된 측면도 없지 않다.
복지부는 이에 대해 "보장성을 합리화하겠다는 것으로, 국민 혜택을 줄이는 취지가 아니다"란 입장이다.
과잉진료, 보장성 강화 때문이다?…"행위별 수가제 탓" 지적도
보장성 강화가 과잉진료를 유발했다는 정부의 진단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다.
보장성 강화로 일부 항목의 의료 이용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과잉진료의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보건의료단체연합 관계자는 "한국에서 과잉진료는 구조적으로 장려된다"며 "(건강보험의 진료비 지불 방식이) 행위별 수가제이고, (병원의) 95%가 민간병원이어서, 건강보험이 보장되는 영역도 행위량을 늘리려고 하고, 비급여도 최대한 많이 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의료수가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 서비스에 대한 가격으로, 정부가 병·의원, 약국 등과 협의해 정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료·검사·수술 등 의료인의 진료행위 하나하나에 가격을 책정해 지급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런 행위별 수가제는 환자에게 충분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병원이 의료행위를 많이 할수록 이득이 늘어나는 구조라는 단점도 있다.
이와 달리 포괄수가제는 특정 질병별로 의료수가를 정해둔 뒤, 어떤 의료 서비스나 약품을 제공했느냐와 상관없이 일정액의 진료비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행위별 수가제에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강화될수록 비급여 항목 진료도 늘게 된다. 급여 항목은 수가가 정해져 있어 병원이 원하는 만큼 수익을 낼 수 없다 보니, 의료수가를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는 비급여 진료를 늘려 수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행위별 수가제가 과잉진료를 유발한다는 문제의식은 폭넓게 퍼져 있다.
권순만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건강보험 보장성의 정책과제'라는 글에서, 비급여 항목이 급증하는 원인 중 하나로 "고가의 서비스를 더 많이 제공할수록 공급자(병원)의 수익이 증가하는 행위별 수가제의 왜곡된 구조"를 꼽았다.
감사원 역시 7월 '건강보험 재정관리 실태' 감사 보고서에서, 행위별 수가제가 "환자에게 많은 진료를 제공하면 할수록 의료기관의 수입이 늘어나게 되는 구조이므로, 불필요한 의료 서비스가 과다 제공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이 당시 재정·보건정책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도, 응답자의 92.4%가 행위별 수가제에 대해 '과잉진료 등 단점·우려가 다소 있다'(39.1%)라거나, '과잉진료 유발에 따른 지출 부담 등 단점이 크다'(53.3%)는 의견을 냈다.
정부도 이런 비판을 수용해 백내장·맹장 수술·제왕절개 분만 등 일부 질병에 대해 포괄수가제를 도입했으나, 수익 악화를 우려하는 의료계의 반발로 확대 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대중 정부 때도 건보 누적수지 적자에 보장성 축소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축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일까.
연합뉴스가 현재와 같은 국민건강보험이 도입된 2000년 7월 이후 복지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보도자료 중, 건강보험과 관련한 종합대책 성격의 자료를 추려 분석한 결과, 대부분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단,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건강보험 재정안정 대책 발표'란 제목으로 나온 자료는, 이번 윤석열 정부의 대책과 같이 급여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예컨대 치석 제거(스케일링)는 치주질환 수술의 전(前) 단계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보험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는 당시 건강보험 누적수지의 적자가 예상되는, 말 그대로 '비상상황'에서 나온 조치였다.
건강보험 누적수지는 실제 2001년 1조8천억원 적자, 2002년 2조6천억원 적자, 2003년 1조5천억원 적자를 기록한 뒤, 2004년에 가서야 1천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건강보험 재정이 안정을 되찾자, 정부는 본격적으로 건강보험 강화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은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2017년 8월)과 제1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2019년 4월)까지 꾸준히 이어졌으나, 이번에는 다소 방향을 틀게 됐다.
다만 윤석열 정부도 내년에 '제2차 건강보험 종합계획(2024∼2028년)'을 내놓을 예정이어서, 어떤 대책이 담길지 주목된다.
[표] 보건복지부 건강보험 관련 대책 보도자료 목록
(※출처=보건복지부 홈페이지)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pseudoj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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