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 상황
진주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10만 명이나 되는 왜적이 진주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명군도 조선군도 도와주지 않았다.
홀로 싸워야 하는 호남 의병들. 어두운 그림자가 진주성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러면 1593년 6월 21일부터 6월 29일까지 9일간의 싸움을 살펴보자.
6월 21일
왜군 선봉대 기병 200명이 척후활동을 시작했다. 척후병은 마현 봉우리 위에서 활동하더니, 조금 뒤에 10여만 명의 왜군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그런데 왜군은 탄알 한 발 쏘지 않고 위세를 보인 뒤에 물러갔다.
6월 22일
왜군의 첫 공격이 시작됐다. 아침 10시부터 왜군 10만 명이 일제히 밀려왔다. 개경원 산 중턱에 진을 친 가토가 이끄는 1진과 향교 앞길에 있던 고니시의 2진이 동시에 쳐들어왔다. 첫 교전은 아군의 승리였다. 아군은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왜군들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돼서야 물러갔다.
6월23일
이 날도 왜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낮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쳤다.
이 날 고성 의병장 최강과 이달의 군사 300여명이 진주를 구원하려고 달려왔다가 적의 세력에 놀라서 다시 고성으로 돌아갔다.
6월 24일
왜적의 증원군 5∼6천 명이 와서 마현에 진을 치고 또 5∼600명이 더 와서 동편에 진을 치고 아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성 안팎에 죽은 자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6월 25일
왜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순성장 황진도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직접 옷과 전립을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남녀들도 힘을 다해 축조를 도와 하룻밤 사이에 완성됐다.
이에 현자총통을 쏘아서 적의 소굴을 부쉈으나 적이 곧 다시 만들었다. 이 날도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접전해 4번 다 물리쳤다.
6월 26일
왜군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군사들이 큰 나무 궤짝 위에 짐승 가죽을 입힌 뒤 그것을 방패삼아 성벽 밑으로 육박해 성을 헐려고 했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 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 내려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을 만든 뒤 성안으로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 불화살이 성안의 초가에 떨어져 화염이 자욱했다. 황진도 마주 보고 나무를 세우고 판자 집을 만든 뒤 대포를 쏘아 왜군의 판옥을 무너뜨렸다. 성안 사람들이 물을 길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이 날 거제현령 김준민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다가 죽었다. 아군 장수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였다.
6월 27일
전투가 1주일 되는 날이었다.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흙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 대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그 위에서 총탄을 발사했다. 성안의 군사 300여명이 전사했다. 또 왜군은 귀갑차를 이용해 성 밑으로 접근해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차를 태우자 왜군이 퇴각했다.
왜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김천일은 장윤을 임시로 목사에 임명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왜군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글은 ‘온 백성이 성안에서 일시에 모조리 죽음 당하는 것은 처참한 일이 아닌가. 항복하면 생명은 보장해 주마’라는 내용이었다. 김천일은 곧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 30만명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해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답장을 보고 왜군은 옷을 걷고 볼기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명군은 이미 다 물러갔다’ 했다.
6월 28일
1주일이 지나자 왜군은 더욱 공세 수위를 높였다. 왜적이 북문을 침범해 성문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곳은 진주목사 서예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성을 뚫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성이 무너지려 했다. 적이 바야흐로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김해부사 이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해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다시 물리쳤다.
충청병사 황진이 순찰차 이곳에 이르렀다가 성 아래를 굽어보며,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고 말했다. 이 때 왜군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쐈는데,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황진은 용맹과 지략이 으뜸이어서 그를 믿고 의지했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사기가 저하됐다. 이 날 황진의 죽음을 조문하는 듯 장맛비가 음산하게 내렸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남원 정충사
* 황진 장군 묘소
출처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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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운 위키백과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2차 진주성 전투
1. 개요
일본군의 경우 참전 장수 명단을 보면 클라스가 장난이 아니다.[5] 동원한 병력 역시 9만명이 넘는 숫자인데 이는 당시 강화협상에 따라 부산포로 퇴각한 일본이 점령지를 최소한 유지만 할 수 있는 수준의 병력만 남기고 지상의 모든 가용 전력을 싸그리 모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전설이 된 불사신을 죽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셈이었다.[6] 조선의 경우 승산이 없어보이는 상황에 상당수의 무장들이 구원을 포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와 의병장들이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사지에서 모든 걸 걸었으며 그야말로 단두대 혈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전투에 대해 일본군을 따라와 조선에 머물던 한 왜승(倭僧)은 "조선의 용감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었다."는 글을 남겼을 만큼 일본으로서도 간담이 서늘했던 전투였다.
2.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배경
2.1. 일본군의 보복전 준비
평양의 패전으로 인해 북상했던 일본군이 서울로 총퇴각한 결과 안그래도 식량이 부족하던 서울의 일본군은 심각한 식량난에 빠졌으며, 각지의 성들 사이의 교통로가 자주 끊어지면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혹독한 추위까지 이르러,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완전히 조선 - 명 연합군 측으로 넘어간다.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결국 3월달에 부산포로 총퇴각한다. 임란 개전 후 1년만이었다.
히데요시는 부산포로 퇴각한 이후 4월부터 경상우도 및 전라도 공략을 명령하면서[7] 동시에 화전 양면책을 구사해 6월 초엽부터 명나라 측에 화친 협상을 시도한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전라도 공격, 그에 앞서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이라 본 듯 하다.
이렇게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이 결정되었다.
2.2. 지원 의지가 없었던 명군
이런 과정 속에서 일본군의 위와 같은 분위기가 강화 협상을 맡은 심유경에게 파악되게 된다. 심유경은 이에 공격 중지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어쩔수 없다는 답변을 했으며,[13] 어떻게 해서든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피하니 차라리 진주성을 빈 성으로 만들면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한다.
『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 해석 -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 선조 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 기사
이에 명군은 일본군의 의도가 명백하니 조선측에 진주를 방어하지 말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명군이 진주성 구원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6월 말이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여송은 경상도, 전라도 일대 명군에게 진주성 구원을 지시했다고 하고, 선조 실록에서도 7월 10일이 돼서야 양도의 병력을 진주성 구원을 위해 파견하고 또한 서울에 주둔중인 명의 주력군 중 18,000명을 끌고 가겠다는 이여송의 약속이 나온다. 그러나 대구, 남원, 상주에 있던 명군을 다 합친다 해도 14,000명에 불과할 뿐이었고, 이미 전쟁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명군 장수들은 진주성 구원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이여송 또한 차일피일 출발을 미루기만 했다.
2.3. 수성과 포기 사이에서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진주의 일이 매우 위급하다. 지금의 적세를 보건대 실로 심상치가 않다. 적들이 만약 진주 근방에 있는 사방의 고을을 다 함락하고서 진영(陣營)을 벌여 놓고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켜 내외의 교통을 끊고 지구전(持久戰)으로 오랜 시일을 두고 괴롭힌다면 아무리 성을 잘 지키더라도 종당에는 스스로 지쳐 죽고 말 것이니, 오늘날 진주를 구원하는 일은 일각이 급하다. 경략에게 품첩(稟帖)할 것을 이미 전교하였거니와, 전에 이미 구원을 청하기는 하였지만 제독에게는 계속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함께 품첩을 보내도록 하라.”- 선조 실록 1593년 7월 13일자
당시 분위기는 '여긴 도저히 못 막을 곳.'이었다. 실록 및 다른 기록을 보면 '여기는 지킬 수 없으니 후퇴해서 병력이라도 보존해야 한다'와 '설령 못 지킨다고 해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가 충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때 막 도원수가 된 권율은 진주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주장(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3번째 기사)했다.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곽재우도 이런 병력차는 도저히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자결을 하면 했지 저런데서 개죽음은 못하겠다". 면서 진주성 구원을 포기한다.
“오직 임기 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3리(里)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하니,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그를 꾸짖기를,“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3번째 기사
반면에 일부 장수와 군인, 소수의 의병들은 기어이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사실 2차 진주성 전투는 딱히 기습도 아니었고 양측 모두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진주성의 군인들은 충분히 피신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진주성 방위군 측은 명군과 다른 조선군 장수들의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고, 무슨 이유든 진주가 함락되면 전라도가 위험하므로 계속 진주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병장 김천일은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이다."라며 진주를 지킴으로서 호남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곧장 진주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진주성에 들어간 직후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이달(6월)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 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하였으나 3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保障)인데 순찰사 이하가 방어를 철수하여 산음(山陰)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10일자 기사
더군다나 당시 1차 전투의 승전으로 인해 영남 지역의 백성들 및 인근의 백성들 사이에 '일본군으로부터 도망치기는 어렵고 진주성은 견고해서 함락 안된다' 라는 소문이 번져 수만의 백성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느린 피난 속도는 일본군의 진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피난처로 진주성을 떠올리는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전라도를 지키는 길목이라는 명분과 함께 수성의 동기가 하나 더 늘었을 수도 있다. 일본군을 피해서 온 백성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군의 지휘관들이 거의 패배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서도 밀려오는 피난민과 성내의 백성들에게 피난 권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글이 넷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말도 안되는 것이, 민간인들의 피난 속도는 정예화 된 10만의 병력으로부터[14]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당시 소수의 조선군 병력은 옹성 없이는 그런 상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권고한다고 해서 진주성으로 몰려드는 주민들을 통제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15] 만약에 진주성에서 전투가 없었더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압박을 받던 일본군은 어떻게든 전공을 만들기 위해 인근의 조선 백성들을 공격하여 학살했을 것이고[16], 인근 백성들 또한 일본군 병력이 집결하면서 흉흉한 기운을 풍겨대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곽재우가 황진에게 제발 진주성을 포기하라고 말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진주성에서 전사해서 곽재우가 슬퍼했다는 내용도 있다. 황진의 경우 당시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던 명장 중 한명이었으며[17], 충청도 절도사의 직책까지 오른 장수였다. 조정에서도 그만한 장재를 이런 데에 소모시킬 생각은 없었고, 그가 참가한다 했을 때 '아니,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담당 구역도 아닌 곳에 왜 목숨걸고 감? 님은 거기서 죽기 아까운 인재임. 가지 마셈.' 라며 말리는 분위기였지만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참여했다.[18]
당초에 황진이 진주(晉州)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가 황진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城)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19]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열장부(烈丈夫)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즉,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의병장과 관군 장수들은 (어차피 거기 있었어야 하는) 서예원 빼고 다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온 것이다. 임진왜란 사상 최대의 혈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3. 양측 병력 구성 및 진주성의 지리
그러나 4월에 일본군이 부산포 일대로 총퇴각한 직후 히데요시의 진주성 공략군 편성은 구체화되었으며, 5월 20일 구체적인 공략군을 편성, 공격 명령을 내린다.
이때에 일본군 구성은 다음과 같다.[20] 다른 임진왜란 전투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 같은 일본 기준으로 볼 때 애송이 다이묘들이 주력이었으나 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을 무조건 함락시키라는 특명을 내렸기에 다테 마사무네 같은 거물 다이묘[21]도 참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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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25,62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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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26,18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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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18,822명[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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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 도모스케, 야마다 도죠 1,82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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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 사다미치 63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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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노리자네 36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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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쇼 요시하루 31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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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츠야나기 가유 40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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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나카 시게토시[24] 2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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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리 가즈타다 69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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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모리토모 34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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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사다미치 29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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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나가히로 91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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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키야 츠네후사 20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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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시게카타 45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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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173명 - 우키타의 부하인 오카모토 콘노죠도 종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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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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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히데모토 13,6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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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8,74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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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카와 타카카게 6,59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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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카와 히데카네 4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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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도고 1,13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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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도소 28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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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쿠시 히로카도 32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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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92,972명
그야말로 10만 대군. 사실상 일본군과 주요 무장 전체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성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수군도 동원되어 수로를 통한 조선 수군의 배후 공격과 진주성 구원을 견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대, 2대, 3대와 4대, 5대 연합 부대는 추첨에 따라 한 부대는 주변에서 동원될 지 모르는 구원군을 방어하고 나머지 세부대는 성을 공략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25]
이에 대응한 조선군은 최소 3,000명, 최대 15,000명까지 추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 5개월 전 진주에 머물던 김성일 휘하 병력 수는 15,000명에 달하나 이 병력 전체가 진주성 방위군이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26] 이것을 진주성 방위군 총수로 계산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 진주성에 입성해 전투를 치른 조선군의 병력 수 추정은 선조 실록 7월 16일 기사와 7월 22일 경상우도 감찰사 김늑의 진주성 전투 파악 전사자 수를 비교해 확인할 수 있으나, 김늑 자신이 말했다시피 일본군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전사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전투 이후 진주성에서 생존하여 돌아온 조선 측 장수는 한명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입성한 관군 및 의병 총 숫자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조선군 병력 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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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 김천일 -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 입성, 전사자 파악 수 60명. 의병을 총괄했으며, 동시에 사실상 성의 총사령관으로 방어전을 지휘했고, 그의 휘하로 아들 김상건, 공조 좌랑 양산수, 양산숙, 군관 조인호, 의병장 유희진, 서정후, 윤성립, 최희급, 박운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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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우병사 최경회[27] -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했는데, 전사자는 420명으로 입성시보다 병력이 많다. 최경회가 임란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한명이며, 의병의 관군화 과정에서 경상 우병사가 된 것을 생각하면, 입성 당시 그가 지휘한 의병이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관군을 총괄했고 그의 휘하에는 최희립, 문홍헌, 김예수, 구희, 최억량, 안기중, 오방한, 김인갑, 김의갑, 문정, 최홍우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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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의병부장 고득뢰 - 최경회의 부장으로 최경회가 관군과 함께 이끌고 입성한 의병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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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병사 황진 -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 전사자 파악 수 97명. 가장 활약한 장군으로 여겨진다. 휘하에 강홍덕, 윤구수, 소제, 양응원, 김사종, 김언종 등이 있으며, 강홍덕은 황진 휘하의 부장으로 종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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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에 태안 군수 윤귀수, 결성 현감 김응건, 당진 현감 송제, 남포 현감 이예수, 황간 현감 박몽열, 보령 현감 이의정, 해미 현감 정명세, 회덕 현감 남경성, 웅천 현감 허일 등 다수의 충청도 수령들이 휘하 병력과 함께 황진을 따라 남았다.[28] 단 이 병력은 황진이 거느린 병력에 포함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오희문의 쇄미록에 의하면 전사한 호서(충청도) 수령의 수가 9인이라고 하는데, 그중 한명인 회덕 현감 남경성은 후에 극적으로 생존했음이 확인된다. 황진 휘하의 군관인 정로위 인발도 극적으로 생존해 이시언에게 이를 보고했다. 또 그밖에 황진의 일가인 6촌동생 황대중이 황진 휘하에 참여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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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판관 성수경 -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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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판관 최기필 - 입성시 가솔로 구성된 의병 6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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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의병장 고종후 - 입성시 700명. 고경명의 아들이며 고인후의 형이다. 그의 휘하에는 오유, 오빈, 김인혼, 고경형, 조곤남, 김언희, 서홍도, 노비 봉이, 귀인 등이 있었고, 복수 의병 부장 오유가 부장으로 종군한 듯 보인다. 전사자는 파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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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의병장 전사의 - 입성시 몇명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사자 파악 수 50명. 고종후의 휘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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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개 의병 부장 이잠 - 입성시 400명. 전사자 파악 수 50명. 남원 의병장(적개군) 변사정의 부장으로 진주성 지원군을 이끌고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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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이계련 - 입성시 300명. 전사자는 파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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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의병장 민여운 - 입성시 100명. 전사자는 파악되지 않았다. 휘하에 정윤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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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의 대장 정원한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11명. 민여운 군의 부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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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의병장 강희열 - 입성시 200명. 전사자 파악 수 50명. 강희보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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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탄 의병장 강희보(강희복) - 입성시 숫자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30명. 강희열의 형으로 휘하에 임우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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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목사 서예원[30] - 진주성이 본래 확보하고 있던 주둔 병력(본주군)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몇명이 있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전사자 파악 수는 2,4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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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군관 정평구[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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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현감 장윤 - 입성시 300명. 전사자 수 파악 안됨. 휘하에 남응개, 김대민, 김신민 등이 있었다. 당시 황진 다음으로 전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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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현령 김준민[32]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수도 파악 안됨. 무력에 능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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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부사 이종인[33]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수도 파악 안됨. 휘하에 사촌동생 이인민이 있다. 황진과 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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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의병장 임희진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수도 파악 안됨. 휘하에 아들 임달영, 임준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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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년(직책 파악 안됨)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30명. 임희진 군의 부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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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의병장 심우신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12명. 휘하에 임두춘, 김보원, 김부행, 최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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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군 대장 정충훈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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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의 대장 정운호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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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부사 정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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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손승선 - 밀양 출신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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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유함 - 휘하에 박안도, 이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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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의병장 윤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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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복병장 정유경, 고성 임시현령 조응도 - 휘하에 군사 5백여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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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의병장 김극후, 김극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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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헌 - 휘하 가동 100여 명을 거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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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영 우후 성영달, 수문장 장윤현, 김태백, 판관 박승남, 선무랑 양제, 수문장 박세항, 진주군관 윤사복, 전 만호 최덕량, 진주군관 이눌, 영리 하경해, 사천가수(假守) 신갑(辛𥑐), 전력부위 강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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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시 주부 유복립 - 김성일의 생질.
입성시 파악된 병력의 수와 파악된 전사자 수가 상당히 차이나며, 특히 원래 진주성 방위를 맡았던 '본주군'의 총수가 몇명이었는가, 진주성 방위 준비를 할 때에 이 병력도 헤아려졌는가는 논란거리이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진주성에 배치돼 방어하던 주둔군인 본주군이 어림잡아 2,400명 ~ 3,000명.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입성하면서 끌고 들어가 규합한 병력이 2,800명 ~ 3,000명, 이후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기 직전까지 입성한 의벙 및 관군 수 미상, 도합 6,000명 ~ 7,000명 정도가 진주성 방어에 나선 것으로 파악된다. 총 규모는 진주 대첩의 2배에 육박했으나 병력 수에 비해 지나치게 지휘관이 많고 지휘 체계 단일화에 어려움이 있었지 않은가 여겨진다. 실제로 이는 조선 측이 추후에 분석한 패전 원인이기도 하다.[34] 물론 이건 싸우다 죽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순 없으니 변죽을 올린거고 가장 큰 패인은 그냥 숫적 열세였다. 강을 끼고 있다지만 그래봤자 평지 읍성인데 1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명목상 지휘권은 진주 목사인 서예원에게 있었으나, 이전에도 도주 의혹이 있는 등 겁이 많고 능력이 모자랐던지라 의병장 김천일이 사실상 성 전체의 방위 사령관을 담당하고, 최경회와 황진, 장윤 등이 실 지휘를 맡았다.
그외에 다수의 일반 백성들이 있었는데, 진주 대첩의 영향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 더 많은 백성들이 입성했다고 한다. 조선 측 기록에는 약 6만, 일본 측 기록에도 진주성에서 죽은 자가 3만에 달한다는 것으로 볼때 수만, 어쩌면 3만 이상의 백성들이 진주성에 입성했다가 성이 깨지면서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명군 유정 휘하의 임호가 이끄는 수만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구원했다가 다치바나 무네시게,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등에게 격파되었다.
진주성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에 큰 강이 흘러 공성이 아예 불가능했고, 서쪽도 절벽이 있어 방어에 수월했다. 북쪽은 3개의 못(대사지)으로 된 큰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본 측 사료인 《일본전사 조선역》에 따르면 폭이 약 100m, 길이가 700m ~ 800m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동남쪽 부분은 선조 24년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성을 확장해 지었는데, 지나치게 넓고 아래로 내려 쌓아서 방위가 취약해졌다고 한다.[35] 이러한 동쪽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참호를 파고 다시 남쪽으로 강에 연결되게 만들었으며[36], 동문 밖에 제방을 쌓아 성첩으로 삼았고, 또한 서북쪽도 대사지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취약점으로 존재했는데 이지역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호를 깊게 파서 물을 담아 취약점을 보강하였다.
또한 진주성 주위에는 4개의 작은 산성이 존재했다. 이들 산성들은 진주 대첩 당시 외곽에서 진주성과 호응하는 조선 측 병력의 거점으로 기능하여 승리에 이바지하였으나, 이때에는 너무 일본 측 병력이 많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이러한 외곽 산성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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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당 산성 : 진주시 일반성면 대천리, 작당산(해발 252m)에 위치. 둘레 250m. 진주성이 함락되자 이 지역 방위를 맡은 관군이 거점으로 잡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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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 산성 : 진주시 대곡면 대곡리, 죽방산(해발 300m) 정상부에 있으며, 둘레 4km 내외의 매우 큰 성이다.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어 잔존 흔적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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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 산성 : 진주 3현 중 하나인 영선현에 속했던 성으로, 오늘날 진주시 금곡면 성산리에 위치한다.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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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대산성 : 진성면 중촌리, 하촌리, 금산면 가발리를 연결하는 장군대산에 있는 석축 성지로,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4개소에 석축 기지가 남아있고 둘레는 동단 각각 240m, 130m, 100m, 서단 100m이었다.
4.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
4.1. 전투 전야(6월 15일 ~ 6월 20일)
4.2. 6월 21일
4.3. 6월 22일
일본군은 먼저 도착해 공격을 시작했다. 낮의 1차 공격에 대응해 조선군이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맞추차 일단 물러났고, 초저녁에 다음 부대가 도착하자 일본군은 다시 공격, 저녁 10시에 물러났으며, 밤 12시에 다시 진격했으나 황진, 이종인, 장윤, 김준민, 오유, 이잠, 강희보, 강희열 등 조선군 장수들이 진두지휘로 방어전을 펼친 끝에 새벽 4시에 물러났다. 특히 순성장 직을 맡은 황진이 대활약했다고 한다.
또한 이때 일본군은 진주 대첩 당시 상당히 곤욕을 맛보았던 외곽 해자를 메꾸는 작업에 들어가, 서북쪽과 동남쪽에 둘러친 해자의 물을 빼고 흙으로 매꾸어 공격 루트를 만들었다.
이날 저녁 호위병 부장 강희보가 김천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파견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강희보의 부하인 임우화를 파견했으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은 이 전령을 결박한채로 공격조 맨 앞에 내세워 심리전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4.4. 6월 23일
4.5. 6월 24일
4.6. 6월 25일
이때에 고성의 의병장 최강, 이달 등이 진주성 구원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규모가 크고 경계가 삼엄해 접근에 실패했다. 오히려 최강이 이끄는 의병군 300명은 일본군의 역공에 포위 섬멸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최강의 분전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4.7. 6월 26일
직후 장마비가 내려 궁시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피곤해했다. 이에 일본군은 '대국의 군사도 장차 항복할 것인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는가?' 하는 글을 던지자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따름이다. 천명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여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 고 답했고, 이에 일본군은 '당장(唐將)[37]은 이미 모두 물러갔다.' 하는 등 심리전을 지속적으로 걸어왔다.
이날에도 밤낮으로 쉬지않고 공격해온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4.8. 6월 27일
초저녁에 일본군이 다시 북문을 공격해 성문 위로 올라오기까지 했지만 이종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4.9. 6월 28일
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黃進)이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鐵丸)을 쏘았는데, 판순(板盾)을 뚫고 진의 이마에 맞아 진이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勇略)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5번째기사)
황진의 허무한 전사와 서예원의 무책임함으로 인한 북쪽 성벽의 약화는 사실상 진주성의 운명을 결정지은 치명타로 일컬어진다.
4.10. 6월 29일
마지막 날,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서예원이 겁을 내며 울고 다닌다고 해서 경상 우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을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대신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곧 전사했다.
이날 폭우가 내려 동문이 무너져 일본군이 난입해오자, 이종인이 이를 일시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시 귀갑차를 활용해 북쪽 성벽도 무너뜨리려 시도, 정오 무렵 기여코 이에 성공하면서 북쪽을 담당하던 창의군이 무너졌고, 결국 이쪽으로도 일본군이 난입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수성장 김천일과 그 아들인 김상건, 최경회와 고종후, 최기필 등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김준민 이하 장수들 대다수는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종인은 적병 둘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고, 목사 서예원은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다. (일본측 기록에서는 목사가 싸우다 부상을 입고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공격해 죽였다고 한다.)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죽은 자가 6만여, 일본 측에서는 이것이 과장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일본 측 자신의 사료에서도 음덕기에서는 진주성에 인구가 3만이고 그중 강으로 도망친 수백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죽었다고 기록되 있으며, 또한 일본전사 조선역에서는 일본군이 취한 수급만 2만이 넘고[38] 그 외에 엄청난 수의 포로를 포획했으며 익사한 자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임란 후 진주 일대의 인구가 너무 급감해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까지 했다.
살아남은 자는 황대중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여기서 포로로 잡힌 강우성은 일어 교육책자인 첩해신어를 쓴 바 있다. 전투 후 일본군은 진주성을 철저히 허물어 평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 7월 이후 전라도의 상황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권율(權慄)의 장계를 보니 왜적이 온갖 방법으로 진주를 공격하고 있는데, 명군(明軍)은 아직까지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적과 대진(對陣)하고 있는 외원(外援)으로는 오직 선거이(宣居怡)·이천(李薦), 홍계남(洪季男) 뿐으로 그 형세가 매우 외롭고 약하다고 합니다. 품첩은 이미 정사(正寫)하였습니다. 권율의 생각은 다만 요해처(要害處)를 지켜 호남을 보전하고자 할 뿐,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이니, 이런 뜻으로 급히 권율에게 하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3일 을축 8번째 기사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군대를 몇개로 나누어 전라도로 몇 차례 진입시도를 해서 하동과 사천 등을 약탈하면서 남원과 구례 방면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남원성 방어태세에 들어간 명나라군과 홍계남의 반격을 받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 전력을 기울여 진주성을 함락한 것과는 달리 몇 차례 전투만 치루고 그냥 돌아간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군이 적극적으로 전라도로 진격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에 전투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래 나오는 장흥부사 유희선으로 인한 소요사태와는 별개로 일본군이 전라도 남원 방면으로 진입시도한 것도 사실이다.
이때 낙 참장(駱參將, 명나라 장수 낙상지를 말함)은 남원에 있으면서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여 죽음으로 지킬 계획을 하고, 포수(砲手) 3백 명을 파견하여 취성(鷲城)에 진을 친 다음 영상(嶺上)에 기치(旗幟)를 많이 벌여 놓고서 불을 들어 호응하게 하였다.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내려가다가 적의 선봉(先鋒)을 만나 길에서 적을 공격하여 수십 리를 가며 싸우다가 구례(求禮)·광양(光陽)에 이르러 오랫동안 크게 싸우니 적이 물러갔다. 1기는 사천(泗川)·고성(固城)으로 향해 가서 분탕질을 했고, 1기는 삼가(三嘉)·의령(宜寧)으로 향해 가서 공사(公私)의 가옥(家屋)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함안(咸安)·창원(昌原) 등지에 주둔하였으며, 1기는 포로로 잡은 남녀와 복물(卜物)을 싣고 김해(金海)를 향해 돌아갔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6일 무진 5번째기사 )
적병이 갑자기 구례현(求禮縣)에 들이닥쳤다. 불의에 적이 이르렀으므로 사민(士民)들이 태반이나 상해를 입었는데, 적은 마을을 불태우고 성곽을 무너뜨렸다. 남원(南原)의 군민(軍民)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 흩어져 하룻밤 사이에 성을 비우고 빠져나갔다. 적병이 또 곡성(谷城)에 들어가 주민을 거의 다 살략(殺掠)하였다.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사대수(査大受)·송대빈(宋大斌) 등과 우리 나라 장수 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물러나 진을 쳤는데, 조금 후에 유정(劉綎)이 군사를 보내 남원을 구원하였다. 낙상지·송대빈 등 여러 장수가 비로소 우리 나라 이빈(李蘋) 등과 더불어 남원성에 들어가 지키니, 적이 마침내 군사를 철수해 진주로 돌아갔고 인하여 해상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강화의 일을 의논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7월 1일 계축 2번째기사)[39]
6. 민간인의 항거
어린 소년인 정열은 할아버지 정관윤이 죽자 적진에 돌진하다가 죽었으며, 할아버지 김개와 손자 김덕련도 함께 죽었다. 아버지 송건도, 아들 송국평은 가동 30여 명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공을 세웠는데, 이번에도 진주에서 항거하다가 죽었다. 54세의 문귀생도 죽고 진사 이운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참봉 안흥종도 이 때 죽었으며, 선비 하계선, 최언양도 전사했다.
정대보는 만 명을 당해낸다는 장사로 김시민 휘하에 진주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는데, 이 때도 참가하면서 수십 명을 쓰러뜨리고 사망했다. 돌팔매꾼 조씨는 원래 함안에 살았고 1백여 명을 쓰러뜨렸다.
정기룡의 아내 정씨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적삼에 글을 쓴 후 집안사람을 통해 정기룡에게 상황을 알리게 하면서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촉석루로 가서 강에 투신했다.
수문장 정천계의 아내 이씨는 왜군이 말에서 끌어내리려 하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살해당했고, 16세인 이씨의 딸은 어머니가 당하는 것을 보고 연못에 투신했다. 승사랑 정승업의 아내 최씨는 붙잡히자 왜적을 꾸짖다가 죽었으며, 의금부 도사 이번의 아내 황씨도 칼을 들고 싸우다가 죽었다.
허진의 아내 김소사는 친정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몸으로 막으면서 막대기로 왜적을 공격했다가 죽었으며, 정훈의 아내 이씨는 남편이 죽자 왜적을 꾸짖다가 두 팔이 잘린 채로 죽었고, 효자인 이경훈의 아내 성씨는 전투가 끝나고 이경훈과 함께 산골로 피난하다가 적에게 붙잡혀 이경훈이 먼저 살해당하자 포로로 끌려가다가 강물에 투신했다.
이유해의 아내 하소사는 집현산에 숨어있다가 왜적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다가 강의 절반 쯤에 이르자 아기를 업은 채로 투신했으며, 9살의 딸은 물에 빠져 함께 죽고 19살의 친정 여동생은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선비 정삼성의 아내 강씨는 왜적이 산 속으로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먼저 죽고 왜적에게 꾸짖다가 죽었으며, 김선명의 아내 정소사는 산 속에서 붙잡혔다가 낭떠러지에 투신했다.
강순의 딸 강소저는 산 속에 숨었다가 붙잡혔다가 죽었고, 보인 채학의 아내 변씨, 한응의 딸 한소저, 선비 강순의 아내 하씨, 강세진의 아내 김씨도 절개를 지키고 산 속에서 죽었으며, 선비 강검의 아내 정씨는 산 속에서 왜적을 꾸짖다가 죽었다. 선비 윤여훈의 아내 최씨, 정희성의 아내 정씨, 부장 유홍의 딸 유소저, 첨사 김진의 아내 강씨도 붙잡혔다가 죽었다.
수군 장억수의 아내는 일찍이 과부였지만 왜적에게 붙잡히자 죽었고, 평민 김소사는 밤 중에 적을 피해 달아나다가 사지가 잘려 죽었으며, 이형복의 아내는 함안으로 피난하다가 적에게 붙잡혀 죽었다. 하증의 어머니 강씨도 항거하다가 죽었고, 안몽량, 안광윤, 안몽구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의령을 피난하다가 적에게 붙잡히자 자결했다.
7. 끌려간 포로와 탈출한 생존자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교를 정상화하고 포로 쇄환 문제에 대해 추진했는데,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힌 김춘복이 통역관을 통해 귀국자에 대한 보호 대책에 대해 호소했다.
비거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정평구는 비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하지만, 비거가 부서져 그 부상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훗날 군자감정을 역임한 강우황은 이 전투 당시에는 어렸는데, 아버지 강기룡이 전사한 것을 알고 진주성에 들어가 동생 강계황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시묘를 하다가 왜적에게 붙잡혔고, 부산 동래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진의 육촌동생 황대중이 이 전투에 살아남았다가 남원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최홍우는 작은 아버지 최경회에게 성이 함락되기 전에 최경회의 그림과 언월도를 받으면서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아 성을 탈출했고, 의병장 임희진의 아들 임달영, 임준영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탈출했다.
인발은 황진 휘하의 군관으로 충청도 보령에 살았고 6월 15일에 함안에서 진주성으로 들어갔으며, 신북문을 지키다가 화살이 떨어져 성 밖으로 뛰어내려 시체 속에 묻혀 있다가 밤을 틈타 몰래 빠져나와 진주성이 함락된 상황을 조정에 보고했다. 함양 등 인근 군, 현의 병사는 최경회 소속으로 대부분 죽었으나 이인년, 선응남 등 몇 명만 살아남았으며, 회덕현령 남경성은 성이 함락된 날에 왜적에게서 푸른 바지를 빼앗고 머리를 단발로 깎아 왜적처럼 갈고리를 꿰어차고 적에 섞여 웅천까지 돌아갔다.
이로, 이탁영, 하명, 정경운 등이 살아남아 각기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인 용사일기, 용사일록, 진주성일기, 고대일록을 저술했다. 전령으로 파견되었다가 왜적에게 붙잡힌 임우화는 전라도로 공격하는 왜적에게 끌려 다니다가 하동에서 탈출해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가 안방준에게 이 전투에 대해 알려줬다.
남원에서 온 3백여 명 중 몇 명만이 겨우 살아남았고, 정기수는 이렇게 산 장령으로 후에 병자호란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하증의 동생 하변은 적에게 붙잡혔다가 하증이 밤낮으로 살릴 계획을 세워 무사히 돌아왔으며, 안몽량, 안광윤, 안몽구는 어머니가 죽으면서 서로 죽으려 하자 적들이 내버려두고 떠나면서 살아남았다.
8.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영향
2차 진주성 전투로 인해 전라도로 들어오려는 왜군의 기세가 멈췄다는 평가는 현대에 와서 생긴 대중의 평가일 뿐인 것은 아니다. 왜란 직후에도 이러한 평가가 있었다. 물론 이것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별개이다.
이 전투로 인해 전라 좌의병은 지휘부가 전멸했고 전라 우의병은 병력 대부분을 상실해, 전국의 의병 중 가장 전력이 강했던 호남 의병대는 사실상 와해된다. 이때 전사한 사람들은 18세기 호남 절의록 편찬 때 대거 이름을 올린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대로 경상도 남서부 지역 및 진주 인근의 인구가 급감하는 바람에 행정구역을 재편하게 된다.
왜군의 피해는 불명이다. 물론 왜군의 의도와는 별개로, 진주성이 2차 전투에서 함락되기는 했으나 거의 10만의 군대를 상대로 열흘을 버텼기에, 왜군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무시하기 어려운 피해가 났을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 위에 나와있는 왜군의 해자를 메우는 등 공성 전개 과정에 조선 측이 가만히 놀고 있었을리는 없다.
8.1. 패전 책임 논란
이때 전사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당시 방어의 중심이 누구였느냐 및 패배의 책임을 놓고 서로의 조상을 비난하며 싸우고 있다(주로 김천일과 서예원의 후손들). 2000년에 서예원의 후손이 서예원을 변호하는 장문의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런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론 김천일이 지휘관으로서 유능했다고 보기 힘들고, 또한 서예원은 무능한 장수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 서예원은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도 용맹 하나는 입증했고 김해성 전투 이후 백의종군했을 때 김면 휘하에서 김성일도 인정할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황진이 전사하기 전까지 아무 문제 없다가 황진이 전사한 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방어를 지휘한 핵심은 황진이었고 그와 공조해서 작전할 때는 모두들 나름대로 유능하게 잘 대처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왜군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누가 지휘권을 잡았더라도 6,000의 병사만으로 끝까지 92,000의 왜군을 막아낼 순 없었다.
8.2. 정평구의 비거?
정평구의 비거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여암전서>, <차제책>에도 기록되어있고, 정평구의 고향인 김제 군지에도 비거를 이용해 정평구가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를 조정에 보고했으나 조정에서는 하늘을 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터무니없이 여겨서 무시해버렸다는 것.
일련의 기록으로 미루어본다면 정평구가 뭔가를 만들었을 개연성은 충분한 듯하다. 다만 그것의 정체가 뭐냐가 문제인데, 이규경의 기록에 풀무가 등장하는 것이나 1인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아마도 열기구 같은게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고 당시의 기술 상 연에서 발전한 행글라이더 같은게 아니었나라는 추측도 있지만[43] 설계도 등이 남아있지 않아 명확하지는 않다. 200여년 뒤에 윤증의 증손자인 윤달규도 정평구의 비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9.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대중 매체
허생전의 어떤 이본에서는 나가사키에 간 허생이 진주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병사가 낙오하여 산을 넘다 진주성에서 아들을 잃은 노파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그가 자신도 일본에 노모가 있다고 목숨을 구걸하자 노모의 다른 아들이 저자가 왜인이긴 해도 효성이 있는 듯 하니 살려주자 하여 여차저차 하다 보니 그 일본군 병사와 함께 일가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후손을 만나는 내용이 있다.
신암행어사에서는 마치 온 조선이 다 함락된 후 최후의 6만명이 결사 저항하다 죽은 것 정도로 후기에 묘사했다.
2차 진주성 전투를 조명한 사극은 MBC 조선왕조오백년이 유일하다. 임진왜란 편 33회 후반과 34회 전체를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당시에 활용 가능했던 거의 모든 방송 기술이 총동원되어 지금의 눈높이로 봐도 어마어마할 정도의 대규모 접전을 제대로 묘사하였다. 특히 조선군이 사용하던 승자총통까지 구현했다. 눈물나는 스케일의 퓨전 사극으로 연명하는 지금의 MBC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부분. 전투에 참전한 장수와 의병장들의 면모를 하나하나 잘 묘사했으며 특히 최후에 왜군 둘을 한꺼번에 껴안고 기록 그대로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노라!"를 외치며 남강에 투신하는 이종인의 최후는 명장면이다. 배경의 고증 오류가 일어났는데 당시 전투는 여름에 벌어졌는데 겨울눈이 내리는 데에서 찍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6개월을 기다릴순 없긴하다.
징비록은 34회에서 배경 상황만 묘사하고 전투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했다. 조선 쪽 지휘관 다수가 구원을 포기한 사안은 언급하지 않고 명군이 현실적으로 구원할 수 없었던 정황도 무시한 채 조선 길들이기를 위해 일부러 출병하지 않은 것으로 왜곡했다.
임진록1의 일본군 8번째 임무가 2차 진주성 전투이다.
1990년대 중엽에 나온 국내의 모 인문 역사 서적에서는 임진왜란 와중에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역할을 철저히 폄하하고 이 제2차 진주성 전투야말로 임진왜란의 행방을 좌우했다며 마치 독소전쟁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같았다는 식의 평가를 했으나 저자의 관점이 너무나 편협하여 설득력이 낮다. 애초에 그 서적의 관점부터가 지나치게 탈민족주의에 치우져 있고 역사학계에서 아무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 이순신 폄하론을 대놓고 했던 터라...
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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