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의거와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만남
* 1946년 7월6일 서울 효창원에서 열린 삼의사 장례식. 매헌윤봉길전집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는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삼의사의 묘가 있다.
이들은 고향도 나이도 다르고, 서로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나란히 누워 있게 되었을까.
모든 일은 이봉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 출신인 이봉창은 일본에 건너가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일본인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고,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갔고,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갔다. 그는 자신이 도쿄로 가서 일왕을 죽일 수 있다며 이 일을 맡겨달라고 했다.
김구는 그를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키고, 수류탄 두개를 구하여 넘겨주었다.
이봉창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1932년 1월8일 도쿄의 궁성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관병식에 갔다 돌아오는 일왕 일행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은 일왕 뒤편의 마차에 맞았고, 위력도 약했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도쿄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에 31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 사건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정부는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사임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중국에서도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상하이의 ‘민국일보’는 “한인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맞지 않았다. 불행히도 겨우 부속 차량에서 폭발했다”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불행히도’라고 제목을 단 것에 대해 일본 측은 중국 정부에 항의했다.
당시 일본군은 열강의 관심을 ‘만주’에서 ‘상하이’로 돌리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상하이의 중국인 부랑자들을 매수해 일본 승려들을 습격하는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 해군은 이 사건을 구실로 상하이에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켰다. 이것이 ‘상하이 사변’이다. 일본 측은 육군 9사단 등을 보내 상하이파견군을 만들었다. 중국 측 19로군이 이를 막아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중국군이 퇴각하고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런 가운데 4월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 측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군대 사열식과 천장절 행사를 열기로 했다.
윤봉길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로 간 그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김구를 만난 그는 자신도 이봉창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침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 행사가 공지되었다. 김구는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할 것을 제안했고, 윤봉길은 흔쾌히 수락했다.
김구는 이봉창 의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 강력한 성능의 폭탄을 만들어줄 것을 중국인 기술자에게 당부했다. 김구는 윤봉길을 애국단에 가입시키고,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 두개를 건네주었다.
4월29일 아침 윤봉길은 훙커우 공원으로 갔다. 군대 사열식이 끝나고 천장절 행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 연단 뒤 군중 속에 있던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들고 몇 걸음 앞으로 나가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연단 위에 정확히 떨어져 폭발했다.
연단에 있던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상하이 주재 공사 시게미쓰가 중상을 입었다. 가와바타는 다음날 사망했고, 육군대신을 지낸 군부의 거물 시라카와는 5월에 사망했으며, 시게미쓰는 다리 하나를 절단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9사단 군인들에게 바로 붙잡혔다. 상하이파견군은 5월에 윤봉길을 군사재판에 부쳤고, 윤봉길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군 헌병대는 11월 윤봉길을 배편으로 이송해 오사카성 안 육군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12월18일 윤봉길을 체포했던 9사단의 본부가 있는 가나자와시로 이송했다. 9사단은 이튿날 아침 윤봉길을 처형했다. 그리고 전몰자 묘지 밑의 통행로 옆에 암장했다. 윤봉길의 나이 24살이었다.
윤봉길 의거 뒤,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임정은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윤봉길 의거 뒤, 상하이에는 아나키스트 십여명이 모여들어 제2의 윤봉길 의거를 꿈꾸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일본인 오키로부터, 상하이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1933년 3월 중순 육삼정에서 유지들과 회식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이들은 아리요시 암살 계획을 세웠고, 거사에 참여할 사람으로 원심창·백정기·이강훈을 뽑았다. 세 사람은 거사일인 17일 권총과 김구가 넘겨준 폭탄을 들고 육삼정 부근으로 갔다.
그러나 오키는 일본 영사관 경찰의 밀정이었고, 육삼정 회식설은 경찰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세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경찰의 취조를 받고, 일본 나가사키 재판소로 넘겨졌다. 원심창과 백정기는 무기징역, 이강훈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백정기는 1934년 38살의 나이로 옥사했다. 원심창과 이강훈은 1945년 10월에야 석방되었다.
1945년 11월 말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자, 1946년 2월 윤봉길 가족은 김구를 찾아가 윤봉길의 유해를 봉환해달라고 요청했다.
김구는 도쿄의 박열에게 연락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김구가 보기에 세 사람의 의거는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박열은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서상한에게 이를 부탁했다. 서상한은 대구 사람으로 1920년 메이지대 학생 시절 영친왕 혼사 때 폭탄을 던져 이를 방해할 계획을 세우다가 체포되어 4년간 옥고를 치른 이였다.
서상한·이강훈 등은 삼의사 유해봉환회를 만들고 가나자와로 갔다.
가나자와에 살던 한인 청년 수십명이 그들을 도와 발굴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발굴 사흘째인 3월6일 마침내 유해를 찾아냈다. 윤봉길의 유해는 도쿄로 옮겨졌다.
봉환회는 이봉창과 백정기의 유해도 그들이 갇혀 있던 형무소 묘지에서 수습했다. 이들의 유해는 미군 측 도움으로 미군 함정으로 부산까지 운구되었다.
세 의사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하자, 부산 시민들은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대대적으로 추도식을 열었다.
세 의사의 유해는 ‘해방자호’ 열차 편으로 서울로 운구되었고, 서울의 태고사(현 조계사)에 안치되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조문을 왔다.
7월6일 5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좌우익이 함께한 최초의 국민장이 열려, 세 의사의 유해는 효창원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세 사람은 살아서는 만나지 못했지만, 효창원에서 만나 ‘삼의사’라는 동지가 된 것이다.
사흘 뒤면 4월29일 윤봉길 의거가 있던 날이다. 삼의사의 독립을 위한 헌신을 기억하자.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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