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카다바의 변 (서석철)

道雨 2007. 6. 8. 19:41

 

 

 * 아래의 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의학적인 시입니다.

 

 

 

 

           카다바(Cadaver)의 辯

                                                                     서 석 철




그대 오게나.

내 이제 地上에서 가장 겸허한 자세로

그대를 기다리네.

Anatomical Position으로 누워서.


그대들 男男女女, 三三五五.

하얀 까운에 마스크.

차가운 고무장갑에

반짝이는 금속성 메스를 품고

生死의 關門을 지나 총총히 다가오네.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날을.

이 만남을 위해 난 거의 평생을 달려왔네.

가까이 오게. 두려워 말고.

····················


자, 이제 분해하게나.

나도 몰랐던 몸 곳곳에

많은 이름도 붙여주고,

생전에 보지도 못한 뼈랑, 살이랑,

심장도 잘 끄집어 보여주게나.

살아서 열심히 뛰어주던 심장,

이제는 내 것도 아닌.

난 이제 찔려도 피 한방울 나지 않고,

뼈, 살이 나뉘고,

肝·心·脾·肺·腎을 들어내도 아프지 않아.

生者 때나 느꼈던 아픔과 분노

사랑, 미움, 번뇌 ···

욕망 따위는 없어.

우리 카다바는 뭐든 조용히 받아들이지.


우리들의 첫 만남.

그대들은 이 만남을 한잔 술로 기념하네.

生者들은 카다바와 첫 만남을 잊지 못하지.

날 안주삼아 오늘밤은 醉해보게.

··· 그렇다고 너무 씹지마.

나도 살았을 땐 한가닥 했었다구.

한잔 술이 있어

산다는 건 좋은 건가.


爾時

난 防腐液에 취해

낮일을 더듬어 보네.

우린 기억 더듬는 게 전부야.

요골척측피신경에 와닿는

人間의 生氣.

참으로 生氣發者靑春이더군.

이름 외느라 정신없는 娘子의 고운 음성.

떠꺼머리 총각놈들의 엉성한 칼솜씨.

아, 장장근이 끊어졌네.

·····················


이 모두가 엄청난 生氣투성이.

生氣와 接하면 사무치게 生時가 그리워지기도 하지.

하지만 난 카다바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어.

사는 것이 좋다면 죽음 또한 나쁘진 않아.

아마도 난 카다바가 되기 위해 살았던 것 같아.

카다바가 된다는 것은 幸運이야.


그대와 나

우린 본래 둘이 아니었어.

太初, 太虛 ···

오직 氣만 쌩쌩 縱橫無盡.

爾時 우린 카다바와 실습생이 아니지.

하나였다고.

億年 흐르는 세월 속에

잠시 시간差로 死生이 나뉘네.

나는 카다바, 넌 후보로.



그래 우린 진정 하나이기에

어지러운 난도질이 끝나면

잘 태워서 나를 가루로 흩뿌려주게.

난 無形의 氣가 되려네.

五運六氣에 실려

天地의 陰陽과 짝하며,

四時의 次序에 따라

無窮한 生死를 流轉하려네.

한번은 陰이 되고,

한번은 陽이 되고,

六途四生, 往來하며,

因緣따라 노닐레라.


그대.

靑春의 벗이여.

후보여.

영원한 길동무여.

잘 들여다 보게나.

··· 껄껄껄.








一 淚 精 氣    何 處 來    한 점 정기는 어디에서 왔으며

四 肢 百 節    何 處 去    사지백절 내 몸은 어디로 가는가

一 爲 人 身    走 紅 塵    사람으로 태어나 홍진 속에 살고 

呼 吸 暫 時    稱 人 生    잠시 숨 쉬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

魂 飛 魄 絶    頃 刻 中    혼비백절 목숨이 다할 무렵에야

方 悟 勞 生    一 夢 間    고달픈 인생 꿈인 줄 깨닫누나.

剖 室 靜 夜    臥 無 言    해부실 고요한 밤에 말없이 누우니

寂 寂 寥 寥    本 自 然    적막하고 고요함이 자연의 모습이라

何 事 太 極    生 萬 儀    어찌하여 태극은 만물을 생하고

生 滅 無 盡    歷 萬 劫    생멸이 억겁을 돌아 끝이 없는가




* 위 시는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잡지인 ‘仁東龜 제28호(1994. 1. 19)’에 실린 글임.

* 작자 서석철은 서울대학교 토목과를 졸업하고, 토목기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동의대학교 한의대에 입학하여 예과 2학년 해부학 실습 중 위 시를 썼으며, 현재는 부산에서 한의사로서 **한의원 원장으로 재직 중임.

* 잡지 원문에는 작자가 無名氏로 되어 있음.

* 주 : 한시 원문 옆의 해석은 오봉렬이 붙임.

* ‘카다바’는 의대(한의대) 학생들의 해부학 실습을 위한 시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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