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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포스코 주식 1주도 안가져…탐욕없던 삶”

道雨 2011. 12. 15. 10:36

 

 

 

   “포스코 주식 1주도 안가져…탐욕없던 삶”
 

 

조정래 작가가 본 박태준

인터뷰하며 만나 ‘15년 인연’, 쇳덩어리 같은 첫인상 강렬

“정직과 청렴, 그가 남긴 교훈”

 

 

 

 

»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왼쪽)· 작가 조정래(오른쪽)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씨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15년 이상 인연을 맺은 각별한 사이다.

조씨는 지난 2007년 펴낸 위인전 <큰작가 조정래의 인물 이야기>에 안중근·한용운·김구·신채호와 함께 박태준 명예회장을 포함시켰다. 당시 살아있는 인물로는 박 명예회장이 유일해 화제를 낳았다.

14일 이틀째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로 향하는 조씨를 만나 그가 본 인간 박태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고인은 경제인이면서도 “돈 앞에 탐욕이 없었다”고 말했다.

 

 

- 박태준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소설 <한강>은 경제발전사와 분단이 큰 중심을 차지한다. 경제발전사 속에서 포스코가 취재대상이어서 인터뷰 요청했다. 그랬더니 고인이 “당연히 해야지”라면서 흔쾌히 응낙했다.

고인은 평소에 문학·미술·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그래서 1996년 포항에 가서 처음 만나 장장 5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다.”

 

 

- 처음에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강력한 인상이었다. 무서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 몸체보다도 몇 배가 큰 어떤 쇳덩어리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눈빛이 그렇게 형형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을 압도하고 흡인력이 강했다.

또 태도나 언어구사가 자신감과 확신, 신념에 차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말하는데 다른 사람과 달리 진정성이 느껴졌다. 다른 정치인이 말하면 거짓말인데.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이후 10년 이상 보면서 위인전에 넣기로 결심했다.”

 

 



- 그래도 생존한 인물을 위인전에 넣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살아있는 사람으로 처음 위인전을 썼다. 주변에서 실패나 오류가 있지 않을까 우려가 많았는데, 나는 그분의 연세가 83살이었고, 야인이어서 잘못 저지를 게 뭐 있겠나 싶었다. 출판기념회 때 딱 하나 있을 수 있는 오류가 바람피우는 거라고 농담삼아 말했다. 그랬더니 “조 선생, 나 좀 놀리지 마시오”라고 하시더라.

 

이분은 한국 경제의 바탕을 만든 사람이다. 가전·자동차·조선 이 세가지 중요한 산업이 한국을 경제 대국 10위권으로 만들었는데, 포스코가 그 씨앗이 됐다. 포스코가 없었으면 지금 우리나라 국민소득 1만불도 안 됐을 것이다. 그 어느 대통령이 이만한 업적 세운 적 있겠느냐. 한명도 못했다.

위인전은 국내 25명, 국외 25명 총 50권 계획으로 진행했다. 국내 25명은 조선에서 근대까지가 20명, 현대 인물 5명으로 구성했다. 현대 인물 5명 중 유일한 생존인물이 박 명예회장이다.”

 

 

- 고 정주영 현대,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분들은 사사로운 자기 사기업을 했을 뿐이다. 이분은 공기업을 일궜다.

퇴직금, 주식, 스톡옵션 한푼도 안 받았다. 포스코 주식 하나도 없다.

그리고 14억원짜리 집 팔아서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집 한채도 없다. 이런 분 있느냐?”

 

 

- 진보진영에서 박 명예회장을 위인전에 포함시킨 것에 대해 비판하는 말 없었나?

 

“출간된 지 4년 지났지만 진보진영에서 한명도 이에 대해 얘기 안하더라. 그 정도로 객관적인 사람이다. 인터넷 등에서도 안티 걸 수 있을텐데 하나도 안하더라.”

 

 

- 후세대가 새길 만한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직과 청렴이다. 이분은 우리의 사표다. 돈 앞에 탐욕이 없었다. 위인전에 넣은 이유도 이런 인간적 측면을 본 것이다. 최근 포스코 후대 회장들이 스톡옵션 받는다고 하자 난리가 났다. 할복자살 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무서워서 못 받은 것이다.”

 

 

- 왜 그렇게까지 완강하게 반대했나?

“거기에는 ‘제철보국’이라는 신념이 있다. 포철은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지은 것이다. 선조들이 흘린 피값으로 만든 회사인데 감히 무슨 자격으로 그러느냐는 것이다. 애국주의다.

우리 현대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간이다. 참된 인간이다. 이런 분은 앞으로 100년 안에 없을 것이다.”

 

[ 박현 기자 hyun21@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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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인’의 목욕론 

 

 

엊그제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회사를 국가, 임직원은 국민으로 여긴 듯하다.

1970년대 초반 포항 영일만 모래벌판에 세운 종합제철소는 그에게 국가의 축소판이었다. 박 회장이 현장을 누빌 때 직원들에게 늘 강조한 덕목은 ‘청결’이었다.

 

1974년 12월 포항종합제철 사보 <쇳물>의 송년특집호는 당시 박태준 사장의 ‘목욕론’을 다뤘다. 직원 부인들한테도 목욕령을 시달했다는 해설기사도 썼는데, 사장은 과장보도라며 편집 책임자에게 정정을 요청했다. 목욕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랬다.

 

“목욕을 잘해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주위의 지저분한 것, 바르지 못한 것, 정리정돈되지 않은 것들을 수용할 수 없다. 깨끗한 몸은 현장 안전과 제품의 질로 나타난다. 회사는 최고의 제품을 추구하기 때문에 직원들은 나의 목욕론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지 부인들에게 목욕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박 회장은 산업 현장에서부터 청결한 문화가 뿌리내려야 전체 국민 수준도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 전 공장과 직원 숙소에 해마다 수십억원씩 들여 특급호텔 수준의 목욕탕과 화장실을 갖추도록 하기도 했다.

 

깨끗한 몸은 깨끗한 마음으로 이어진 듯 그는 치부나 부패 같은 너저분한 흔적 없이 세상을 떴다.

 

포스코의 창사 주역이며 26년 동안이나 최고경영자로 지냈는데도 그의 이름으로 남은 회사 지분은 단 한 주도 없다.

서울 아현동에 있던 집도 지난 2000년 공익재단기부했다.

마지막까지 큰딸 집에 얹혀 지내고, 병원비도 자녀들 도움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그는 인생 목욕론까지 실천했다.

박 회장의 전기집을 낸 소설가 조정래씨는 “고인은 돈 앞에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기의 철강신화’를 남기고 빈손으로 떠나는 그의 명복을 빈다.

 

[ 박순빈 논설위원 sbpark@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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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준과 수요시위로 본 한-일 관계
 

 

 

» 김효순 대기자
‘철강왕’으로 불리던 박태준씨가 세상을 떠났다.

포스코(포항제철)가 오늘날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로 자리잡은 역사는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애초 영일만의 허허벌판에 종합제철소를 세우려던 계획은 1960년대 후반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 철강회사들로 구성된 국제차관단을 통해 자본과 설비 도입을 하는 쪽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채산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구미의 회사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바람에 제철소 건설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이 무렵 40대 초반의 박태준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 사람은 일본 정·재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던 야스오카 마사히로였다.

양명학에 정통한 동양사상학자로 일제 때 우익운동이나 군부에 영향을 끼쳤던 야스오카는 일본의 패망 이후 한동안 공직 추방 조처를 당했지만, 바로 예전의 위상을 회복했다.

요즘 유행어로 하면 자민당 유력 정치가나 재계인들의 막후 ‘멘토’였다.

현재 아키히토 일왕의 연호인 헤이세이(평성)는 그가 생전에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가 거의 30살 차이가 나는 박태준이 찾아와 고충을 토로하자 야스오카가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연결해준 사람이 이나야마 요시히로다.

이나야마는 우리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경단련의 회장을 지낸 재계의 거물인데, 당시는 야하타제철의 사장이었다.

그는 1970년에는 후지제철과 합병해 세계적 철강회사인 신닛테쓰(신일본제철)를 설립해 3년간 사장으로 재직했고 다시 회장으로 9년을 지냈다. 그가 일본의 다른 철강회사들을 모아 박태준의 구상을 지원해주었다.

 

야하타제철의 전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드는 전초전이 되는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지은 것이다.

일본은 늙은 제국 청을 제압한 뒤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는데 이자까지 합치면 총액이 당시 일본 연간 예산의 2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 돈으로 육군과 해군의 상비군 규모를 대폭 늘리고 병기·군함의 자급조달을 위해 규슈 야하타에 관영 제철소를 지었다.

 

1901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 제철소는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다.

군비확충이나 산업건설뿐만 아니다. 명문대학의 하나인 교토대학의 전신 교토제국대학도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지어졌다.

이러니 근대 일본은 조선을 전쟁터로 유린하고 무참하게 살해된 조선인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제 일본대사관 앞에서 군대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수요시위가 열렸다.

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시작한 이래 무려 1000회째다. 단일 주제로 모이는 시민집회로는 오래전에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 결과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불평이 많았다. 총리 취임 이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해 새로운 한-일 관계를 열려고 했는데 위안부 문제가 돌출하는 바람에 곳곳에서 사죄발언을 하느라 망신만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평지 돌출한 것이 아니다.

식민지배의 악행에다 전시 강간, 여성차별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피해자들이 공개적으로 나서기가 대단히 어려웠던 사정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데는 윤정옥 교수가 1990년 1월 <한겨레>에 연재한 답사기가 큰 구실을 했다.

이후 김학순 할머니가 이름을 밝히고 일본 법정에 제소를 하자 필리핀·대만·타이·네덜란드 등의 피해여성들이 증언에 나섰다.

이 문제는 유엔 등 국제무대로 번져 전시 성노예를 강요했던 만행으로 규탄됐고 2000년 12월에는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를 심판하는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진지하게 대응하기는커녕 우익들의 반발로 교과서 기술에서조차 지워버리는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기대는 전가의 보도는 1965년의 한-일 협정으로 식민지지배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영구히 해결됐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협정 재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한쪽에서는 뉴라이트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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