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 행위 자행한 정부
긍정적 평가는 미-중 수교로 탈냉전의 물꼬를 튼 점에 맞춰져 있다. 반면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임기 중 퇴진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닉슨에게 안겼다. 이 사건은 1972년 닉슨 대통령 쪽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사실이 발각되고도 증거 조작과 수사 방해를 일삼다 의회의 탄핵을 받은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40년 전 남의 나라 이야기를 되짚는 건, 이명박 정부의 ‘전 국민’ 사찰 때문이다. 두 사건은 닮았다. 그런데 두 나라 국가기구의 대응은 천양지차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딥 스로트’(내부고발자·훗날 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 마크 펠트로 밝혀졌다)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실체를 고발했다. 언론과 고위 공직자의 고발로 닉슨의 위헌적 범죄행위는 만천하에 까발려졌다. MB 정부 사찰의 경우 2010년, 피해자 김종익씨의 고발로 실체의 한 자락이 드러났으나 검찰과 법원의 덮어주기식 수사·재판으로 은폐의 늪에 잠겼다. 그러나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는 법. 뒤늦긴 했으나 <한겨레21>의 ‘청와대의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 지시’ 단독 보도(901호 표지이야기),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가 전한 장진수씨의 고발, 한국방송 새노조의 팟캐스트 <리셋 KBS 뉴스9>의 사찰 파일 내용 보도 등으로 망각의 수렁을 빠져나왔다. 국가기구의 외면 속에 시민과 하위 공직자, 언론의 고발이 이뤄낸 성과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미국 의회와 사법부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분투했다. 연방재판소는 행정부의 압력을 뿌리치고 사건 관련자들에게 중형을 내려 진실의 편에 서려 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위는 청문회 등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파헤쳤다. 하원 사법위원회는 1974년 7월 세 차례에 걸쳐 탄핵안을 가결했다. 사법 방해(1차), 권력 남용(2차), 의회 모독(3차) 등이 탄핵의 근거였다. 닉슨은 1974년 8월8일 TV 연설을 통해 사임을 발표했다. 미국 정치사의 오점인 이 사건이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힘을 보여준 사건으로도 기억되는 까닭이다. 한국 사회를 거대한 파놉티콘(원형감옥)으로 만들려 한 이명박 정부의 무차별적 사찰에 비하면, 워터게이트 사건은 새 발의 피다. 전 국민을 범죄자로 취급하며 ‘언제 어디서나 감시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사찰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뿌리부터 갉아먹는 ‘이적 범죄’다. 행정부의 ‘이적 행위’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한민국의 검찰과 국회, 법원은 지금껏 나 몰라라 했다. 한국에서 사찰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하지만 진실의 전모가 드러난 적도, 정의가 바로 선 적도 없다. 예컨대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 때 고발자인 윤석양 이병은 2년간 감옥에 갇혀야 했다. 반면 사찰의 배후인 노태우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경질로 꼬리를 자르고는 며칠 뒤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 선포라는 공포정치로 진실을 덮으려 했다. 광주학살의 원흉 전두환이 삼청교육대로 한국 사회를 공포의 수렁에 밀어넣으려 한 것처럼. 21세기 한국 사회를 중세의 공포정치 시대로 역주행시킨 MB는 전두환·노태우의 전례를 따라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떵떵거리며 살게 될 것인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역량이 백척간두의 시험대에 섰다. 이제훈 편집장 *사찰 대상에 <한겨레21> 전임 편집장을 포함시킨 이명박 정부에 감사 인사를 전한다. 진실의 전모를 파헤칠 때까지 경각심을 잃지 말고 긴장하라는 배려로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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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편집장의 무엇을 캐려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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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이 사찰당했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 1팀이 <한겨레21> 불법사찰을 맡았다.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을 주도한 바로 그 팀이다. 불법사찰 관련자 재판 기록에 첨부된 검찰 수사 기록에서 일단이 드러났다. 2009년 11월9일 작성된 ‘1팀 사건 진행 상황’ 파일을 보면, ‘연번3/ 사건명/ <한겨레21> 박용현 편집장’이 등장한다. 처리 결과와 종결 사유는 공란으로 돼 있다. 사찰이 계속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 담당자는 현재 경기지방경찰청 관할 지역에서 파출소장을 맡고 있는 최아무개 경위다. 최 경위는 3월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바쁘다”며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박 전 편집장 사건이 하명 또는 인지 사건인지도 공란으로 남아 있다. 앞서 그해 8월25일에 작성된 ‘1팀 사건 진행 상황’ 파일에는 △B·H(청와대) 하명 사건 △총리실 자체 인지 사건 두 가지로 구분돼 있다.
“애원하듯이” 등 미세한 표정도 사찰해
박 전 편집장 관련 사찰 내용은 확보하지 못했다. 청와대가 제공한 대포폰과 하드디스크 전문 파괴 장비까지 동원한 증거인멸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방송사들에 대한 사찰 내용은 낙하산 사장의 ‘개혁 조치’, 조직 분위기, 노동조합의 ‘동향 파악’ 정도였지만, 박 전 편집장의 경우는 본인 이름이 특정됐다는 점에서 사찰 강도와 밀도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편집장에 대한 사찰이 어떤 수준과 방식, 내용으로 이뤄졌을지는 다른 사찰 보고서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2009년 5월19일, 한 사정기관 고위 간부에 대한 지원관실의 사찰이 이뤄졌다. 저녁 7시9분부터 새벽 1시까지 이어진 사찰은, 해당 간부의 모든 동선을 따라붙어 최소 4분 단위로 촘촘하게 이뤄졌다. 보고서에는 “시큰둥한 표정” “무덤덤한 표정” “애원하듯이” 등 사찰 대상과 주변인의 미세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관련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나눈 은밀한 대화까지 세세하게 보고됐다. 미행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도·감청까지 이뤄졌다는 의심을 낳는다. 법으로 규정된 지원관실의 업무는 △공직자 사기 진작 지원 △공직자 고충 처리 지원 △우수 공무원 발굴 △공직사회 기강 확립 △부조리 취약 분야 점검과 제도 개선 △공직윤리 지원과 관련한 국무총리 지시사항 처리에 한정돼 있다. 조직적인 증거인멸 탓에 그동안 지원관실의 업무 내용은 ‘파일 제목’으로 유추해보는 정도였다. 이번에 확보한 검찰 수사 기록을 통해 처음으로 지원관실의 업무 내용이 드러난 셈이다. 지원관실 업무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 ‘공직자’와 관련 있기는 하다. 하지만 보고서의 내용과 구성을 보면, 공직 윤리에 대한 점검보다는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탐지하고 다녔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예를 들어 강희락 전 경찰청장에 대한 A4용지 7장짜리 보고서를 보면 △국정철학 구현(별 4개 반) △직무역량(별 4개 반) △대외관계(별 4개 반) △도덕성 및 복무기강(별 4개 반)으로 평가됐다.
사실상 대한민국 전체가 사찰 대상
‘보위부’의 임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장 비위가
밑도 끝도 없는 개인정보 조회 2009년 10월12일 지원관실 1팀이 작성한 ‘전·현직 고위 공직자 재산 관련 조사보고’도 눈길을 끈다. 아파트 꼭대기층으로, 고가로 분양되는 펜트하우스 입주자 현황을 조사했다. 특혜 분양 여부 등을 따져보려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조사하게 된 계기나 이유는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보고서는 “ㄹ아파트의 경우 소유자는 최○○, 이○○, 홍○○인데 고위 공직자가 아니다. 용산구·용인시 소유자는 확인을 위해 금융결제원에 공문 조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고위 공직자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무턱대고 조사부터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금융기관에도 밑도 끝도 없는 자료 요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보고서에는 전 정권 고위 공직자의 펜트하우스 거주 여부가 실렸는데, 집 면적·층수·분양가 등이 적시됐다. ‘2009년 하명 사건처리부’에는 왜 이런 조사를 하게 됐는지가 나타난다. “9월7일 B·H(민정)에서 하명 접수”. 이유는, 없다. 대통령의 관심이 쏠린 4대강 사업도 지원관실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2009년 8월10일 지원관실 1팀에서 작성한 ‘4대강 살리기 사업 추진실태 점검 결과보고’ 문건을 보자. 주요 현안 및 문제점 가운데 하나로 “외부세력이 주요 민원 예상지에 침투해 연계투쟁을 할 우려”가 지적된다. “향후 민원 발생지에 불순세력 개입 상황을 파악하겠다”는 계획이 첨부됐다. 쌍용차 파업 진압작전도 지원관실이 ‘스크린’을 했는데, 이 역시 청와대 보고사항이었음이 드러났다. 관련 보고서의 마지막은 “B·H에 조치사항 및 결과 구두보고 후 상황 종결”로 끝난다. ‘좌파단체’를 찍어 누르고, 보수단체를 도와주는 일도 지원관실 임무였다. ‘2009년 제도개선 대장’에는 “행정안전부에서 비영리 민간단체에 지원되는 보조금을 보수단체에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2월24일)하겠다고 돼 있다. <한겨레21>을 사찰했던 최씨가 담당이었다. 반면 ‘2009년 하명사건 처리부’에는 ‘좌파 환경단체 보조금 중단 관련 공문’ 하명 내용이 보인다. 담당자는 1팀 전체였다. 보고서에는 지방자치단체인 서울시가 지원관실의 ‘을’로 등장한다. 2009년 전국공무원노조 부위원장의 불법노조 활동과 관련해 서울시에 적극 조처를 지시했는데 “서울시의 미온적 대응에 대해 엄중 문책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해당 노조 간부는 해임됐다. 이 과정에서 신지호 새누리당 의원실이 협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종익씨 사건에서 조전혁 새누리당 의원을 ‘활용’한 정황과 비슷한 맥락이다.
민주화 이후, 최초 청와대 개입 민간인 사찰 검찰은 왜 이런 중요한 물증을 확보하고도 “컴퓨터 하드디스크 복구에 실패했다”며 거짓말을 했을까. 이유야 간단하다. 민간인 불법사찰 수사가 이뤄지던 2010년 7~8월은 정권 후반기 향방을 가늠하던 시기였다. 그럼 법원은 왜 이런 중요한 물증이 수사 기록에 끼어 들어왔는데도 무시했을까. 검찰과 사법부는 무슨 정신으로 수사를, 재판을 했던 걸까. 1990년 10월, 국군보안사에 의한 민간인 사찰 사실이 윤석양 이병에 의해 폭로됐다. 국회의원·종교인·총학생회 간부·노동운동가·농민·대학교수·언론인 등 모두 1303명에 대해 주기적 사찰이 이뤄지고 있었다. 과거 보안사나 국군기무사, 국가안전기획부 등의 민간인 사찰 사실이 드러난 적은 있지만 청와대 인사가 직접 개입한 민간인 사찰은 문민정부 이후 처음이다. 대통령이 책임져라.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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